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가루 아닌가? 제목을 쓰는 중에도 남들의 시선이 마음에 걸려 잠시 망설여본다. 그렇지만 엄마를 이야기 하는데 이걸 뺄 수는 없으니 용기를 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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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나와 엄마는 서로에게 담밍아웃을 했다. 그날 엄마는 집에 들어오지 않고 찜질방에서 새벽을 지낼 계획이었다. 인생에서 큰 위기를 맞아 코너에 몰려있었던 엄마는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며칠이나 찜질방에서 버티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돈과 씻을거리, 담배 한갑을 챙겨 찜질방으로 쫄래쫄래 엄마를 찾아갔다.
"엄마 담배 피워. 한 대 피고 올께."
"응. 나도 펴."
"엥? 진짜?"
서로 다른 관점의 뭐 어때 덕분에 엄마와 나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흡연실로 함께 향했다. 그 후로도 맞담배는 두 번 정도 더 있었지만, 이런 만남이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엄마가 담배를 핀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세탁기가 있었던 비좁은 베란다, 거기서 보이는 주황빛 노을이 지는 풍경, 그리고 가족들 몰래피는 담배 한대의 하얗고 매캐한 연기가 삶에 주저앉은 엄마를 간신히 위로했던 작고 소박한 것들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엄마의 이런 고독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나대로 나만의 어둠에 집어삼켜지기 일보직전이었다는 핑계를 대보기도 하지만, 엄마가 워낙 강한 사람이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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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실재보다는 상징에 집착하는 시절이 있다. 엄마는 어린시절 찢어지는 가난을 증오했고,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보수 정권도, 혼탁한 세상도 미워했다. 엄마가 보기엔 아들 자子 가 붙은 엄마의 이름에서부터 이 모든 카르마가 시작된 것만 같다.
"여자도 담배핀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작했어."
마초같고 덩치 큰 남자가 예쁜 엄마에게 청혼을 하며 따라다녔지만 엄마는 듬직한 남자에게 의지하면서 살 생각이 없었다. 엄마는 곧 흰 피부에 여린 몸을 하고 눈도 큼지막한 예쁜 아빠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빠는 거친 학생운동에 몸으로 동참하지 않고 연극, 철학, 음악에 푹 빠져 실존에 대한 물음을 찾아가는데 골몰하는 미청년이었다. 엄마가 커다란 나무라면 아빠는 나뭇가지에 비밀스럽게 걸고 싶은 보석이었다.
엄마는 젊은 시절, 스스로의 강단과 힘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시도했다. 엄마는 2주에 한 번 집안의 가구 배치를 바꾸고 키보다 더 큰 벤자민을 길렀다. 학생을 가르치고, 요리를 하고, 지점토 공예를 했다. 오페라 무대를 위한 분장을 하고, 방송과 촬영을 배웠다. 그걸로 성에 안차 투자를 하고, 장사를 벌렸고, 세일즈를 했다. 그리고 모든게 처절하게 끝났다. 엄마는 세상의 작은 부조리도 견디지 못했고 이익을 따지는 일을 컨트롤 하기 어려워했다. 거듭되는 경제적 실패 후 엄마는 죽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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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를 엄마 어릴적과는 다른 딸래미로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무한한 엄마의 믿음과 지지가 나를 단단히 만들어 나갔다. 그렇지만 엄마의 근원적 상처는 별다른 실수나 사건이 없이도 이상하리만치 비슷한 모습으로 딸에게 대물림된다. 그게 소위 말하는 가족의 카르마인가 싶다.
나는 여자라고 차별을 받으며 자라지 않았다. 가난하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자란 90년대의 알파걸이다. 다만 어떤 분야든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남들에게 빠르게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짓눌렀다. 나는 모든 걸 다 손대봤지만 제대로 할 줄 아는게 단 하나도 없었다. 어린시절에 반드시 꽃피워야만 하는 영재성...과 같은 천편일률적인 성공을 바라던 나는 내면 깊은 곳에서 무능함이라는 혹독한 자기평가를 마주했다. 길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담배로 향했다. 일탈도 잘 할 줄 몰랐으므로 나 일탈한다 같은 상징이 필요했다.
