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는 엄마 아빠한테 생활비를 주니까 힘을 쥐고 부리게 되잖아 라고 언젠가 동생이 말했다. 아마 형제 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추억으로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그럭저럭한 다툼 중이었을거다. 힘을 쥐고 부리다니 이눔시키야. 엄마 아빠가 생활비 걱정 없게 하는 걸 틀림없는 효도의 일부로 생각해왔던 내게는 몹시 섭섭할 소리다.
"안 찾아와도 되니까 돈만 보내라."
아빠는 결혼한 직후에 내게 농담을 하며 낄낄 웃었다. 나는 그 농담과 아빠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좋았다. 초등학생 때는 월 500만원씩 용돈을 주겠다고 엄마에게 약속했다. 엄마는 진짜 줄거야? 하면서 패식 웃고 넘겼지만 말도 안된다든지, 니가 잘도 그러겠다 라든지 하는 식으로 내 기를 죽이지 않았다.
살다보니 약속을 지킬 기회가 찾아왔다. 좋은 계기는 아니다. 집안 사정이 몹시 나빠진 20대 초반부터 나는 가장家長라인에 서서 돈을 벌었다. 비록 월 500은 못되었고 1,800만원을 14분의 1로 쪼갠 작은 금액부터 시작했지만, 이나마 대부분의 벌이를 생활비로 송금하면서부터 엄마 아빠 모두 내게 많이 의지하기 시작한 건 맞다. 내 의견은 언제나 힘이 있었다. 합리성이나 논리, 똑부러짐, 보탬이 되는 생활비, 독립적인 성정은 어려운 시절 식구들에게 든든한 뒷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어찌나 공평하신지, 내게 소소하고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애교까지 주시진 않았다. 나는 좀 딱딱대는 딸이었다.
그래도 돈으로 쥐고 흔들었다는 말은 너무하다. 생활비를 책임지지 않았던 어린시절에도 할 말은 다 하며 지냈으니 애초에 좀 성깔이 있다는게 맞을 것이다. 그 성질이 어디서 왔겠나. 사춘기 시절엔 역시 성질하면 지지 않았던 젊은 아빠와는 살얼음 판이었고, 도통 나와 갈등이 없었던 엄마도 언젠가 내게 슬며시 고백 했다.
"그땐 니가 나를 가르치려드는데 정말 자존심 상하더라구."
가르치려 든다는 표현도 낯설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내 관심을 끈 것은 자존심이라는 단어였다. 엄마에게서 그 단어가 나왔을 때, 나는 엄마와 아빠도 내가 잘 모르는 타자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역사와 꿈과 약점과 방어기제를 가진 완성되고 닫힌 개인, 제 3의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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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물 여덟이 된 어느 날, 아빠는 내게 차년도 가족경제 계획을 소상히 밝히느라 집중하고 있었다. 대출을 어떻게 갚고, 전세를 어떻게 구하고 하는 아빠의 이야기를 조용조용 듣던 나는 아빠 근데 나 내년에 결혼할거야 하고 계획보다 이른 통보를 하고 말았다. 아빠는 구체적으로 짜놓은 계획을 곧 추진할 태세였는데, 나는 나대로 해야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너는 왜 갈비탕을 먹다 말고 아빠한테 충격을 주고 그러냐."
아빠는 진심으로 갈비탕을 먹던 중 충격을 받았고 이후 2주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결혼은 커녕 남자가 있는지도 몰랐으니 그저 마음이 상한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결혼비용을 홀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귀띔을 해주고 나서 나는 얼른 모아놓은 결혼 자금을 엄마 아빠에게 밝혔다. 결혼이 불가능하지 않다는게 확인되자 아빠의 마음이 녹아내리는게 보였다. 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내 인생을 누구의 상의없이도 마음대로 결정하는 자유ㅡ자유라고 생각했다ㅡ가 있었고, 위기의 순간을 독립적으로 헤쳐나갈 때마다 엄마 아빠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살림 혼수는 엄마가 해줄께."
내 결혼을 앞두고 카드를 챙겨 나온 엄마는 간만에 신이 났다. 오랫동안 어렵게 지내 제대로 된 쇼핑을 하지 못한 엄마에게는 큰 이벤트였다. 나는 엄마와 함께 카트를 끌고 마트를 돌며 집안을 채울 것들을 하나 하나 집어 골랐다. 새신부의 로망인 하얀 그릇들, 심플한 욕실 용품들, 열 두평 집이 금세 꽉찰 조밀조밀한 물건들과 함께 엄마의 세세한 조언도 뒤따랐다.
"욕실은 플라스틱이 최고야. 스테인리스는 지저분해져. 그렇지만 한번쯤 써보고 싶을 테니까 그냥 사봐."
