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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칼날로 가차 없이

중년의 진로수업

by 화요일

가끔 머리에 작은 근심 하나가 씨앗을 뿌리면

생각의 가지가 자라나 사방팔방으로 뻣어나가 온갖 걱정과 가정에 미로처럼 사로잡힐 때가 있다. 마치 <잭과 콩나무>처럼 높게 넓게 그리고 거대한 생각의 그물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상상과 가정을 동원해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면서 내 안의 불안을 키우고 어리석은 생각들에 사로잡혀 소중한 시간을 흘려버리곤 한다.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뭘 잘못했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코팅리 요정사건

코팅리 요정(Cottingley Fairies)은 1917년 영국 코팅리에서 두 어린 소녀, 엘시 라이트와 프랜시스 그리피스가 촬영한 요정 사진 시리즈로, 당시 영국 사회에 큰 논란과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건입니다.

*사건의 배경과 전개

1917년 여름, 9세 프랜시스와 16세 엘시는 코팅리 마을에서 요정들이 자신들과 함께 놀았다는 주장을 하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사진들은 엘시의 아버지 아서 라이트가 촬영했으며, 이후 셜록 홈즈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이 1920년 잡지에 실으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사진의 진위와 영향

코난 도일 등 많은 이들이 사진을 실제라고 믿었으나, 이후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출처: 네이버 AI브리핑

코팅리 요정 사건은 사람들은 사건의 진실보다 믿고 싶은 대로 믿거나 어처구니없는 환상과 가정도 쉽게 믿어버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불필요한 생각을 잘라버려라


No more things should be
presumed to exist than are absolutely necessary.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존재한다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철학적 사유의 방법 중에 '오캠의 면도날(Ockham's Razor)'이 있다. 14세기 영국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윌리엄 오캠이 제시한 이론으로 "불필요한 가정은 면도날로 잘라내라"라고 이야기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면도날로 잘라내듯 모든 가정(假定)을 도려낸 뒤 남는 단순한 것, 그것이 바로 본질이라는 거다.


책 <The curious incident of the dog in the night-time>에서 자폐증을 겪고 있는 크리스토퍼는 환상과 가정을 쫓는 코팅리요정사건을 언급하며 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꼬집으며 '오캠의 면도날'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무엇을 버릴까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려면 선택해야 한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그 선택은 개인의 가치, 객관적인 사실이 좌우한다. 버릴 것은 정확하지 않은 추측, 괜한 호기심과 가정, 통제불가능하고 알 수 없는 걱정이다. 이렇게 거두어 내면 아주 가벼운 사실만 남는다.




마법의 주문
연수를 들으러 간 낯선 곳. 강의 시작 30분 전, 낯선 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 드문드문 앉아 있는 사람들 그 옆에 슬그머니 가방을 내려놓고 앉으며 건넨 말,



날이 많이 시원해졌죠?

네~

(...)



슬그머니 대화를 여는 나의 말에 상대는 대화중단을 암시하는 단답으로 대화를 끝내버린다. 민망하고 당황스러움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 머릿속엔 온갖 가정들이 난무하고 긴 침묵이 공간을 채운다.


더 이상 생각을 키우지 말아야 한다. 그 자리에서 멈추고 생각의 가지를 싹둑 잘라버려야 한다. 불필요한 상념의 꼬리를 때때로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그럴 때는 마법의 주문을 왼다.



그럴 수도 있어.


처음 본 사람이니 상대도 당황스러워 더 이상의 말을 연결하기 힘들었거나, 그 이상의 답이 생각나지 않을 수도 있고. 속으론 친절한 말에 고마움을 느끼지만 어찌할지 몰라 대화를 연속할 수 없었을 수도 있었거나. 아니, 이런 생각도 가정이고 김칫국 마시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저 상대도 '저도 날이 시원해졌다고 생각해요.'라는 말 대신에 동의의 표현으로 '네!'라고 응답한 거 아닌가. 더 이상 뭐가 더 필요하랴.



