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가까워오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향긋한 봄내음 가득 머금은 어린 시절좋아하던 쑥버무리다. 할머니는 봄이 오면 종종 쑥을 캐러 나가셨다. 한 손에는 달랑달랑한 비닐봉지를 들고 맨손으로 불쑥 나온 쑥의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날도 그랬다. 방학을 틈타 놀러간 할머니 댁은 지글 지글한 보리차 끓는 냄새로 가득했다.구수한 차 냄새는 꼭숭늉 같기도 멀건 어묵탕 같기도 했다. 치글치글. 보글보글. 할머니는 차가 넘치기 전에 돌아오셨다. 품에는 옹기종기 엉켜있는 풀잎을 가득 안고서는 말이다.
"할머니 그게 뭐예요?"
"이거? 쑥이야. 쑥. 이걸로 맛있는 거 해줄게."
아이같이 빙긋 웃으시며 잔뜩 뜯어낸 쑥을 내미셨다. 어쩐지 그 맛이궁금하지않았다. 초록색을 띄는 게 꼭 쓴 풀 맛이 날 것 같았다. 썩 구미가 당기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한참 티브이를 보다가 스멀스멀 올라오는냄새에 코를 한번 킁킁댔다.
"다 됐으니 얼른 나와 먹거라."
냄비를 열자 뜨거운 김이 폴폴 났다. 뿌연 연기 속 작은 쑥들은 흰 쌀가루와 함께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젓가락을 들고 연기가 나는 그것을 후후 불어 먹었다.
"와 맛있다! 쑥떡이에요?"
"쑥버무리야. 맛있지? 어여 천천히 많이 먹거라."
배고픈 강아지처럼 그릇에 잔뜩 코를 박았다. 그날 이후 할머니를 만나면 무작정 쑥버무리를 찾았다. 신기하게도 금세 맛있게 만들어 내는 우리 할머니였다.
시간이 흘러 나는 그 맛을 그리워하는 어른이 되었다.길을 걷다 불쑥 돋아 있는 쑥을 보면 슬며시 다가가 맨손으로 그것을 뜯어낸다. 생각보다 질겼다. 이상하다 할머니는 매번 비닐봉지 한가득을 캐오셨는데. 그러다 비로소 깨달았다. 부러 쑥을 캐러 나가시던 그 마음은 사랑이었음을.
할머니의 사랑은 이른 봄에는 쑥을 캐고, 한 겨울에는 뜨거운 보일러를 틀었다. 언젠가 엄마는 말했다. '할머니는 혼자 계시면 절대 보일러 안 틀어.' 내가 있는 날은 날마다 바닥이 절절 끓었는대도, 나는그것이 사랑인 줄도 몰랐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오랜 사랑이었다.
먼 봄이 가까워 온다. 계절에 따라 괜스레 마음이 몽글해진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봄이 가까워오면 할머니가 그립다. 할머니 이불 냄새. 치글치글 보리차 냄새. 쓴 쑥 냄새. 따뜻한 방안의 온기도. 봄이 가까워 오면 그것들이 그립다. 겨울이 저물어가는 저녁 할머니의 오랜 사랑이 그립다.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Life's greatest happiness is to be convinced we are lo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