나는 스테인리스 칫솔 꽂이를 골랐고 이게 정말로 얼마나 지저분해지는지 똑똑히 봤다. 그리고ㅡ지금도 쓰고있는ㅡ이 칫솔 꽂이를 닦을 때마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엄마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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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생활은 누구보다 행복했고 여전히 엄마 아빠의 뒷배가 되는 든든한 딸이었지만, 나는 삭막한 직장과 거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오래도록 조울증 약을 복용해야 하는 헛똑똑이였다. 정신과에 입원한 것도, 직장도 결혼도 내 맘대로 결정했으니 내 선택에 엄마 아빠의 책임은 없었지만, 나는 떼를 쓰고 싶은 어느 날 술에 잔뜩 절어 신혼집이 아닌 엄마네 집으로 직진했다.
집에 들어서자 마자 술냄새를 퐁퐁 풍기며 엄마의 무릎에 엎드려 서럽게 우는 내게, 엄마는 얘가 왜이렇게 울어 엄마도 눈물나게 하고 중얼거렸다. 자초지종도 없이 엄마 앞에서 그렇게 운 것은 처음이었다. 가끔 짜증이 나거든 진짜 짜증이 나거든. 나는 다 필요없고 아빠의 농담과 엄마의 무릎과 그리고 엄마가 해주는 된장찌개가 절실했다.
나는 이 날 이후 엄마와 아빠에게 회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냥 아주 납작하게 해버려. 아빠는 내 머리를 빠글빠글하게 부풀리고 진한 립스틱을 발라 범접하기 어려운 돌아이 아우라를 풍기라 조언하기도 했지만 엄마의 의견은 다소 의외였다.
"나는 네가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엥? 이제까지 해온 건 어떻게 하라고? 생활비는 어떻게 하라고? 남편에게 기대라고? 엄마에게 따져 묻지는 않았지만 안 될 말이었다. 그렇지만 아빠도 비슷한 이야기를 이었다.
"최악의 경우에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가정주부로 남는다고 해서 네 인생에 가치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빠는 최악의 경우 부분을 발음하는 동안 곁눈질로 살짝 가정주부인 엄마의 눈치를 보았다. 엄마가 내게 처음 자존심이라는 단어를 꺼냈던 날이 떠올랐다. 경제적인 힘을 스스로 길러나가길 원했던, 공부를 열심히 하고 글을 쓰고 어떤 일이든 추진력있게 하던 젊은 엄마의 당당하던 모습도 생각이 났다.
누구보다도 조직생활과 일을 지긋지긋해 했던 나지만, 내게도 배워온 것, 이뤄온 것, 경제적 자존심, 관성같은 것들이 한데 뒤섞여있어 복잡했고, 이 꼬인 실타래가 도통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 복잡함은 내가 풀어야 할 과제라고 치고, 엄마 아빠는 정말로 더이상 돈 없이 지내도 괜찮은거야? 나는 이 부분을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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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동안 기천의 돈이 들어갔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갔다. 나는 돈이 많이 들더라도 제발 1인실을 썼으면 좋겠다고 아빠에게 호소했다. 아빠는 거듭되는 내 설득에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1인실을 신청했지만, 막상 쓰려고 하니 1인실이 비는 날이 없었다.
병원은 병과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의료진, 다른 환자와의 신경전 또한 가득한 곳이다. 엄마가 아파서 밤새 신음소리를 내는 동안, 옆 침대 아주머니를 간병하던 아저씨가 잠을 못자겠네 쯧 하며 엄마 들으라고 크게 투덜거리는 일이 있었다. 나는 이 목적성 있는 투덜거림을 결코 그냥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씨ㅂ..."
비록 뒷발음을 깔끔히 마무리 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들어도 충분히 어떤 욕을 연상할 수 있도록 나는 피드백을 내뱉었다. 한 번의 투덜거림과 한 번의 씨ㅂ...가 더 이어지자, 옆 침대 아저씨가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엄마 아빠에게 함부로 대하는 간호사나 의사도 있었다. 반말을 하기도 하고 소리를 지른다던지 움직이지 못하는 엄마의 팔 다리를 던져대기도 했다. 아빠는 엄마에게 불이익이 올까봐 부당한 대우에 직접 항의하지 못하고 상처받기 일쑤였다. 남동생과 내가 번갈아 병원에 전화하며 항의를 하고나면 의료진들은 뒤늦은 사과를 해왔지만, 아빠는 트러블이 일어나려는 순간마다 극도로 예민해져 우리를 말렸다. 병원이 갑, 환자가 을이란다. 우리의 항의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단다. 아니 내가 돈을 낸다는데, 부당한 일에 할 법한 항의를 하는데 대체 왜 싫대! 돈도 논리도 성질도 통하지 않는 갑갑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네가 와서 간병한다고 하니까 기저귀를 가는 부분에 대해서 엄마가 몹시 심란해 하더라."
내가 첫 간병 교대를 가겠다고 선언하자 아빠가 전했다. 엄마는 진짜 나 보기가 민망했던걸까? 내가 가기 전날까지도 아빠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만큼 의식이 있던 엄마는 내가 병실을 찾자마자 긴 잠에 빠져들어 도통 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며칠 뒤 내가 집으로 돌아간 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일부러 그런거지?
