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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 Oct 21. 2022

각자의 애도, 각자의 몫, 각자의 공부

우리는 왜 만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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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실과 슬픔에 대한 모든 혐의를 어딘가에 뒤집어 씌우고 싶을 때가 있다. 책임소재와 시시비비를 철저하게 가려 숨겨진 시나리오를 밝혀내고, 거기에 멱살을 잡을 실체가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랄 때가 있다.


코로나가 극성을 떠는 시절이었다. 엄마가 코로나 백신 부작용으로 희귀암에 걸렸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백신을 맞고 일이주 후 허리에 격통을 느꼈더랬지, 4개월 뒤부터 다리마비가 시작됐으니까. 머릿속으로 날짜를 셈하며 정부에 어떻게 문제제기를 해야하는지 생각한다. 소송 비용은 어떻게 해야할지. 격앙되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지. 수 개월간 매일 작성한 병간호 일지를 만지작 거린다. 소송을 한다면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다른 계산으로 넘어간다. 엄마가 백신 부작용으로 희귀암에 걸릴 확률과, 멀쩡히 살다가 희귀암에 걸릴 확률은 얼마나 차이날까? 만약 전자도 0.001%, 후자도 0.001%라면 확률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아인슈타인도 이 확률을 계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뭐가 됐든 엄마에게는 100% 병이 찾아왔으니 확률이란 건 말장난에 불과하다.


공상으로 넘어간다. 과거를 방문할 타임머신이 있으면 어떨까. 흔해 빠진 클리셰이지만 한번 쯤 누구에게나 간절한 기계다. 아주 근시일로 돌아가 백신을 굳게 신뢰하던 엄마의 마음을 돌려놓거나, 25년 전으로 돌아가 엄마 그 선택만큼은 절대 하지마오 하고 말리면 지금 엄마가 살아있지 않을까. 만약 그 자식이 거기에 안 나타났다면 어떻게 되지? 아빠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를 안 낳았다면? What If 를 곱씹지만 오늘은 벌어질 모든 일들이 기어이 벌어지고야 난 다음이다.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는 헛헛하기만 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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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백신 부작용 물증이 없다며 울분을 터뜨리지만 나는 냉정하게 말한다. 물증이 있다 하더라도, 심지어 전 국민이 증인이 된다 하더라도, 어떤 죽음은 절대로 밝혀지지 않는게 있어. 내 말은 아빠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또 다른 울분의 레퍼토리가 이어진다.


"왜 한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죽었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 그럼 다 엄마 이라는 결론이야?"

"엄마 잘못도 아니고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것도 아니야. 엄마는 그냥 병에 걸린거야."

"엄마가 여든 다섯까지 장수하고 갔다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지도 않았을텐데."

"엄마가 여든 다섯에 돌아갔더라도 억울했을거야."


억울, 탓, 책임, 증거, 정확한 원인 규명... 아빠의 머릿속을 수개월째 맴맴도는 단어들이다. 나도 할 수 있는 오만가지 의심과 자책은 다 하는 편이지만,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며 똑같은 후회와 자책, 의심을 도돌이표 하는 아빠에게 만큼은 박사님도 울고 갈 이성적인 논리를 펼친다. 잘 생각해봐. 엄마가 평소에 그렇게 건강하지만은 않았어. 심근경색도 있었고, 불면도 심했고, 게다가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없을만큼 심하게 괴롭혔던 이명은 어떻고. 어쩌구 저쩌구 어쩌구 저쩌구.


아요 재수없는 잘난 딸, 컬러풀한 똥 굵은 잘난 딸,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자존감이 떨어진 것도 숨기려만 드는 잘난 딸은 오늘도 아빠한테만 강철모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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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혼자 소주 2병을 마시고 제 아들 옆에서 폭풍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엄마 속썩이던 본인이 뒤늦게 철이 들어서 결혼도 하고 자리도 잡아서, 엄마가 보고 싶어하던 이뿐 손주도 낳아 보여줘서, 모든 걸 안심하고 그리 빨리 날아가버렸다 한다. 곧이어 답을 원하지 않는 질문 주정이 시작됐다. 누나, 아빠, 내가 그렇게 개차반이었어? 나 별로인 아들이었어? 내가 그정도였어?


