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가수는 목소리가 지문 수준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목소리가 그 가수의 정체성을 바로 대변해줄 만큼 그만의 특징이 뚜렷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최근 여권 갱신과 인감증명서를 제출해야 할 일이 있어 지문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어야만 했다. 그때마다 직원들로부터 열 손가락 모두 기존 등록된 지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두 번 모두 다른 방법으로 신원을 확인했어야만 했다.
직원들 말에 의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지문이 옅어지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내가 그런 케이스인 것 같다며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지문을 등록하고 신분증을 재발급받으라고 하셨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문을 확인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왜 갑자기 지문이 일치하지 않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최초 등록된 지문은 고등학교 2학년, 주민등록증을 처음 발급받을 때쯤 일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주민등록증을 분실하였고 재발급받지 않은 채 운전면허증을 신분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손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신체 중 유일한 장점은 손이라고 말하고 다닐 만큼 손이 꽤 고운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주한 내손은 상처투성이에 건조해서 손끝은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그리고 열 손가락 지문 모두 자세히 보아도 인식이 되지 않을 만큼 희미해져 있었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문과 함께 정체성도 흐릿해져 버린 듯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뚜렷했던 지문이 옅어지고 10년 가까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정체성이라고 믿었던 꽃도 언젠가부터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너의 지문과도 같은 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예전이라면 그 꽃 이름과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공간에 그동안 써내려 왔던 꽃들에관한 나만의 이야기들이 증명하듯 말이다.
하지만 요즘의 나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한참을 애먼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것만 같았다.내 안의 모든 힘을 다해 좋아하고 동경해서 마치 나 자신과 동일시했었던 존재가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흩어져가는 내 자신을 붙잡을 의지도 잃어버린 채, 허무함과 상실감을 견디며 지금의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중이다.
며칠 전 공원을 하염없이 거닐다 앙상한 나무 아래 수북이 쌓인 낙엽 근처에서 반짝하고 빛이 비쳤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지막한 키의 보랏빛 제비꽃이다
3월이 되어서야나 얼굴을 드러내는 제비꽃이 이 추운 날씨에 나 홀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짠하고 기특해 한참을 들여다보고 사진에 담았다.
나의 브런치 작가 명이기도 한 '길가의 꽃'이 바로 이 제비꽃'이다.
제비꽃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글을 썼었다.
어떠한 환경, 어떠한 장소에도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무던하고도 담담한 제비꽃처럼 살고 싶었다.
내 지문과도 같은 꽃은 바로 내가 되고 싶었던 제비꽃이었다.
내 정체성이 되길 바랐던 꽃이 이 한파에 내 발아래서 빼꼼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나처럼 너도 이 겨울을 같이 견뎌보자라는 무언의 메시지 같았다.
회색빛 공원에 홀로 반짝이던 한송이의 보랏빛 제비꽃을 오랫동안 나는 잊을 수없을듯하다.
내가 나 자신을 서서히 지워버리고 있던 어느 날, 나를 올려다보고 있던 이 작은꽃이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나를 내년 봄까지 견디게 해 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