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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온 뒤 행복지수 Feb 05. 2022

견딤 끝에 찾아오는 것들

영국 여왕은 물집 방지를 위해 자기 대신 다른 사람에게 새 구두를 4주 동안 길들이게 한다고 한다. 여왕이 신는 구두는 신는 순간부터 편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도 구두 길들이기 도우미가 꽤 필요하지만, 이번 생은 여왕으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고통을 몸소 감수하며 새 구두를 스스로 길들여 본다. 아픔을 참고 구두를 많이 신고 다닌 경험으로 일컫는 바, 새 구두로 인해 발에 물집이 잡히고 아무는 과정은 대충 이러하다. 가죽이 유난히 단단하고 뻣뻣한 새 구두를 신을 때면 얼마 못가 발뒤꿈치가 쓸리고 까져 구두 뒷부분이 옅은 피로 물든다. 까진 발뒤꿈치에는 한동안 선홍색 피가 고이다가 물집이 잡히고, 얇은 피부 껍질이 벗겨지고 갈라지길 반복하다가 조금의 굳은살이 배긴다. 미용상엔 별로지만 보호막 역할을 해주는 굳은살이 배기고 나서는 웃기게도 새 구두를 길들이는 일이 조금은 덜 고통스러워진다. 발뒤꿈치가 굳은살이라는 단단함을 얻으니, 새 구두의 가죽은 점차 부드러움을 얻는다.


나에겐 안타깝게도 구두 길들이기 도우미가 없지만, 그래서인지 아픔이 지나간 자리엔 굳은살이 배긴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리고 아마 이러한 현상은 마음에도 적용이 가능할 것이다. 아픔이 지나가고 굳은살이 배길 때 즈음 편안함에 다다른다는 건, 마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지 않나. 유약하게 말랑말랑하던 마음이 세상사에 부딪히다 보면 어느새 견딤의 보상으로 단단한 갑옷을 얻듯. 이런 의미로 볼 때, 아픔이란 앞으로 다가올 것들의 편안함을 위한 초석 같은 존재다. 다만,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마음에 배긴 굳은살을 머리로써 인지해야 한다. 나는 그런 견딤 끝에 찾아오는 것들에 대해 예의를 차리려 한다. 인정하려 한다, 나는 비로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이 굳은살이라는 단단함을 얻으니, 마음이 맞서는 일들은 점차 길들여져, 부드러움을 얻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끝내 편안함에 다다를 것이다.


사실 어느샌가부터 구두보다는 운동화가 좋다. 신발도, 그 신발을 신고 만나는 사람들, 그 신발을 신고 거니는 곳들도, 화려함보다는 편안함이 좋아지는 게 나이를 먹는다는 걸까. 확실히 화려함을 추구하던 20대 초반과는 다르다. 나는 이제 그만 구두를 벗어던지고, 당신과 함께 운동화를 신고 싶다. 내 발에 꼭 맞아 편안한, 열심히 길들일 필요도, 가까스로 굳은살을 문댈 필요도 없는 운동화를 신는다. 눈앞에 뜻밖의 오르막길이 나타나도, 별 거 아니라며 힘차게 오를 준비를 한다. 내가 마침내 편안한 개체로 존재할 때, 우연처럼 찾아온 당신은 그런 나의 가장 나다운 모습을 바라봐 주길. 온몸으로, 온몸으로 견디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 신발이 끌고 다니는 세상에 이윽고 편안함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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