그래! 이눔시키야! 니가 살면서 엄마 속썩인 것 생각하면 누나의 정의가 용서치 않는다. 빈 사이다 페트병으로 네 머리를 통통 쥐어박아 니 안의 악동을 다 날려버리겠다아아그렇지만, 지금은 자기만의 자책감으로 상처받고 속죄와 애도를 이어가는 동생을 토담토담 달래야 한다.


아빠에게는 동생과는 또 다른 애도의 논리가 있다. 엄마가 아빠를 도와주려고 빨리 갔는지도 모르지. 아빠가 남은 평생 엄마를 돌보며 살지 않도록 엄마가 아빠를 배려해서 빨리 가버렸다는 것이다. 아니 엄마의 장애는 병증의 결과일 뿐이고 본질적으로 희귀암 환자였잖어. 아무리 말해도 아빠는 안 듣는다. 아빠가 그 말을 네 번째 꺼냈을 때야 비로소 나는 그게 죽음의 의미에 대한 나의 동의를 구하려고 시도해보는 말인 것을 알았다.


잘난체 하는 나도 우스운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내가 엄마에게 쉽게 손주를 보여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돼서? 아니면 내가 작년에 가족들 얘기를 담담히 적은 책을 내서는 아니었을까? 동생과 아빠의 생각은 비논리적이라 생각하면서도 내 엉뚱한 의구심은 마음 속에서 진지하게 검토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엄마가 이 세상에 없어도 나는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자라났던가? 엄마가 죽기 전에 진작부터 이런 태도를 보였던 건 아닌지, 그걸 엄마의 영혼이 눈치챈 것은 아닌지 두렵다. 마치 내가 엄마의 죽음 프로젝트에 스타트 버튼이라도 누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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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다른이의 삶과 죽음에 전적으로 관여한다는 건 자신의 힘을 너무나 과대평가하고 상대방의 독립된 세계를 너무나 과소평가 하는 것이다. 아빠의 후회 레퍼토리처럼, 그때 아빠가 선택한 병원이 그 병원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아빠가 5분 더 빨리 간호사를 불렀다 하더라도, 아빠가 엄마를 밤새도록 지켜봤다 하더라도 엄마는 지금 내 곁에 없을 것이다. 동생이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내가 가족에 대한 글을 썼든 안썼든 엄마는 지금 내 곁에 없을 것이다. 엄마의 병은 그렇게 객관적으로 무서운 병이다.


그렇지만 나는 한 사람이 다른이의 삶과 죽음에 긴밀하게 참여하고 있다고는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어쩌면 나 혼자만의 영성, 종교와 같은 얘기일지도 모른다. 나는 가령 이런 상상을 해보고야 마는 것이다.


엄마와 나, 동생, 아빠는 이 세상에서 만나기 전에 이런 저런 삶의 연극을 하기로 미리 시나리오를 합의하 이 지구에 태어났다. 우리 서로 이럴 땐 이런 말을 해주기로 해,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이렇게 해주기로 해. 시나리오가 여기 M 챕터까지 왔을 때 나는 세상을 먼저 떠나는 걸로 할께. 너가 떠나고 싶은 시점은 너가 선택해.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그 상황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시나리오의 규칙이고 그 반대는 반칙이자 오류이다. 왜냐하면 A 다음에 B가 와야만 우리 모두의 스토리가 정확히 하나로 연결되고, 그래야만 우리가 원했던 방향으로 변하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 혼자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고 들면 시나리오를 협의했던 영혼들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그들의 인생 스토리 전체를 망가뜨리는 것이 된다. 


물론 태어나자마자 그 합의를 모두 잊는게 삶의 룰이니 어떤 약속은 지켜지고 어떤 시나리오는 진행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엄마는 자신이 준비한 시나리오를 마쳤고, 그래서 계획대로 고향으로 귀환했다. 이제 응당 이런 질문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왜 인생 역할과 시나리오를 협의했을까? 우리는 왜 이 세상에서 만났을까?


다행히 엄마는 돌아가기 전에도, 돌아간 후에도 왜 우리가 만났는지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이 얘기는 다음에 더 자세히 이어질 것이다. 엄마는 인생 공부를 하고 싶었어. 환상의 세계를 날던 엄마가 눈을 감고 말했다. 남은 우리 또한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각자의 삶을 꼼꼼히 반추하며 인생 공부 목록의 다음 챕터로 나아가려고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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