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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앤 Jun 22. 2023

어른이 된다는 것은

미국에 와서 돈이 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단지 돈을 버는 더 탁월한 지혜가 없었을 뿐이었지만) 그때 시간당 8불인 곳에서 샌드위치 주문을 받는 일을 했다. 어느 날 아이와 함께 온 엄마의 주문을 받게  되었다 . 아이의 나이는 7살 정도 되어 보였고 수줍음이 역력하면서 머리를 양갈래로 가지런히 땋은  여자아이였다.


“무엇을 주문하실 건가요?”

“저는 000를 주시고요, 아이는, 잠시만요.”


양갈래 머리의 엄마는 아이에게 어떤 샌드위치가 있는지 메뉴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고는 잠잠히 아이의 선택을 기다렸다. 정확하게 어떤 메뉴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이는 샌드위치 안에 들어갈 고기와 야채, 소스를 엄마를 통해 소곤거리며 전달했다. 빵은 토스트를 할 것인지 그냥 그대로 먹을 것인지도 이야기했는데 내내 쑥스러움(대부분의 아이들은 처음 접하는 사람이나 장소에서 수줍음을 탄다)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 광경을 퍽 낯설면서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양갈래 머리는 더 요청할 무언가가 있었는지 엄마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가 스스로 말하렴.”


내 얼굴은 양갈래 머리의 사랑스러움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 ‘이것이 미국의 교육이구나'하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런 광경은 나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고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이가 스물이 넘었는데도 나는 내가 스스로 좋아하는 걸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연극이 너무 좋아서 연극을 하겠노라고 했을 때조차 나에 대한 불안(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마음)이 엄습했고,  도저히 원하는 것과 자신감이 결합되지 않았다. 결국 엄마의 말대로 나는 연극이 아닌 다른 길, 그러니까 안정되며 익숙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콕 짚어주는 회사에 들어가 말썽 없이 일했던 나였다. 그런 내 앞에 7살 난 아이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는 오래전 내가 아이였을 때로 돌아가 나의 어린 마음을 쓰다듬는 역할을 했다. 아이에게 일일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먹을 건지 묻는다는 건 책임에 대한 경험을 안겨주는 일이다. 그런 결정권이 나 스스로에게 있으며 그걸 지지해 주는 부모가 있는 한 아이들은 잘못나갈 수가 없다는 걸 우리는 안다. 다만 그렇게 자라지 못했더라도 그 시절의 나를 가만히 안아줄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집을 떠나와 스물몇을 보내고 서른몇을 넘겼을 때에야 치킨의 하얀 살을 내가 더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깨달았을 때의 참담함이란. 그리고 곧 끼어드는 분명한 희열과 기쁨이라니.


요즘 5살 난 아들은 호기심이 생기는 먹을거리들을 닥치는 대로 모으고 먹어보는 중이다. R과 나는 제지하는 편은 아니다. 아님 말고의 식인데, 그 과정 속에 진짜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게 되는 걸 보며 부모의 인내와 믿음은 아이에게 자유를 선택하게 하는구나 느낄 수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그다음 세대(자녀 혹은 인류)에게 해 줄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즉 철이 들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했던 김기석 목사의 말이 생각난다. 비로소 청춘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기에 어른으로 철이 들었고, 시선을 돌려 다음 세대를 바라본다는 건 어른의 일이 되는 거라고 가만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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