"지연이에게 목걸이를 선물하고 싶어. 십자가 목걸이 같은거."
환상의 세계를 날아다니던 엄마가 의식이 깨어나자마자 아빠에게 말했다. 여러 친척 가족들이 위로금을 주고 간 후라 엄마에게는 어느정도의 돈이 생겨있었다. 나는 그 돈으로 핑크골드에 다섯개의 큐빅이 박힌 십자가 목걸이를 사서 아빠에게 인증 전화를 했다. 거봐 애들이 좋아하잖어 엄마의 목소리가 스마트폰 바깥으로 들려왔다.
거봐 애들이 좋아하잖어. 물론 좋았다. 당연히 너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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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는 엄마 생애 내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혼수 이후 10년 만의 명시적 선물이기도 했다. 엄마는 내게 무언가를 선물할 수 있는 돈을 손에 쥐어본지 오래되었다. 반짝이는 작은 십자가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엄마를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떤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아! 하고 머리가 맑아지는 생각이었다. 엄마는 평생토록 내게 뭔가를 사주고 싶었구나. 갑자기 생각이 물꼬를 트고 이어졌다.
엄마는 내가 엄마의 기저귀를 가는게 민망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간병하면서 힘이 드는게 정말 싫었던 거다. 뒤이어 또 무언가가 떠올랐다.
엄마는 내가 가족을 책임지는 삶을 살기보다는 내가 더이상 마음고생 하지 않기를 바랐던 거구나. 그래서 알량한 자존심 같은건 접고 일을 하지 말라고 했던 거다. 그리고 또 떠올랐다.
엄마는 내 신혼 살림을 마련할 때 오랜만에 큰 쇼핑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웠던게 아니구나. 엄마는 내게 엄마 아빠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사줄 기회가 생겨서 좋았던거다. 또 떠오른다.
엄마는 엄마의 자존심보다는 내 자존심을 더 존중했던 거구나. 내 경제력에 전적으로 기댔다기 보다는 그냥 내가 생긴대로, 하고 싶은 대로 자기효능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두었던 거다.
엄마는 스스로 경제적인 힘을 갖추기 위해, 잘난 사람으로 대우받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게 좌절되어 무너진 것이 아니다. 엄마는 주변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고 싶었고 다만 오래도록 그 기회를 잃었던 것이다.
나는 몸과 마음의 퓨즈가 다 나가버릴 때까지 꾸역꾸역 힘든 일을 이어가는 삶을 살았다. 이런 내 모습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엄마의 죽음을 통해 오히려 나 자신의 진실을 봤다. 나는 엄마를 닮았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평생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재주가 없어 할 줄 아는게 별로 없다. 무뚝뚝하고 애교도 없고 말도 많지 않다. 그저 제 잘난 맛에 살았으니 그래도 알량한 재주로 돈을 조금 벌 수 있게 되어서, 할 줄 아는게 그것 뿐이라 엄마 아빠에게 주야장창 돈만 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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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침대를 정리하던 어느 날이다. 동공 반응이 점차 줄어들어 오른쪽 방향을 아예 인식하지 못하던 엄마가 갑자기 온 힘을 다해 오른쪽으로 고개를 들려 똑바로 나를 보았다. 그 어느때 보다도 또렷한 눈빛이었다. 엄마 왠일이야 이렇게 힘을 내고? 그 뿐만이 아니었다. 엄마는 기적처럼 온 힘을 다해 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한 번, 두 번, 세 번, 내 볼을 쓰다듬었다.
"아유 우리 이쁜 지연이, 아유 우리 이쁜 지연이, 아유 우리 이쁜 지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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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깨달은게 있다. 생활비, 책임감, 자존심 같은 건 아주 작은거다. 우리는 사랑을 자기 식대로 주고 자기 식대로 받는 존재이다. 더 중요한 건 주는 것은 사랑의 몫에서 반 밖에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받을 줄 아는 것, 받았을 때 받았음을 아는 것이 사랑을 완성한다. 나는 엄마의 이쁜 지연이를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로 정확히 받아들였다. 그동안 다른 궂은 모든 일들을 씩씩하게 지나쳐왔지만, 이 기억 만큼은 떠올릴 때마다 아리다. 다른 건 다 잊어도 이 기억 만큼은 잊고 싶지 않다.
엄마는 내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게 받는 삶을 받아들였다.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갑갑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보다 훨씬 더 주변을 살필 줄 알고 섬세했던 엄마가 그동안 내게 이것저것해주고싶고 사주고 싶은게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엄마가 내 유일한 선물이라 다른 건 필요없다 외치지만 엄마 마음은 그게 다가 아닌거 안다. 내가 이제 엄마 마음 다 안다. 내가 주는거 다 받아줘서 엄마에게 정말로, 정말로 많이 고맙다. 잘자라 엄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