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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 Oct 14. 2022

세상을 떠났다고 불쌍히 여기지만은 않는다

이건 찐이다 좋아서 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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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의 결혼에 근 천만원을 보탰으니 나도 누나로서 해줄 만큼 했다고 본다. 사실 이중에 상당 부분은 엄마의 환갑 맞이 적금이었다. 나는 이 돈으로 온 가족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성사만 됐다면 여덟 살 때 이후 26년 만의 가족 해외여행이 되는 셈이었다. 남동생을 포함한 식구들 모두가 여권을 갱신하고 여행사 계약금까지 지불한 다음날 엄마에게 띨름띨름 톡이 왔다.


"여행을 취소하고 그 돈을 엄마 이름으로 상화 결혼식에 보태면 좋겠어."


나는 톡을 받자마자 오만 성질을 내며 펄펄 뛰었다. 그랬더니 엄마 이름 말고 내 이름으로 주란다. 이 여사님이 사태의 본질을 깨닫질 못하시네! 아빠에게 같은 생각이냐 물었지만 우물쭈물 한다. 아니 이 아버님은 갑자기 왜이래?! 나는 이를 갈며 여행을 취소했다.


여행과 관련해서는 쉽사리 삐진 것이 풀리지 않았지만, 남동생이 결혼 후 엄마 아빠에게 제주도 효도 여행을 보내드리면서 나도 그에 맞춰 금일봉을 다시 하사하는 것으로 물적 심정적 타협을 보았다. 엄마가 제주도에서 아빠와 함께 짧은 3일을 알차게 보내는 사진을 구경하며, 나는 엄마가 동생에게 안심하기 전까지는, 또 아빠의 흔쾌한 동의 없이는 절대로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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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약속이 있어 시내에 나갔다가 술을 마시고 취하면 늘 지하철을 놓쳤다. 또 길바닥에 앉아 조느라 전화를 받지도 않아 사람을 애태운다. 엄마는 운전석 창문이 다 망가져 올라가지도 않는 고물차를 달달 끌고 비가오는 날에도 차 안으로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아빠를 찾으러 나갔다. 양껏 투덜거리면서도 다 큰 아빠가 알아서 들어오라고 내버려 두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몇 년에 한 번 어쩌다 친구들과 만나는 날에도 꼭 아빠 저녁밥이 걱정되어 이른 파토를 내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빠가 알아서 라면이며 계란밥이며 해 먹으면 어때서 말이야. 답답해. 버릇을 완전히 잘못 들였어. 난 결혼해도 남편한테 저리 묶이지 말아야지. 자식에게도 묶이지 말아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십 수년 전 어느 늦가을, 술취해 연락이 닿지 않는 아빠를 데리러 한걱정 싸매고 나갔던 엄마가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들어왔다. 내가 아빠의 피쳐폰 벨소리로 설정해 둔 Kevin Kern 의 Le Jardin을 듣고 술집 뒷 골목에서 자고있는 아빠를 단번에 찾았다는 것이다.


"글쎄 아주 처~량하고 구~슬픈 멜로디가 저 깜깜한데서 띠리~ 띨리~ 띠리~ 하는거 아니겠어?"


엄마는 너무 재밌었다며 까르르 까르르 하고 웃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건 찐이다. 이건 좋아서 하는거다.



좋은거야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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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 중이었던 나는 유산을 하게 되었다. 엄마가 소식을 듣자마자 전화를 했다. 일주일 동안 와서 엄마 밥 좀 먹으면 좋겠는데...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미 엄마 대신 매일 미역국을 끓여주겠다는 보호자가 있었다. 엄마에게 기대 찡찡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엄마 그냥 쉬어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도 아이를 잃었지만 남편도 아이를 잃었다. 남편을 돌봐야 했다.


남편은 우리 집이 아니고서는 잠도 잘 못자고 화장실도 잘 가지 못한다. 나는 남편을 위해 엄마네서 당연시 자고 가는 일을 자제해왔다. 또 남편과 저녁을 먹기 위해 친구들과의 즉흥적인 약속도 피했다. 나는 엄마의 향기를 추억하기 위해 섬유유연제를 쓰고 싶지만 남편은 섬유유연제 사용을 반대한다. 남편의 동의가 없는 한 나는 결코 섬유유연제를 쓰지 않을 것이다. 내 모습에서 엄마가 금방 오버랩되었다.


"남편한테 쥐여사는 것 아니야?"


친한 친구들 몇몇이 내게 물을 때마다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남편에게 묶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쓰는 것이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지금 이순간 마음쓸 대상에 또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하고 엄마 또한 그렇게 살았던 거다.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쓴다는게 늘 알콩알콩 아름답게만 보여지는 건 아니다. 기념일 마다 챙기는 선물이라든지, 식사 때마다 휘황찬란하게 대접되는 요리처럼, 상대방을 위해 해줄 일을 특별히 덧붙여 하는 이벤트는 오히려 덜 가까운 사이에서 주로 일어난다. 결혼을 하고 나서 나는 배우자와 사소한 공동 생활을 맞춰 나가는 것, 식사 때 함께 있는 것이나 저녁 산책을 할 때 그 옆에서 걷는 것, 밤 12시가 넘으면 안전한 집에서 함께 티비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모든 걸 다 맞춰 나가겠다고 마음먹어도 완전히 알 수 없는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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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잠을 잤다. 의식이 깨어있어도 눈을 감고 있었다.


