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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이 불어오는 곳 Sep 29. 2020

나는 육아휴직을 독일에서 보냈다 2

Chapter 2.  2년의 육아휴직을 받다

힘들었던 회사일은 1년여 지나면서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갔다.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겪으며 나는 과연 내게 무엇이 소중한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언제나 가족이었다. 나는 회사의 관리자급 직원이었지만, 회사 조직을 위해 가족의 어려움을 그냥 묵과할 수는 없었다. 회사의 조직을 운운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회사에서 퇴사하고 일반인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데 나를 비롯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마치 회사가 평생을 책임져 줄 것 같이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1년간의 모진 세월은 내게 인생의 본질을 일깨워 준 시간이었다.

또 독일에 있던 아내는 유별나게 나를 좋아하던 두 아들이 내가 없음으로 인해,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느라 불안한 정서를 보인다고 이야기 했다. 아! 이제 나는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에 놓인 것이다.

회사 상사에게 육아휴직을 달라고 조심스레 요청을 했다. 나도 직장생활을 20년 넘게 하면서 40대 중후반의 나이에 나 자신이 육아휴직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른 젊은 직원들, 대부분 여직원들이 육아휴직을 하곤 했는데, 50세를 향해 가는 나이에 남자직원이 육아휴직으로 쓴다는 것은 사실 상 회사를 그만 둔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 결국 사표를 내겠다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여러 직원들의 중재로 인해 우여곡절 끝에 일단 만8세였던 둘째 아들을 대상으로 3개월의 육아휴직을 받고 독일로 향했다. 회사일로 인해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육아휴직이나 독일 생활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생각도 없이 그냥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7년 12월 1일. 매서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독일의 뮌헨 공항에 내렸다. 비행기의 통로 사이로 들어오는 얇은 바람에서도 느껴지는 매서움과 어두움이 나의 마음을 더욱 음침하게 만들었다.

이민을 해야 할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막막함을 안고 오게 된 독일. 이 곳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생전 처음으로 장기간 외국에 체류해야만 한다는 것이 두려움으로 엄습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아내를 몇 개월 만에 만났다. 잘 지냈냐는 대화를 시작으로 그간의 삶을 나누었다. 낯선 풍경. 어렵게만 느껴졌던 외국인들이 주변에 너무도 많았다. 이제는 내가 외국인이 된 것이다. 아내가 딜러에게 구입한 중고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독일 집에는 아내를 위해 9월에 막내딸과 같이 들어오신 장모님과 아이 3명 있었다. 무비자 체류가 가능한 3개월간 장모님이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계셨다.

 처음 독일에 갈 때는 3개월 육아휴직을 받고 갔었다. 18년 2월에는 그 3개월이 모두 지나가기에 한국으로 귀국해야 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명확하게 회사에 밝혀야 했다. 처음에 1년 육아휴직을 요구했을 때 결재권자는 극심히 반대했다. 첫 3개월을 겪으며 밤에는 매일 꿈을 꾸었다. 매일이라는 표현이 거짓 같지만 진짜였다. 매일 밤 꿈속에서 회사와 관련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한없이 반복했다. 회사를 그만 두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고 내 가족은 어떻게 지내야 하나,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등 매일 계속되는 고민과 번뇌 속에 가끔 찍는 사진 속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은 썩어 들어갔다. 그렇게 고민 속의 3개월이 지나고 나는 친한 상사에게 사표를 내겠다고 메일을 보냈다. 그 분은 ‘그래 그렇게 결정할 줄 알았어’하며 내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다. 사실 나는 사표를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조직을 우선시하는 회사문화에서 관리자급이 육아휴직을 낸다는 것은 다른 직원들에게 좋게 보이지 않을 뿐더러 남자가 육아휴직을 내는 사례도 없었다. 그런데 2월 말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연초 조직개편으로 인해 나의 직속 결재권자가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속한 부서의 팀장님은 나의 성실함을 좋게 평가해 주던 분이었다. 팀장님은 내가 입국한 날 바로 본사로 오라고 얘기하셨고 비행기에서 내려 나는 본사로 들어갔다. 팀장님은 내게 물으셨다. ‘진짜 원하는 게 뭐지?’ 나는 육아휴직 1년을 이야기 하려다가 ‘육아휴직 2년을 주십시오. 다만 팀장님이 곤란하시면 그냥 사직처리 해주셔도 좋습니다’라고 이야기 했다. 팀장님은 ‘알았다. 육아휴직 2년으로 결제 받겠다.’고 흔쾌히 허락하셨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쪽팔린 건 한 순간이다. 가족을 생각해서 끝까지 버텨라’라고.

그렇게 나는 2년 육아휴직을 받고 추가 수술 차 한국에 먼저 와 있던 막내딸과 함께 독일로 돌아왔다. 지나면서 생각하니 퇴직과 육아휴직은 심리적으로 매우 달랐다. 비록 육아휴직 후에 과연 직장에 돌아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걱정이 되긴 했지만, 사직하고 왔으면 체면을 많이 생각하는 한국인의 정서상 내가 독일에 잘 적응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육아휴직 기간은 내게 있어서 행운과 같은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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