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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 Oct 20. 2022

돌아오지 못할 나날들의 그 향기와 색감과 소리

이런 때가 다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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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네 가평집에서는 참기름내 고소한 소고기 미역국, 짭쪼름한 오뎅, 한 바가지의 단귤, 아빠가 굽고 엄마가 버터로 볶아준 감자 두 세알, 호박과 두부와 새송이버섯이 말캉말캉 씹히는 강된장찌개, 아삭거리고 새콤하게 톡 쏘는 김치, 그리고 일본식 미소국이 곁들린 김치볶음밥, 바삭바삭한 양미리 구이를 먹었다.


가평집에 오자마자 엄마의 극세사 잠옷을 빌려입은 나는 온 몸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보솜털에 보호받으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종일 좌아빠 우엄마를 수호신 삼아 뜨거운 전기장판에 등을 지지며 청문회 뉴스를 보았다. 세상이 크게 변하는 가운데, 과거에 사랑했던 누군가, 어떤 상황에 대한 몸서리쳐지는 미움, 가평집의 따스함 가득한 가난 같은 것들이 뒤섞여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들락거렸다. 따뜻하다. 보송보송하다. 가평집은 가난하고 나는 거기에 숨어 안심하며 누워있었다.


아빠는 매일 마른 장작으로 불을 지펴 감자와 고구마를 구웠다. 감자는 내가 먹고 고구마는 아빠가 먹었다. 첫 날은 늦은 밤이나 되어 감자를 구웠다. 영하 6도였지만 뒷마당에서 싸구려 조끼를 입고 한참이나 놀았다. 양동이에 모아둔 빗물 얼음을 꼬챙이로 쑤셔 대어 부수다가, 추워지면 아빠 옆에서 주황색 불을 쑤셕거렸다. 아빠는 쪼그려 앉아서 마른 나무를 넣었다 헤집었다가,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예전에는 꿈이나 집착, 이상의 일부였던 책들을 찢어 불로 돌려보냈다. 쪼그려 앉은 아빠는 가난하고 나는 거기에 기대었다.


약간 지루해지려고 하면 동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별들을 바라 보았다. 지금은 폭발 했을지도 모르는 베텔게우스, 그리고 그 오른쪽 밑에 리겔이 있다. 베텔게우스는 막강하지만 불길한 별이다. 베텔게우스는 언젠가 한 번 내 꿈에 등장했다. 하늘에서부터 잡아먹을 듯 다가오는 바람에 나는 공포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서운 베텔게우스라도 엄마 아빠가 있는 가평에서는 힘을 못쓴다. 지구에 소행성이 떨어진다면 반드시 엄마네 와야지. 그리고 별들을 불쏘시개로 삼아야지. 동네 개들이 멀리서 저들끼리 신호를 보내며 한참이나 짖었다.


아침이면 흰 서리에 반사된 눈부신 햇빛이 집안 가득히 침범해 들어왔고 나는 그 볕에 얼굴과 등을 내 맡긴 채 하루를 시작했다. 엄마 아빠는 하루에 세 잔 이상 공산품 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그 중에 두 잔은 아침나절의 몫이었다. 둘은 책을 보거나 청문회 뉴스를 보거나 했고 나는 공책을 펴서 아무 시덥 잖은 말이나 쓰고 또 쓰고 또 쓰고 또 쓰고 했다. 머릿속에서 쉼없이 떠들어 대던 많은 말들이 차례차례 비워져 갔다. 시간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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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와 함께 찾은 낙산에서는 부드럽고 꼬들꼬들하고 딱딱하고 흐물흐물하고 물캉물캉한, 포 뜨고 세꼬시 뜬 활어회와 오징어회, 그리고 멍게, 맛있게 짜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뼈 매운탕, 말라버린 새우튀김, 구워서 쫄깃쫄깃한 임실치즈를 먹었다.


나는 매운탕의 국물을 연신 입으로 가져가면서 짧은 시간동안, 그러니까 한 15분에서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쉬고 싶고, 다 놓고 싶고, 계획을 다시 세우고 싶으며,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빠는 나의 고민과 그 깊이가 정당하며 할 만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나의 두려움은 정당치 않으며 인생을 앞당겨 살지 말라고 했다. 아빠는 내게 해줄 수 있는 말을 꼭 들어맞게 찾아냈다.


오후에는 13년을 함께 살았던 강아지의 뼛가루를 조금 뿌려주었던 바닷가, 바로 그 자리에 서서, 하늘빛 하늘과 바닷빛 바다와 모랫빛 모래의 경계선, 빨간 등대, 벌떼 처럼 몰려 다니는 갈매기들과 외로워 보이는 타인들을 물끄러미 보고 또 보았다.


