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소멸하고 탄생하는 이들의 시작
하얀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시작할 때는 이미 충분한 의도가 있다. 종이 크기를 결정하려면 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미리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항상 그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실수는 확실히 줄어든다. 실력은 경험치에 비례하고 실제 해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그동안 수없이 버려진 그림들이 없었다면 지금 그림은 있을 수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실패라고 여겼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새로운 탄생을 위한 소멸이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는 반복이 강한 나를 만든다. 새로운 나는 완전한 소멸로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완벽하게 모든 걸 새로 시작한다.
작업실 한 귀퉁이에 기둥처럼 서있는 160cm 길이 종이 박스를 꺼냈다. 요즘은 수채화만 그리고 있어서 아예 300g 대용량 아르쉬지 수채화 롤을 사두었다. 크고 무겁고, 두꺼운 종이가 박스 안에 둥글게 말려있다. 그 큰 두루마리를 푼다. 커다란 롤을 펼쳐 모서리에 무거운 것을 올린다. 종이가 다시 똘똘 말리지 않게 힘껏 잡고 똑바로 자른다. 종이는 물을 흠뻑 먹자 힘이 빠지고 축 늘어져 노골노골해졌다. 두세 번 반복해 적당히 촉촉해진 종이를 들어 나무 판넬 위에 올리고 네 면을 골고루 잡아당긴다. 종이 결이 울지 않게 하려면 종이를 판넬 테두리에 붙일 때 힘 조절을 균일하게 줘야 한다. 한 쪽으로 힘이 쏠리면 종이가 삐뚤어지고 심하게 운다. 종이가 우는 건 종이 잘못이 아니다. 힘 조절을 못한 내 잘못이다. 하루가 지나 종이를 확인하고 하얀 캔버스를 마주한다.
만약 그림처럼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내 세상의 크기는 얼마만할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가. 그림처럼 시작은 항상 할 수 있었다. 스스로 끝을 내지 못했을 뿐이다. 사람 마음도 종이를 붙이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감정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면 자신을 다스리기가 힘들어 진다. 인생이 힘든 게 아니라 감정을 어쩌지 못해 힘든 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똑같은 걸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한다. 과거 자신을 들여다 보면 감정에 매몰되어 어떤 것 하나도 못보게 온 세상을 차단하고 사는 내가 보인다. 인생이 잘못됐다 생각했지만 태도가 문제였다. 한껏 부드러워진 지금에서야 알겠다. 잘못 붙여 우는 종이에 그대로 그림을 그리면 언젠가 그 그림은 다시 뜯어내야만 한다. 처음부터 시작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림을 뜯어내고 다시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실패한 그림이라고 하진 않는다. 끊임없이 소멸하고 탄생하는 경험치의 결과가 인생이고 보면 실패는 또다른 시작일 뿐 인생 자체가 문제가 될 순 없다.
내가 내가 되는 것. 고독으로 나에게 도달하여 진짜 자기 삶을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 또 있을까. 모란꽃은 그리 살라 선물하는 꽃이다. 엄마가 결혼하는 자식의 이불에 수를 놓아주는 꽃. 아무리 힘들어도 그 이불 속에 다리를 뻗고 몸을 누이면 포근함이 전해온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모란꽃은 그 자체로 행복을 선사하기 때문에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응원이 가득하다. 축하하는 자리에, 시작하는 자리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모란 꽃잎을 하나 하나 그리는 붓질에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 있다.
끊임없이 소멸하고 탄생하는 이들에게 이 꽃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