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천개의 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요일 Sep 15. 2024

모둠활동의 함정

All Right English

자, 주변 친구들과 4명씩 모여
모둠을 만들어주세요.


읽기 수업은 영어교사에게 언제나 버거운 과제다. 교사 혼자 읽고 해석하면 빠르고 정확하게 지식은 전달하지만 배움을 확인할 길이 없다. 나 또한 이런 수업은 지루해서 버린 지 오래, 그래도 진도가 급하고 꼭 다루어야 할 중요한 내용은 교사중심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통하는 단 하나의 매직은 없다. 그래도 읽기 수업에서는 모둠수업이 차선. 수준차가 나는 아이들을 일괄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비효율적이니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모둠구성이 쉽지 않다. 아이들의 취향이 강해진 만큼 서로에게도 선호가 분명하다. 누굴 좋아하고 누굴 싫어하는지 모둠을 만들 때정확하게 보인다.


외로운 섬하나.

주변의 친구들과 4명 모둠을 랜덤으로 만들라고 했었다. 지난번 수업에는 금방 4인 모둠을 만들더니 오늘은 이상하다. 3명 인조, 5명인 조, 그리고 혼자 남은 아이하나, 혼자인 아이를 3명인 조에 들어가라고 하니, 해당조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손사래를 치며 "괜찮아요!"를 외친다. 그러면 원래 앉았던 자리에서 가까운 조에 들어가라고 하니, 그 조의 친구들이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에요"한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사람을 앞에 두고 싫다 좋다 말하는 게 맞는 거야?

지금 친목도모 그룹 만드는 거 아니잖아.
그저 공부를 하기 위해 만난 거고 각자의 역할을 하고 서로를 도와 미션을 완료하면 되는 거야.

 지금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모이라고 한 게 아니라 근처에 있는 친구들과 모둠을 만드라고  한 건 거라고.
그런데 면전에서 누군가를 싫다고 말하고 그 사람을 밀어내면 당한 사람을 얼마나 속상할까.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니?

대학교에 가고, 사회에 나가서도 이렇게 하면 곤란해. 우린 공동의 목표로 공부하러 모인 공적인 공동체이고 누가 누굴 골라서 이 자리에 온 건 아니야.

세상에 나가서 항상 너희들이 좋아하는 사람만 만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잖아.
아직 안 친하거나, 말을 못 해 본 사람, 성향이 다른 사람과도 만나서 일할 수도 있는 거야. 그럴 때 면전에서 누군 좋네, 싫네 말한다면 그건 매우 불손한 행동이야.
서로가 서로에게 예의를 지켜줬으면 좋겠어.



모둠활동의 괴로움을 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아이, 자기는 다 안다면서 팔짱 끼고 잘난 척하는 아이, 무조건 베끼려고만 드는 아이, 시시덕거리면 떠들며 노는 아이들도 있다. 주어진 일을 함께할 때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최소한의 배려고 책임이라는 것을 알기나 하는 걸까. 대부분의 아이들은 잘 하지만, 한 두 명씩 모둠활동에서 엇박자를 내면 그 조의 과제를 시간 안에 다해내기는 어렵다. 그래서 착한 아이 한 두 명이 다른 아이 것까지 다해내는 불균형도 많이 보인다. 무임승차는 버스탈 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마지막 모둠 활동시간

조별로 한 문장씩 읽고 해석하는 시간이다. 일사불란하게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유독 한 조만 시끄럽다. 한 명은 운동부 아이,  다른 한 명은 고함치며 운동부 친구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문장을 해석하고 있고, 또 다른 아이는 자포자기한 듯 멍한 눈이다. 뭔가 잘못되어 감을 눈치채고 소리를 조금 낮추고 천천히라도 각자 돌아가며 하고 최소한으로 도와가며 하자고 다시 한번 타이른다. 그리고 어찌어찌 모둠활동이 끝나고 마지막 활동을 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이 둘이 심하게 싸우고

2교시가 끝나고 3교시 중간즈음, 복도가 어수선하다. 뭔가 일이 생겼나 보다. 자초지종을 대충 들으니 방금 수업을 마치고 나온 반에서 아이 두 명이 심하게 싸우고 다쳤다고 한다. 가슴이 철렁한다. 혹시나 좀 전에 모둠활동이 삐걱거렸던 그 아이들이 아닐까. 다시 알아보니 아이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다.



협동하는 방법을 잊은 아이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모둠활동이 서툴고 힘든 아이들이 있다. 교사로서 하기 싫다는 아이를 그냥 둘 수도 억지로 시킬 수도 없는 난감함이 있다. 코로나 이후, 어쩔 수없이 개별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갈등을 풀어내는 문제해결능력이 현저히 떨어졌음을 느낀다.


아이들만 그런 건 아니다.

전화를 걸어 주문하는 것보다 앱이나 키오스크를 써서 주문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통화버튼을 눌러 하는 것보다 카톡이나 문자로 소통하는 게 더 편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서 층간소음이나 담배냄새 때문에 생긴 크고 작은 싸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와 신문에 기사화되곤 하고. 배려와 양보보다 취향존중과 개성표현이 더 중요한 세상에 살고 있다.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협동학습의 고단함은 우리 사회의 평범함 일상을 엿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생각해 보면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과 의견을 조율하는 성숙한 대화의 기술은 영어단어, 문법 내용보다 시급한데 곧 있을 중간고사 시험 진도가 급해서 하려던 말을 접고 결국 교과서를 펴고 "공부하자"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날 오후, 그런 내가 무기력하게만 보여 그 불편한 감정가시질 않는.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데도 뭔가 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가 지금 뭔가 중요한 것을 빼먹고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수업과 음악방송, 그 사이 어딘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