"누가 제일 보고 싶어?"

"남편."

"어디 가고 싶어? 어디 갈까?"

"제주도."


아빠는 엄마의 의식이 깨어있는 하루 한 시간 남짓 동안 꼭 누가 보고 싶은지, 어딜 가고 싶은지 물었다. 엄마의 대답은 한결같이 아빠와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엄마가 아빠와 함께 가장 최근에 갔던 여행지이니, 아빠는 엄마의 대답 처음과 끝을 모두 아빠 자신으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보니 그랬다. 엄마에게 세상 재미있는 하루는 다 아빠로부터 나왔다. 엄마에게는 아빠가 스쿼트를 하는 것, 목공일을 하는 것, 전구를 가는 것, 며느리의 애교에 당황하는 것 일거수 일투족이 신기하고 웃기는 일이었다. 또 엄마는 아빠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그래서 실컷 흉을 보고 비난하다가, 또 다시금 기대를 걸고는 했다. 엄마가 내게 아빠를 강하게 비난 할때면 나는 종종 이혼하라고 까지 말했다. 나는 진심이었지만 정작 엄마의 진심을 정확하게 알고 말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엄마도 아빠를 100% 다 파악하지 못했다.


"느네 아빠는 가족에게 장애가 있으면 절대 돌보지 않을걸. 그런 상황 자체를 엄청 지긋지긋해 해."


엄마가 평소에 인간극장 같은걸 보며 내게 몰래 몇 번이나 해왔던 이 말은 보기좋게 틀렸다. 아빠는 걷지 못하는 엄마에게 성심성의를 넘어 헌신을 다 하는 간병인으로 온 병동에 소문이 났다. 아빠는 장애인의 가족으로 평생을 살기위한 만반의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아빠를 40년 동안 졸졸 쫓아다닌 엄마도 아빠에 대해 다 몰랐다. 하물며 내가 엄마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있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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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이라면 누구나 세상을 먼저 떠난 가족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축복하며 강인하고 평화롭게 마무리 했기를 바랄 것이다. 의식을 잃어 떠날 준비를 하는 이는 말이 없으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엄마가 마지막을 보낼 처치실은 한 명의 보호자 출입만 허락되었고, 최후의 순간까지 내내 아빠가 곁에 있었다. 엄마는 패혈성 쇼크가 온 후 지속적으로 노란 토사물을 뱉었다. 석션도 별 소용이 없었다. 계속해서 토를 하던 엄마는 아빠 옆에서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지겹다."


아빠는 엄마가 죽고난 후 수많은 에피소드를 반복해 이야기 하지만, 엄마가 지겹다라고 말 한 것에 대해서는 단 한 번 이후 다시는 입밖에 꺼내지 않는다. 병은 아름답지 않다. 병은 사람을 넉다운 시키고 진절머리 나게 한다. 인생은 달고 병만 그토록 쓴가? 그렇지 않다. 인생이 병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살아가면서 절대 금기이다. 아무도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다.

 

엄마가 죽고나서 나는 한동안 병과 늙음, 욕망과 어리석음에 묶이고 끄달리는 삶이 너무나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유족이 겪게되는 일종의 우울증 같은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슬픔 보다는 지루하다는 생각이 진절머리나게 밀려왔다. 엄마의 마지막 지겨움이 내게 옮겨온 느낌이었다. 


내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써왔던 방법 그대로, 나는 엄마를 철저하게 공부하는 방식으로 애도 기간을 이어가기로 했다. 자신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공간, 돈, 좌절, 아빠, 남동생, 병... 처럼 엄마가 끌어안고 놔주지 않던 주제들을 글로 하나씩 풀어놓아 본다. 나는 머지않아 지긋지긋함과 끄달림을 빼고는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소재가 많지 않다는걸 금방 깨닫게 되었다. 끄달린다는 것 자체가 사람이 살아간다는 증거구나, 그 지겨운 끄달림이란 그저 마음씀일 뿐이고, 그 마음씀이 생을 붙잡는구나, 그러한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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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온 방의 형광등을 하나씩 끄며 밤을 준비하듯 몸도 마음도 비워내갔다. 다리를 쓸 수 없게 되면서 더이상 공간에 신경쓰지 않았고, 뇌를 다쳐 의식을 잃어가며 평생 시달리던 불면증을 다 뽀개버리겠다는 듯이 잠을 잤다. 어찌저찌 걱정했던 것 보다 청소도 훨씬 잘 되고 있는 것 같고, 헌신적인 아빠의 간병을 지켜보면서 아빠를 꼭 어린애처럼 보살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된 것일까?


"엄마는 늘 하고픈 대로 살았어~ 아주 자유~롭게."


퇴원하면 엄마 하고싶은 대로 살라고 말하는 내게 엄마가 했던 답이다.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가운데에서도 엄마는 자유를 말했다. 엄마는 말을 아예 안하면 안했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허투루 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엄마는 지긋지긋하게 끄달리는 삶이 엄마의 선택이었다는 걸 안다. 끄달리는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결코 감옥에 갇혀 있었다거나 잘못 산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난 깨끗하게 날아가버린 엄마를, 엄마의 마음쓰던 인생을, 그저 돌아갔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불쌍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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