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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앤 Jun 30. 2023

컵라면은 번개탄이 되고

컵라면에 물 안 붓고 전자레인지 3분을 돌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라면 한가운데만 동그랗게 타버리는데

마치 옛날 번개탄이 생각나는 비주얼이다.


맞다. 컵라면은 물 없이 번개탄이 되어 있었다.


냄새로 말할 것 같으면 숨을 도저히 쉴 수 없는 상황.

이 연기를 들이마시고 이틀을 목이 아팠다.


나는 왜 이런 짓을 했나.


혹시 치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건 아니다.


사람은 잠이 든 지 1시간이 지나면

수면 4단계 중 가장 깊게 잠에 빠지는 4단계에

접어든다.

정확히 1시간째 깊은 잠을 자는 도중

스마트폰이 울렸다.

R의 전화다.




너무 배가 고프니 컵라면을

전자레인지에 좀 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아, 이 남자가 이젠 간도 커지는구나.

자는 사람을 전화로 깨워 라면 심부름을 시키다니.

이 사람은 청춘인가.

이십 대에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면

귀엽게나 봐줄 일이지만,

사십 줄에 이런 일을 시키는 건

왠지 내 귀에 베토벤의 운명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전화는 이미 끊어졌고 밤의 정적만이 남았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싶어

친절하게 컵라면을 플라스틱 용기에서 꺼내

사기그릇으로 바꾸어 담고

뿌듯한 마음으로 전자레인지 안에 넣었다.

여기서 드는 ‘뿌듯한 마음'은 아마도

'환경 사랑'이라고 해두자.


시간은 3분. 모든 것이 완벽했다.

물을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기 전까지는.


드디어 베토벤의 운명을 마치고

침대에 다시 쓰러져

R의 전화를 받기 전으로 돌아가

기절 상태를 유지했다.


정확히 전자레인지가 ‘땡'하기 몇 초 전에

R은 집으로 입성했다.

기절한 나에게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전자레인지 여는 소리가 나는 순간,

심상치 않은 냄새가 급 코를 찔렀다.  


다시 베토벤의 운명이 들리는 순간이었다. 바바다 밤~~~~밤 밤


“컵라면에 물을 안 넣고 돌렸어?”


R의 둔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은 역전되었다.

그렇게 오만하던 나는

좀 전의 R이 내게 부탁하는 목소리처럼 작아져서

“어머! 내가 물 안 넣었다.”

라고 개미만 하게 말했다.


연기가 자욱이 주변을 채웠고,

탄 내는 목구멍을 쑤셔파듯 아프게 전달되었다.

헉.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창문을 열고 팬을 돌리고 부채질로 연기를

바깥으로 내보내며 이 꼴이 뭔가 싶었다.


R은 배가 너무나 고파

내가 자는 걸 알면서도 부탁을 했던 건데

되려 안 해도 되는 일까지

덤으로 맡았다.


연기를 빼고 전자레인지를 닦고,

다시 컵라면에 수프를 찢어 넣고 물을 붓고.

그 냄새나는 와중에도

R은 다시 컵라면을 데우고

기다렸다는 듯이

후루룩 쫩쫩 거리며 맛있게 해치우고 있었다.


다시 베토벤의 운명은 끝이 났다.

나도 별일 없었다는 듯

침대로 들어가 다시 쓰러졌지만

기절은 하지 못하고

몇 번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는 목구멍이 까칠 거리며 아팠다.

그놈의 탄내 때문이다. 젠장.


뉴스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친절하게 보도했다.

사건사고, 시사는 R이 적극적으로 듣는 채널인데

우리 집 사건은 다행히 보도되지 않았다.


까만 라면의 실체는 R이 이미 해치웠고,

별 탈 없는 아침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는데

증거는 남아 있었다.


“엄마! 나 목이 아파. 왜 그래?”

(엄마인 내가 아프게 한 것도 아닌데, 아이는 항상 어디가 아프면 나한테 왜 그러냐고 묻는 버릇이 있다.)


잠에서 부스스 깬 샛별은

간밤에 일어난 일을 모르고 있었고,

목이 따갑고 아프다고만 했다.


그럴 일이 좀 있었는데

사실 엄마도 아프다고 말을 해주니

엄마가 실수를 한 거냐고 제차 물었다.

꼭 안 물어도 될 상황에

그렇게 집요해지는 건 뭘까.


“그래, 엄마가 실수했어.”

“괜찮아. 그런데 목은 진짜 아프다!  에 헥헥 에에~”


엄마의 실수가 뭐 한두 번일까.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아들.

5살이 되려는 즈음,

어른도 때로 실수를 한다고 알려주니

그때부터 완벽한 부모는

아들의 머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 엄마인 나의 어떤 실수에도

괜찮다는 반응을 하며

오히려 토닥이는 아이.


그래, 사는 게 뭐 별건가.

너의 실수 나의 실수 서로 보듬으며 사는 거지.


그날 이후 R의 간은 다시 커지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깊은 잠을 자는 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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