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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가의 꽃 Dec 02. 2022

지문과도 같은 꽃

얼마 전 "어느 가수는 목소리가 지문 수준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목소리가 그 가수의 정체성을 바로 대변해줄 만큼 그만의 특징이 뚜렷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최근 여권 갱신과 인감증명서를 제출해야 할 일이 있어 지문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어야만 했다. 그때마다 직원들로부터 열 손가락 모두 기존 등록된 지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두 번 모두 다른 방법으로 신원을 확인했어야만 했다.

직원들 말에 의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지문이 옅어지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내가 그런 케이스인 것 같다며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지문을 등록하고 신분증을 재발급받으라고 하셨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문을 확인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왜 갑자기 지문이 일치하지 않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최초 등록된 지문은 고등학교 2학년, 주민등록증을 처음 발급받을 때쯤 일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주민등록증을 분실하였고 재발급받지 않은 채 운전면허증을 신분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손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신체  유일한 장점은 손이라고 말하고 다닐 만큼 손이  고운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주한 내손은 상처투성이에 건조해서 손끝은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그리고 열 손가락 지문 모두 자세히 보아도 인식이 되지 않을 만큼 희미해져 있었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문과 함께 정체성도  흐릿해져 버린 듯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뚜렷했던 지문이 옅어지고 10년 가까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정체성이라고 믿었던 꽃도 언젠가부터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너의 지문과도 같은 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예전이라면  그 꽃 이름과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공간에 그동안  써내려 왔던  꽃들에관한 나만의 이야기들이 증명하듯 말이다.


하지만 요즘의 나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한참을 애먼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것만 같았다.내 안의 모든 힘을 다해 좋아하고  동경해서  마치 나 자신과 동일시했었던 존재가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흩어져가는 내 자신을 붙잡을 의지도 잃어버린 채, 허무함과 상실감을 견디며 지금의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 공원을 하염없이 거닐다 앙상한 나무 아래 수북이 쌓인 낙엽 근처에서 반짝하고 빛이 비쳤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지막한 키의 보랏빛 제비꽃이다

3월이 어서야나 얼굴을 드러내는 제비꽃이  추운 날씨에  홀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짠하고 기특해 한참을 들여다보고 사진에 담았다.


나의 브런치 작가 명이기도 한 '길가의 꽃'이 바로 이 제비꽃'이다.

제비꽃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글을  썼었다.

어떠한 환경, 어떠한 장소에도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무던하고도 담담한 제비꽃처럼 살고 싶었다.


내 지문과도 같은 꽃은 바로 내가 되고 싶었던 제비꽃이었다.

내 정체성이 되길 바랐던 꽃이 이 한파에 내 발아래서 빼꼼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나처럼 너도 이 겨울을 같이 견뎌보자라는 무언의 메시지 같았다.


회색빛 공원에  홀로 반짝이던 한송이의 보랏빛 제비꽃을 오랫동안 나는 잊을 수없을듯하다.

내가 나 자신을 서서히 지워버리고 있던 어느 날,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이 작은꽃이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나를 내년 봄까지 견디게 해 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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