타인이 아닌 '나'에 주목


아, 내가 당황했구나.
상대가 더 이상 말이 없어 민망했지만 내가 잘못한 건 없어.
선의로 말을 걸어본 건 좋은 시도고
긍정의 답을 받았으니 됐고.
대화는 천천히,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겠지.
그저 흘러가도록 두자.
더 이상 생각은 No!



통제할 수 없는 상황, 타인의 반응에만 주목하면 나는 사라진다. 오로지 타인의 행동에 안절부절못하는 수동적인 내가 있을 뿐. 선의로 대화를 유도한 건 나의 행동이고 그 대화를 연결하는 것은 타인의 몫이다. 괜한 상상으로 잘못된 생각의 미로에 갇히면 안 된다. 타인의 행동에만 집중하면 그 모든 판단의 주도권은 외부에 좌지우지된다. 하지만 '나'자신, 감정과 결핍에서 원인을 찾으면 적어도 나 자신은 더 잘 이해되고 요동치는 불안과 근심을 잠재울 수 있다.


나는 왜 이 일이 서운할까
내 욕망의 뿌리는 어디일까
이 일과 내 감정의 연결점은 어디지?



새로운 일에 집중

어색한 분위기 전환해 보려고 잠시 밖으로 나간다. 복도의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다. 어젯밤 비가 많이 내린 뒤라 상쾌한 공기가 코에 훅~들어온다. 빗물을 머금은 싱그러운 나뭇잎과 나무, 힘찬 발걸음으로 걷는 사람들의 모습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강의실에 들어와 다시 앉는다. 강의가 시작되고 열심히 들으며 필기하다 보니 좀 전의 일은 깨끗이 지워지고 없다.



사실, 생각의 가지치기는 특기야

생각의 꼬리물기가 불필요한 걱정과 연결되면 우울감과 좌절로 이어지지만 생산적인 샛길활동으로 연결하면 역동성과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내 특기는 생각의 가지치기, 샛길 찾기다. 이 특기가 수업, 책과 연결되면 금쪽같은 재능이 되기도 한다. 교과서 대화문에서 발견한 작은 단어, 호기심을 연결해서 활동을 하면 단조로운 수업에 활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VR 헤드셋을 소개하는 대화문을 읽고 진짜 VR 헤드셋을 수소문한다. 학교 구석에 있던 VR헤드셑을 찾아와 담당자로부터 사용법을 배우고 수업시간에 바로 활용한다. 대화문을 읽고 실제로 VR체험을 하며 역할극을 하도록 하니 아이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난다. 어느새 아이들은 자기도 직접 체험해 보겠다고 줄을 길게 늘어섰다.

VR 헤드셑 체험




그때그때 달라요~

생각의 가지치기는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근심과 걱정 앞에서는 가차 없이 가지를 쳐서 잘라내고, 재미와 상상이 필요할 때는 멀리 넓게 생각의 가지를 쭉쭉 펼쳐내야 한다. 한때는 내 이런 재능이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웠었다. 작은 말과 행동에 쉽게 상처받고 우울해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상담, 독서와 수업 속에서는 보석 같은 재능이 되었다. 아이들의 작은 변화와 행동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챙기고 돌보거나 미리 위험을 감지해 예방하기도 하니까. 특히, 똑같은 교과서를 가르칠 때는 재밌는 호기심에 상상을 더해 수업을 다채롭게 꾸미는게 얼마나 재밌는지, 다들 알랑가몰라~


새로운 가르칠 단원은 탐정이야긴데
재미난 샛길활동을 어떻게 해볼까?
보드게임, 클루(clue)를 해볼까.
경찰과 도둑 게임을 해볼까.
단어를 숨겨두고 보물 찾기도 재밌겠다.

(재밌는 상상이 이어진다.)





#라라크루13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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