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와 학교로 흩어졌던 가족의 일상이 다시 섞인다.우왕좌왕 왁지지껄, 오랜만에 시끄럽다. 아침을 준비하는데 막내는 배고프다고 하고, 큰딸은 뭔가를 찾느라고 왔다 갔다 하고 아들은 내게 인사를 안 받아준다고 툴툴거린다. 이렇게 정신없이 동시에 내게 말을 하거나 뭔가를 요구하는 상황에 놓이면 난 정신을 잃고 만다. 잠시 떨어져 쉬고 싶다 혼잣말을 한다.
저녁 산책길
선선한 바람, 춥지 않은 온화한 기온, 은은한 달빛까지 비치면 누군가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싶다. 긴 산책로를 걸을 땐 특히. 지난번에 통화를 못했던 지인이 생각나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잠깐 울리더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멘트가 나온다. '혹시 나를 차단했나?' 순간 쓸데없는 생각까지 한다. 그냥 영화를 보거나 공연관람 중일수도 있겠다. 기다려보자 생각하고 섣부른 판단을 지운다. 부재중 전화 알람이 떴을 텐데도 하루가 지나도 연락이 없다. 괜히 서운하네. 지난번에도 전화를 안 받더니. 그래, 사람사이도 기승전결이 있는 법, 좋았던 때 보고 싶은 때도 있지만 자주 보고 많은 얘기를 듣다 보면 시큰둥해지고 재미없어지고 지겨워지는 때도 있는 거겠지. 괜한 섭섭함을 없애려 애써본다.카톡으로 안부라도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둔다.
거리조절은 힘들어.
가까운 것에서는 멀어지고 싶고 멀어진 것에는 가까워지고 싶은 바보 같은 마음
이렇게 어긋나는 사람과의 거리는 때때로 우울감과 피로감을 남기곤 한다. 한 번에 한 사람만 충분히 함께 할 여유, 멀리 있어도 마음은 가깝게 가까이 있어도 꼭 필요한 예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관계의 묘는 이론은 쉬워도 적용은 어렵다.
최고 난이도 사춘기
난 그냥 혼자 집에 있을래.
주말 아침, 시내구경 가자고 2호 아들에게 말하자, 나른한 표정으로 거부의사를 밝힌다. 아들방에 들어갈 때도 노크 안 하고 들어가면 분노의 역습을 받곤 한다. '지는 안방 들어올 때 노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면서. ' 그러나 혼자만 있고 싶다는 사춘기아이들의 요구를 믿고 그대로 두었다간 낭패를 면치 못한다. 공부할 때 필요하다고 들여준 컴퓨터는 게임 전용이 된 지 오래고, 온라인 수업을 위해 사주었던 패드는 유튜브 시청 전용이 되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관계의 거리조절은 디지털 시대에 살게 되면서 더욱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같이 있으면서도 온라인과의 세상과의 연결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으니까.
인생은 타이밍이야!
오늘 날이 너무 좋다. 혹시 시간 되면 같이 미술관 갈래?
와! 너무 좋은 데요~
딱 맞는 타이밍에 딱 맞는 거리에서 관계의 텔레파시가 통하는 날이 있다. 지독히도 아름다운 가을날, 갈수록 짧아지는 찰나의 계절에 정확한 타이밍으로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푸르고 높은 하늘에 이제 막 색이 물든 가을 단풍이 설레는 계절, 좋은 이 시간에 이우환과 로스코를 보러 다시 왔다. 지난번 헛수고에 이어. 작가 이우환은 자연의 것으로 돌을 가져왔고 인간이 만든 구조물로 철근을 가져왔다. 너무 다른 두 세계를 조우시킨 이 작품의 제목은 "관계항(relatum)". 알맞은 거리에 알맞은 날씨에 너무 다른 두 물체가 마주 앉아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Relatum-Correspondence, 이우환
편안한거리
이우환 그림
빈 여백에 적당한 거리로 위치한 서로 다른 두 형태가 흰화폭에 자리 잡고 있다. 둘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어 안정감 있고 편안해 보인다. 모든 관계가 그러하지 않을까.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게 서로의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만 떨어져 있으면 좋으련만.
사람과 사람이 너무 가까이에 마주하면 얼굴의 주름살, 점, 기미 등 작고 조그마한 단점들까지 다 보여 금방 지치고 만다. 반대로 너무 멀어져 떨어져 있으면 그가 우는지 웃는지 슬픈지 화가 났는지 어떤 표정,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적당한 거리에서 두고 보아야 서로의 모습을 가장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작은 점도 애교로 보이고 흐릿한 미소도 신비감으로 느껴지는 딱 좋은 거리, 적당한 거리유지는 안전한 친밀감과 아련한 그리움으로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현대카드 아트라이브러리
로스코의 그림은 사진으로 남길 수 없어 아쉬움을 안고 나왔다. 하지만 미술관 건너편 아트라이브러리에서 그의 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책을 발견하고는 어찌나 반가웠는지. 그런 면에선 로스코는 밀당에 성공한 셈, 사진 찍지 못하게 하니 더 보고 싶게 만들고 만것이다. 영어로 쓰인 두꺼운 아트북을 붙잡고 형형색색의 로스코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완전 다른 원색을 대비시키거나 흐릿한 경계로 비슷한 색을 겹쳐 그린 그림은 단순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가까이서 볼 때 멀리서 볼 때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그림이야 말로 적당한 거리조절이 필수다. 작품을 가장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간격을 찾아내는 게 미술애호가의 노하우.
가끔 혼자여도 좋은
잠깐 혼자여도 좋은 만남이 좋다. 나의 취향을 기억하고 존중해 주는 센스쟁이 지인 덕분에 고급진 나만의 시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책으로 다시 만난 로스코는 독특한 시선으로 캔버스를 채웠고 보는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시간을 온전히채울 수 있게 해 주었다.
바로 서 있거나 누웠어도
나는 하나, 다른 색의 옷을 입었어도 나는 하나다. 다만 다른 나를 잘 보고 알아챌 수 있는 여유를 찾으며 사는 게 관건이다. 여러 색깔의 나와 잘 지내는 방법 또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일에 빠져있을 때는 나를 잊고 일에만 집중! 일에서 나왔을 때는 원래의 나를 소환한다. 미술관에서 나를 만나면 다채로운 생각으로 변화하고 진화하는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그런 나를 이렇게 글로 정리하면 내 기억창고 적당한 서랍 속에나의 변화를 역사로 간직할 수 있다.
타인과의 거리조절만큼이나 나와의 거리조절도 중요하다. 나와의 거리조절이 잘 되어야 타인을 놓아줄 수도 끌어안아 위로할 여유도 생긴다.나를 잊고 타인하고만 잘 지낼 수는 없다. 내가 온전히 나로 자리 잡고 있어야 타인이 멀어졌다고 실망하지도 않고 가까이 다가온다고 호들갑 떨지도 않을 수 있다. 나와 잘 지낸 하루는 가까운 사람의 전체를 볼 수 있게 하고 단점에만 매몰되지 않을 여유를 준다. 또 멀어진 사람에게는 안부를 묻고 기다려주는 믿음의 시간을 허락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관계에 대해 글로 쓰고 고치다 보니 엉겁결에관계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실천과 적용은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