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스터디에 연기 오디션 공고가 붙었다. 너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지라. 대본이 올라왔음에도 대충 훑어보았다. 정독을 하고 나에게 잘 맞는 배역으로 오디션을 넣어야 되는데 말이다. 아무튼 대본을 대충 보니 캐릭터 이름 중에 '사자'가 있었다. 강렬한 이미지 하면 또 나지. 하며 시원하게 사자로 지원 했는데. 훗날 연출의 캐스팅 비화를 들어보니.
'그냥 사자 그 자체 였다.'
라고 했다. 애초에 오디션 지원을 하는 순간 픽스였다고 한다. 아무튼 나중에 캐스팅이 되고 리딩날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대본을 읽어 봤는데. 속으로 큰일 났다 싶었다. 내가 아에 하기 싫어하는 찐따 캐릭터였다. 나에게 그런 모습이 진짜로 없어서 싫어했다기보다 내가 그렇게 찐따처럼 구는게 내 스스로 보기가 못 견디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결국엔 촬영날이 다가왔고. 내 평소 성격과 잘 맞지 않는 캐릭터를 하다보니 나도 연기하면서 '아 정말 부족하구나.' '애초에 이런 캐릭터는 앞으로 하지 말아야지'하는 식의 생각들이 지나갔다. 완성본이 나오고 나서 친한 동생에게 보여줬을 때도
'형 이건 좀 아쉽다'
라고 대답해주었다. 나도 안다. 하며 씁쓸하게 넘겼다. 아무튼 이때부터 나는 절대로 이런 찐따 캐릭터는 하지 말아야지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왔다. 그러던 어느날 로멘틱 코메디 웹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는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 요즘 고민이 참 많아'
'그래? 그럼 연기해야지. 너 다음주에 스케쥴 어떻게 돼?'
'다음주는 괜찮은데?'
'그럼 같이 하자'
라고 답했다. 사실 모든 잡스러운 고민은 일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뒹굴뒹굴거려서 생기기도 하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동생 고민을 해결해주겠다는 의지 하나로 캐릭터를 하나 새로 만들어야 되는 상황이 오니 이거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위기는 기회이고 인생은 새옹지마다. 동생의 합류로 원래 가려던 시나리오에 추가로 한 커플을 추가시키기로 했다. 문제는 남자 배역이었는데. 별생각 없이 내가 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대본을 쓰는데, 어쩌다보니 내가 다시 찐따 캐릭터가 되어있었다.
결국 찐따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안경도 쓰고 수염도 기르고 앞머리도 부스스하게 내리고 하니 정말 내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폭삭 주저 앉아 버렸다. 촬영을 하는 내내 '아 진짜 자존감 떨어진다'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 나왔다.
다들 내 눈치를 본답시고 묵묵하게 지켜보다가 내 증세가 심각했는지 '오빠 괜찮아요. 귀여워요'라며 나를 위로해주었다. 사실 내가 자존감을 떨어뜨린 이유는 캐릭터에 더 몰입하기 위함이었고. 더 나아가서 자존감이 떨어진다라는 말을 내뱉으면 진짜로 자존감이 내려가서 더욱 연기가 현실성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동생들에게는 '그런 이유야'라고 말하는 순간 나의 무의식에 때려 넣는 나만의 연기 역할 체화 시스템이 무너질거 같아 말은 못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내가 연기한 모습을 플레이백해서 보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물론 내가 원하는 그림대로 내가 연기한 건 아니었기에 100% 만족하진 않지만. 그래도 일전에 했었던 사자 역할에 비하면 월등하게 성장한 나를 돌아 볼 수 있었다.
물론 또 다시 찐따 역할을 누군가가 건넨다면 정말 심각하게 고사해보겠지만. 다음 작품에서 찐따역할은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나 스스로의 확신이 들었다.
결국, 인생은 새옹지마고 나는 언제나 조금씩은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