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보라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
사진 출처 : 영화 <말없는 소녀>의 스틸컷-(주)슈아픽처스 제공
재난은 예고 없이 다가와서 조금씩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다. 얼마 전 우리 집에 일어난 화재는 신체에 갇혀버린 내 병증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병증은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몸이 먼저인지 마음이 먼저인지 결국은 둘 다 나를 괴롭혔다. 내 몸과 타인의 몸이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듯이 나 또한 고립감이 더해졌다. 타인이 느끼는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통증이 신체적인 아픔이라면, 괴로움은 심적 아픔이다. 고통 그 자체는 통증과 괴로움을 아우르는 말이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고통, 그 쓸쓸함이여!
누군가는 평생에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을 일인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가, 비관도 했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으로 죽는 사람들, 교통사고를 당하는 사람들, 재해를 입는 사람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해병대 사망 사건, 그리고 최근에 일어난 군 훈련병 사망 사건 등.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런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리된 것이 아니다. 나 또한 어떤 잘못이 있어서 이렇게 힘든 것은 아니다.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크고 작은 시련이 그저 그렇게 내게 일어났을 뿐이다.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내 마음을 다독여도 상실의 고통은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화재 복구 작업을 마친 2주 후, 바깥 생활을 끝내고 집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에는 ‘내 것’이 없다. 어디서 내 정체성을 찾는다는 말인가. 두 달간 책도 읽지 않고 글 한 줄도 쓰지 않고 지냈다. 살아지기는 했다. 그러나 뭔가 모를 허전함은 가셔지지 않았다. 고통을 잊고 싶었다. 방황을 걷어내고 싶었다. 궤도를 벗어났으니,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책이 필요했다. 위로도 받고 싶었다. 인터넷을 켜고 온라인 서점에 접속했다. 검색창의 커서가 깜빡인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상황을 뭐라 해야 할까. 고통이라는 단어 외에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내 상황이 고통 그 자체였으니까. 잠시 후, 커서가 ‘고통’으로 바뀐다. 고통, 두 글자를 포함한 책 목록이 주르륵 나열된다. 가장 눈에 띈 책이 정보라 작가의 <고통에 관하여>다. 앞표지에는 검정 바탕에 초록 캡슐이 그려져 있다. 그 초록 캡슐이 상처 난 내 몸과 마음을 치료해 줄 것 같은 이끌림에 결제 버튼을 눌렀다.
정체성 혼란과 상실감에 젖어 있던 내게 다가온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는 나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무엇보다도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를 주었다. 책 속 등장인물은 큰 고통을 당한다. 나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남의 불행을 통해 안도감을 느끼는 인간의 나약함에 초라해지는 자신을 숨길 수가 없다.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 제약회사가 부작용이 없는 마약성 진통제를 개발했다. 고통을 없애주는 신약이다. 이에 맞서 사이비 종교단체는 인간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신도를 모으고 신도에게 인위적인 신체적 고통을 가하면서 종교 권력을 행사한다. 교단은 고통이 없는 삶은 자신의 영혼을 자각하지 못하는 삶이라고 결론짓는다. 고통만이 구원의 길로 인도해 준다고 하면서 추종자들을 조종한다. 인간성 말살도 서슴지 않는다. 급기야 제약회사에 폭탄 테러를 일으킨다. 제약회사를 운영하던 부부는 사망한다.
이 소설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도 제시한다. 먼저 의과학 실험윤리와 가정폭력이 등장한다. 제약회사의 부부는 신약 개발을 할 때마다 자녀를 상대로 실험을 강행한다. 남을 실험 대상으로 할 경우 법적인 제약이 있지만, 자신의 자녀를 대상으로 한다면 은폐하기 용이하다. 실험으로 약을 오남용 당한 아들이 사망한다. 제약회사 사장인 아버지에게 딸은 성폭력을 당하지만 어머니는 이를 묵과한다. 이렇듯 어린 자녀는 희생의 제물로 전락한다. 신약 개발의 이면에 이런 어둠이 깔려 있다. 인간성 상실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던 어떤 여자는 아들 둘을 데리고 가출한다. 집을 나왔으나 마땅히 기거할 데가 없다. 여자는 아들 둘을 데리고 사이비 종교단체에 들어간다. 종교단체는 이 가족을 이용하여 제약회사를 폭파한다. 폭파범 가족과 제약회사가 해체된다. 가정폭력을 한 아버지가 벌을 받아 마땅하거늘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한다. 약자를 보호해 줄 사회 안전망이 허술한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 기대어 보니, 행복한 사람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고통스럽다. 실험윤리를 지키지 않는 제약회사 사장의 가족이 겪는 고통, 가정폭력을 당하는 여자의 고통, 그런 엄마를 속수무책으로 봐야만 하는 자녀들의 고통, 고통과 구원의 갈림길에서 목숨 바쳐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이승에서 겪어내야 하는 고통. <고통에 관하여>에서 작가가 말했듯이,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달랐다. 자신의 고통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다.
사이비 종교단체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받고 구원을 받기 위해 고통을 인내한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하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하느라고 밤낮없이 분주하다. 일하느라 병든 몸과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벌어들인 돈을 쓴다. 돈을 버느라고 또 일을 한다. 악순환이다. 그 연결 고리를 끊기 어렵다. 심지어 쉬는 일조차 ‘충전’이라고 한다. 인간이 기계도 아닐진대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이런 우리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했다. 현대인은 너무 피로하다. 너무 고통스럽다. ‘풍요’라는 구원을 받기 위해 자기 착취로 피로하다. 풍요와 고통에 중독된 채로 산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하든, 돈을 추앙하든, 명예를 좇든, 나름의 신념 아래 살든,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간다. 그러지 않으면 힘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경제적 신체적 고통이 없다손 치더라도 ‘권태’라는 고통이 인간을 덮치는 것은 시간문제다. 결국 인생 자체가 고통이다. 늘 맑은 날씨가 없듯이, 늘 좋은 인생도 없다. 늘 흐리고 궂은 날씨가 없듯이, 늘 힘든 인생도 없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큰 바위처럼 살고 싶다. 의연하게 인간의 존엄을 지키면서 살고픈 것이 바람이다.
그렇다면 고통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통에 관하여>의 ‘작가의 말’에서 정보라 작가가 제안한다. 의미 없는 고통을 거부하라고, 힘들고 괴로운 일이 모두 다 가치 있는 일은 아니라고, 하여 충분히 잘 먹고 충분히 잘 쉬고 내 몸을 잘 돌보았을 때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괴로운 상황을, 고통을 탈출할 길도 모색할 수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의 정신도 뇌세포라는 물질에서 나오지 않는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허투루 여겨서는 안 된다.
고통을 겪을 때마다 삶에 자신감도 떨어지고 무언가 결정해야 할 때는 판단력도 흐려졌다. 무엇보다도 매사가 귀찮았다. 그래도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스무 살이 넘긴 했어도 딸아이 둘이 헤쳐나가야 할 미래가 있는데, 어미로서 못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는다. 이 정도에서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 왜? 난 엄마니까. 그리고 꿈과 희망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의 선생님이니까. 책 속에서 작가가 말했듯이, 고통의 탐색에 매몰되면 결국 과거의 고통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된다. 결국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그 고통으로 돌아가 다시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자.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 독후감을 끝으로 화재 사건의 고통은 더 이상 끄집어내지 말자. 그렇게 다짐한다. 비워진 공간을 ‘희망’으로 채우련다. 미래가 밝아서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있으니 미래가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