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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경 Mar 16. 2024

상실

상실이 고독을 부를 때


 



엄마의 자궁이 사라지면서부터 어쩌면 인간에게는 커다란 트라우마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을 안전한 세상에서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떠밀려 탯줄이 잘렸으므로. 순간 두려움에 벌벌 떨었을 아기는 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게 울음으로 존재를 확인받고 나면 더 많이 울면서 존재의 가치를 만들어 간다. 살면서 무언가 생겼다 사라지는 일들은 아주 많다. 물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좋아하던 취미나 행복했던 관계까지도 어느새 없어지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들, 심지어 신체의 일부분이 사라지기도 하고 끝내는 몸뚱이마저 싹 다 없어질 주인공 시점에서 보면 영원한 건 하나도 없다. 그래도 내 몸이 마지막 임을 알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으면 바라는 것이 있다. 바로 기억력이다. 치매가 오지 않기를, 나를 내가 잃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녀를 만난 뒤부터는 더욱더.


그녀는 요양원에서 만났다. 양가 부모님을 내 손으로 보내드리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후 도움이 될까 싶어 요양보호사 공부를 시작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실습이 필수였고  실습 방법은 두 가지였다. 둘 다 해야 하는데 하나는 요양 시설에 매일 일정 기간 출근해 일하는 방법과 또 하나는 남자 사회복지사 한 분과 실습생 두 명이 가정집을 방문해 일을 한다. 요양 시설은 대부분 사회복지사 분과 수간호사, 그리고 일을 하는 요양사분들이 여럿 계시고 실습도 여러 명이 함께 움직인다. 그런데 가정집은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 꼭 남자 사회복지사분이 먼저 들어가 확인을 한 후에 출입을 시켰다. 특히 남자분이 돌봄을 받아야 하는 경우나 가족 중 남자분이 계실 때는 더 철저하게 상태를 체크했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매번 느끼지만 같은 하늘 아래 참 다양한 세상에 적을 두고 산다는 생각이 실습 내내 수없이 많은 생각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나와 나이가 같았다. 18년 전이니 요양 시설에 있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고 그동안은 연세 드신 분들만 입소하는 줄 알았기에 나 역시 쇼크가 컸다. 늙어서 수족을 못 쓰거나 치매로 일상이 어려운 분들만 입소하는 것이 아니라니 이는 곧 나도 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같은 사실은 노력만으로 안 되는 숙명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처음 그녀의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순번이 왔을 때 다른 분들께 들은 소리가 있어 걱정이었다. 소뇌가 쪼그라드는 병으로 몸의 균형과 운동조절이 전혀 되지 않아 기저귀를 갈기 여간 힘든 게 아닌데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은 바였다. 이처럼 돌봄의 손길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쩔쩔매게 만드는 분들은 거의 정신이 온전한 분들이다. 당연하다. 차마 수치심마저 버릴 수 없는 그분들은 가누지 못하는 몸으로 오롯이 멀쩡한 정신과 싸워야만 한다. 감히 말하지만 직접 겪지 않는 한 어찌 그 인생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때 알았다. 누군가의 인생을 이해한다는 건 자만이다. 그래도 기저귀는 갈아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도와주면 훨씬 빨리 끝날 텐데 싶어 나는 진심을 담아 부탁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허리를 최대한 숙여 몸을 가까이하고 손으로는 그녀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귀에 닿을 둣 입술을 대 속삭였다. 나의 진심이 몸과 몸처럼 닿기를 바라며.


"제가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래야 오래 걸리지 않아요. 도와주실 수 있죠?"


그녀가 최선을 다해 나를 돕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외로움이 느껴져 순간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애를 먹었다. 덕분에 손쉽게 기저귀를 갈았고 점심시간이 끝나자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그녀가 왠지 마음에 걸려 침대로 가 의자를 붙이고 앉았다. 이런 말 저런 말 주고받으며 나이를 듣고 동갑이라고 하자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자신을 위해 살라고. 소를 80마리나 키우면서 애 낳고 밥하고 자신은 죽어라 일만 했단다. 그래서 식구들 먹고 살 만하게 만들어 놨더니 병이 들었고 자신을 여기다 버리고 찾아오지도 않는다며 울었다. 말을 하기도 힘든 그녀는 이렇게 힘들게 이런 일도 하지 말고 자신만을 위해 살라 했고 우리는 엉엉 울었다. 하지만 곧 나는 복지사 선생님께 불려 나가 엄청 혼이 났다. 이해한다. 시설에 계신 분들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대다수다. 우울증이 있는 분들도 많고 저마다 사연이 한 보따린데 실습이나 봉사 오는 사람들이 한 번씩 흔들고 가면 어떻겠는가.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시간들을 누워서 멀쩡한 정신으로 버티던 그분의 상실감이 느껴져 들어주고 싶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인간에게 가장 큰 난제는 상실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고독을 이길 방법은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알아야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상실이 고독을 부를 때 이겨내지 못하면 자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녀를 통해 나는 열심히 살고자 애썼던 세상이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갑자기 내가 사라진다면 상실은 더 이상 상실이 아니게 된다. 가족을 원망하던 그녀에게도 기억은 남아있었고 무엇보다 스스로 자신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런 말도 할 수 있었으리라. 


" 그래도 내 덕분에 다들 잘 살고 있을 테니 나도 잘 살 거예요." 


상실이 고독을 부를 때마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삶을 켜켜이 쌓아 올리려 애쓴다. 나를 더 먼저 상실하지 않기 위해.

물감을 두껍게 바르고 송곳으로 힘껏 깊게 긁어낸다. 조금 전까지도 안 보이던 진한 색이 금방 모습을 드러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다. 두껍게 덧바른 물감처럼 나를 수많은 나로 덮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실감이 나를 힘껏 찔러도 저 밑바닥 맨살에 가닿지 않도록 말이다.  새로운 색이 계속해서 덮이는 동안 물감들은 견고하게 굳는다. 그러면 아무리 있는 힘껏 찔러도 더 이상 맨 판넬에까지 뚫고 들어가지 않는 시점이 온다. 그렇게 살아보고자 한다.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면서 나를 차곡차곡 쌓는다. 상실이 고독을 부를 때마다 그리 쌓아 올리다 보면 그 어떤 것도 나를 뚫고 지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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