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살고 못 살고는 나약함이 좌우하는 거야.....' 삶의 마지막 문이 육중한 몸체를 가린 채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온 몸의 기운이란 기운은 갑자기 불시에 다 빠져 나간 것 같은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위태위태하다. 아버지의 인생이 잘린 연의 꼬리처럼 유유히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다. 82살. 길거리에서 톨스토이가 죽은 나이다. 그는 아내와 말다툼을 하고 집을 나가 객사했다. 그에 비하면 아버지의 마지막은 호복이라 하겠다.
" 한 쪽 귀가 안 들려요. 투석을 하는데 파킨슨이 와서. 누구는 다리로 오고 누구는 손으로 오고 그러는데 우리는 다리로 와서. 통풍 관절 수술도 하고 10년 전엔......."
엄마는 할 말을 빨리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설명이 바쁘다. 다리를 들어 보라는 공단 사람들 요구에 겨우 드는 시늉을 하는 아버지를 연신 불안하게 곁눈질을 하며 끼어드는 중이다. 우스운 꼴로 바보가 되는 걸 참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동안 요양등급 신청을 미루며 버텼다. 그런 아버지 의견을 존중하는 것만이 엄마가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돌잡이 걸음마를 하듯 비틀대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의지하고도 로봇같은 다리가 제어가 안 될 땐 뭔가를 잡아야 멈췄는데 이제 그나마도 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바보가 따로 없었다.
처음 투석을 시작하고 병원 생활이 익숙해 질 즈음 병원을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던 엄마, 아버지는 그들을 두고 아주 재미있는 코미디를 보는 듯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여긴 바보들만 모아놓은 곳이라고. 그 뜻을 이제 알 것도 같다. 책을 써도 몇 권은 쓸 인생들을 살았는데 새삼 그 인생의 체면을 다 깎아먹는 처지가 된 당신들의 자존심을 애써 감추려는 허세. 세월의 무색을 에둘러 표현하는 하이개그. 어떤 인생을 살든 나약한 인간은 스스로를 처참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었던 내가 틀렸다. 웃프다. 누구나 한 번뿐인 첫사랑같은 인생들이다. 그리고 누구나 책 한 권은 쓰고도 남을 사연들을 품고 산다.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 일어날 기적을 바라며 첫사랑 인생의 페이지를 넘기며 살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나의 몸은 빠르게 달리고있다. 젊지도 늙지도 않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늙어가고 있는 나이임엔 분명하다. 휘말리기만 했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와 평온해진 찰나고 지나온 시간을 다 바쳐 얻은 지금이다. 그런데 종종 아니 자주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 부모님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알지도 못하는 낯선 기억들이 당황스럽다. 어느 한 켠 한 켠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과거들이 숨은그림 찾기처럼 내가 되기도 하고 엄마, 아버지가 되기도 하며 불쑥불쑥 나타난다. 지금의 내 나이 혹은 그보다 더 젊은 처음부터 부모였던 내 엄마, 아버지가!
라일락 꽃말은 첫사랑이다. 처음 사랑이 첫사랑이라면 우리 인생은 항상 첫사랑 진행형이다. 누구나 처음 사는 인생 순간 순간 페이지를 넘기며 살고 있으니까. 몇 페이지 쯤에 와 있는 걸까. 완성하게 될 책에는 어떤 내용이 담길까. 오래 오래 쓰고 있는 인생책 위에 향기로운 라일락꽃을 살포시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