나는 스스로의 무능함을 비관하는 만큼이나 인생 한방의 치트키를 꿈꿨다. 나는 늘 엉터리 피아노 타건을 하면서도 아름다운 음악이 저절로 연주되는 꿈을 꿨다. 또, 무능한 타인들을, 무능한데 말이 많은 타인들을, 무능한데 많이 가진 사람들을 몹시 싫어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속도로 일하고, 쉬는 시간에는 담배를 피고, 밤에는 홀로 술을 마셨다. 병이 왔다.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어느 날 내게도 엄마와 꼭같이 위기의 밤이 찾아왔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제발로 병원에 찾아가 입원한 나는 우울증을 치료하며 단번에 담배를 끊었다. 내 나이 스물 여덟이었다. 담배를 피고 술에 절고 삶을 내려놓을 핑계는 그만 찾을 나이다. 담배가 카르마의 되물림이라는 하나의 상징이라면 나는 그 고리를 끊어냈다. 반면 엄마는 조금 줄이기는 했겠으나 담배를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엄마와 나의 후반부 스토리는 달라질 것이었다.
"피려면 당당하게 말하고 폈어야 한다고 본다."
아빠가 한참이나 나이들어 뒤늦게 엄마의 흡연을 눈치채고 속이 상해 내게 말했다. 온 세상에 당당하게 내보여도 아빠한테 만큼은 보여줄 수 없는게 있지 뭐야.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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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이 걔는 나를 이해할거야. 엄마가 아빠에게 했던 말이다. 찜질방에서, 땅거미가 내려앉은 놀이터에서 함께 담배를 태우던 날, 엄마는 나와의 교감을 굳게 신뢰했다. 엄마가 실망하겠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엄마의 좌절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나는 그때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따름이다. 아빠도 있고 나도 있고 동생도 있잖아. 내가 돈도 벌고 이제 여유를 가져도 되잖아. 과거는 다 가버렸잖아. 나라면 이렇게 저렇게 했을텐데. 나는 내 기준의 생각들을 평생 한 번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엄마 쪽이라고 대단히 무슨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것도 아니었다. 엄마와 나는 그냥 함께 밤을 지새며 서로가 고독하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이따금 추억이 엄마를 그처럼 위로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었다. 삶의 회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바보같은 재능만땅 여사님을 나는 머리로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저가슴으로 받아들였다. 나 말고는 본인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거라고 했는데 그런 나 또한 엄마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으니, 그럼 엄마는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누군가에게 이해받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도 나 스스로를 논리정연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하물며 엄마라는 타자의 영혼 겹겹이 깊고 오랜 역사를 나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렇지만 본인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정말이지 중요하다. 나를 받아들이는 게 내 몫이듯, 엄마를 받아들이는 것은 엄마의 과제였다. 남들의 인정은 먹히지 않는다.
그래도 막상 엄마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순간이 되니 평소에 그 말을 해주지 못한 것에 깊은 후회가 되었다. 오히려 사랑한다는 말은 몇 번 해봤는데 말이다.
"우리 엄마 다 잘했다. 우리 엄마가 최고다. 다 잘했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엄마 귀에다 대고 계속해서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엄마는 스스로가 바닥이라고 생각한 후에도 그림을 그리고 가구 배치를 바꾸고 요리를 하고 꽃을 가꾸었다. 깻잎과 토마토와 포도와 호박을 기르고, 패브릭을 예쁘게 꿰매어 커튼으로 만들거나 전등 갓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는 병에 걸려 스스로 앉아 일어날 수도 없게 된 제약된 몸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딱 하루를 펑펑 울더니 그 다음날 부터 아령을 들고 씩씩하게 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지. 그게 엄마의 힘이지. 계속해서 내일로 나아가고자 한 커다란 나무의 힘. 우리 인생에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일까? 무엇을 더 증명하고 무엇을 더 이해받을까? 병마와의 싸움에서 승리란 무엇일까? 병을 보란듯이 이겨내는 것? 병이 나를 집어삼키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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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병을 대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깊은 무능함을 마주했다. 세계 최고라는 우리나라 의료진들과 시스템의 무능함도 매일 같이 목도했다. 그러나 더이상 담배를 피우거나 누군가를 미워할 필요는 없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미지나 상징이 아니라 그게 뭐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거였다. 엄마에게서 배운 것이다.
"엄마는 인생공부를 하고 싶었어."
병원에 누워 이미 환상의 세계를 날고 있던 있던 엄마가 눈을 감은 채 내게 말했다.
"무슨 인생공부 했어? 그래서 하고 싶은 공부가 다 됐어?"
엄마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뽀얀 이마에 뽀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