저 검푸른 바다 속에서 나의 그 강아지가 종종종 뭍으로 올라왔으면 좋겠다. 그 개가 모래언덕을 또 다시 종종종 걸어 올라와 수선스런 갈매기 발자국에 자신의 발자국을 보탰으면 좋겠다. 몸을 한 번 부르르 털고 개냄새를 풍기며 내게 안겼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강아지랑 산 것은 13년이지만 죽은 후에도 11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강아지는 그리움으로 변했고 낙산 바다도 그리움으로 변했다. 나도 변했다. 아빠도 변하고 엄마도 변하고 세상도 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움만이 변하지 않고 나는 바다에 마음을 맡긴 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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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에서 가평으로 돌아온 날 밤 눈이 내렸다. 금세 그쳤지만 조용히 쌓였고, 잠을 자려고 누우니 빠르게 녹기 시작했다. 나무 지붕에서 눈이 녹아 흘러내려 데크로 똑 똑 똑 똑 하고 천천히 떨어지더니 점점 더 빨라져서 이중 삼중 화음으로 똑똑 똑똑 똑똑똑똑 똑똑똑 똑똑 똑똑 하고 겹쳐 들렸다.


나는 데크에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한참을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내 옆에 누워 잠을 청한 아빠는 어깨가 아파 간헐적으로 신음을 했다. 방에 있는 엄마는 잠이 들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가평집 주변으로 요정들이 뛰어다니는 상상을 했다. 똑똑똑 똑똑 하는건 요정들이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발소리다. 환상 속에서 잠이 드니 마음이 편해지며 꿈에서 물 속을 헤엄쳤다. 낡은 도서관이 물에 깊이 잠겨 있었다. 나는 용감하게 걸어 들어가 물 속에서 책 읽는 사람들 위를 헤엄쳐 다녔다. 하늘을 나는 꿈은 바닥으로 떨어지게 돼있지만 수영을 하는 꿈은 절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헤엄은 평온하고 평온한, 일종의 오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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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아빠 혼자서 시내에 나가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두 번 고민없이 남겨진 엄마를 데리고 신혼집 동네의 고급 백화점에 들렀다. 엄마의 한결 같은 무채색 옷차림이나 염색하지 못한 흰 뿌리머리가 백화점의 화려함과 어울리지 않았다. 엄마의 꾀꼬리같은 목소리도 조명이 차분히 가라앉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울리지가 않았다.


나는 그 마음을 발견하고 속으로 크게 화를 냈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주 크게 화를 내었다. 섬세한 자아는 잘 돌보기도 해야하지만 혼이 나야 할 때도 있다. 엄마의 팔짱을 꽉잡아 끼고 백화점을 빠르게 걸었다. 꼬들꼬들하고 노란 빛깔이 예쁘고 관찰레가 잘근잘근하게 씹히는 멋진 오리지널 까르보나라 파스타로 돌격하다시피 했다. 아빠의 내복을 사고 엄마 것과 비슷한 극세사 잠옷을 샀다. 호박, 두부, 버섯, 토마토도 샀다. 강된장과 숙주나물과 멸치도 샀다.


신혼집 엘리베이터 안에서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가결됐어요"라고 오토바이 헬멧을 쓴 택배 배달원 아저씨가 알려주었다. 정말요? 물으니, 아저씨가 지금 방금요, 라고 말했다. 세상이 꿀렁꿀렁 변해가도 변하지 않는 것,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게 있었다. 신혼집에 도착하여 엄마는 또다시 된장찌개를 하고 나는 빨래를 갰다. 차를 마시고 노닥거리다 보니 신랑이 왔다. 신랑은 엄마가 끓인 찌개를 그릇까지 먹었다. 곧 엄마는 만취한 아빠와 만날 약속을 정하고 가평집으로 출발했다. 새벽까지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의 뿌리머리와 아빠의 감자 굽는 장면을 상상했다. 엄마 아빠의 책읽는 모습과 도서관에서 헤엄치던 꿈을 생각했다. 별과 불과 가평집의 가난을 생각하다가, 엄마 아빠와 함께 즐겼던 아름다운 식감의 그 음식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가, 내가 붙잡고 있는 그리움, 교만함, 어리숙한 사랑, 인간에 대한 희망과 미움이 무지개 빛으로 떠올랐다. 나의 나이테가 굵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물며 엄마의 나이테, 아빠의 나이테, 인생 겹겹의 나이테에 박힌 경험과 감정의 깊이는 가늠이 되질 않았다. 새벽 2시나 되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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