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날에 걸쳐 뒷골이 욱신 욱신 콕 콕 하는 두통을 마주할 때마다 노트에 픽션이 한 챕터씩 쓰여졌다. 방구석에서 혼자서만 오래도록 생각한 컨셉으로서, 한 소녀의 정수리 위에서 새싹이 뚫고 돋아나려는 사건이 픽션의 시작을 장식한다. 의사가 노랑나무종양이라고 이름 붙여 준 딱히 희귀하지도 않은 불치병을 대면해가는 스토리다.
노랑나무종양은 영원한 추상을 손에 닿을 숫자로 바꿔 놓는 병이다. 언젠간 엄마를 만나러 프로방스로 갈 것이다, 아니 아니, 2월 6일 내일은 오전 11시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나는 통통한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별 사이로 까만 밤을 날아다녔다, 아니 아니, 나는 지난밤 정확히 열 시에 잠들었고 새벽 다섯 시에 잠이 깼다. 세상은 3기 노랑나무종양 환자를 어른이라고 부른다. 실제 나이와는 별 관계가 없는 호칭이다.
노랑나무종양은 괴리의 산물이다. 괴리 자체가 직접적으로 유발하는 병이라기보다는 괴리에 의한 절망과 의심, 그로 인한 강한 방어기제가 뇌 호르몬의 균형을 깨뜨려 발생한다. 이 괴리라는 것은 삶에 대한 무지, 어리석음, 착각에서 온다. 무엇과 무엇 사이의 괴리인가? 소녀는 자신의 노랑나무종양을 거울로 노려본다. 그리고는 되었으면 했던 나와 되어버린 나의 차이가 너무나 다르다고 외친다.
그러나 그렇게 열두 번쯤 외친들 별 의미가 없다. 되고자 한 나, 되어간 나, 되어버린 나, 그 전체가 분명하게 그려진 적도 없고 그려질 법 한적도 없다. 똑똑하게 태어나 똑똑하게 지내본 적은 단연코 없었다. 세상은 무슨 수를 써도 가늠할 수 없다. 사람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소녀의 그릇으로는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인생 사건들ㅡ바다위의 죽음들, 스크린도어 사이에서의 죽음들, 공장 기계에서의 죽음들, 그리고 가까운 사랑의 죽음들ㅡ에 체하고 토하는 과정 속에서, 소녀는 스토리 없는 인간, 서사에 동참하지 않는 인간이 되기로 마음 먹는다. 우리를 인생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은 비장함이 곁들린 서사이다. 그러나 그런 서사를 두 눈 뜨고 똑바로 지켜보는건 용기 그 이상이 필요하다. 노랑나무종양은 질끈 감아버린 눈, 그 시신경 뒤쪽에서 천천히 자양분을 얻어 뇌로 전이된다.
병이 깊이 진행될 수록 정신과 육체에 들러붙는 단 하나의 증상이 있다. 믿어의심치 않아왔던 '나' 라는 감각이 시간이 흘러갈수록 참담하리만치 가볍게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이 '나'라는 감각은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노랑나무종양이 한낱 씨앗에 불과하던 시절, 그 안에 꽁꽁 응축되어있던 혼란스럽고 밀도있는 뜨거운 감정이나 의지같은 것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씨앗에 담긴 무언가가 너무도 깊고 질량이 커서 도저히 어디론가 흩어질 수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모든 것은 팽창하여 균열되고 흩어져 간다. 우주도, 유리잔도, 구름도, 엄마 아버지도 점점 더 빠르게 빠르게 흩어져만 간다.
병을 끌어안은 소녀는 계속해서 되어간다. 지금 무엇이 되어가는가? 그것은 나무다. 그것도 노랑나무다. 다른이들은 무엇이 되어가고 있지? 어쩌면 공기이다. 물고기다. 강아지이거나 수수꽃다리다. 양털구름이고 아카시아이고 한여름의 비이다. 투명한 조개이고 책 속의 언어이고 카카오닙스 향기이다. 수면아래의 빛이고 흰소금밭이고 민들레 홀씨이다. 증오이거나 미움이거나 기쁨이거나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의 계획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랑나무종양이 알아서 하는 일이었다. 소녀는 그저 최종의 순간까지 흩어져가는 '나'를 감상하기만 하면 되었다. 무엇이 되었든 나무종양의 신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소녀의 감각이 매 순간 고통으로 점철되어도, 최종의 모습은 그러나, 늘 그 분 보시기에 좋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