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대학교. 2012년 경원대학교와 가천의과대학이 통합한 사립대학으로 수도권에서 가장 부상하는 대학으로 주목받고 있다. 짧은 시간에 경쟁력 있는 사립대학으로 떠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길여(李吉女, 1932~ ) 총장의 리더십이 아닐까 싶다. 이 총장은 의사 출신의 대학 총장이다. 그는 의료보험제도가 없던 시절 생계가 어려워 '병원에서 주사 한 대 맞으면 원도 없겠다'라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들에게 보증금을 받지 않고 수술한 병원으로 잘 알려졌다. '보증금을 받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병원 입구와 수납 창구에 써 붙였다.
이길여 총장에 대한 많은 기사와 인터뷰 그리고 그에 대해 쓴 책들을 읽어보고 느끼는 것은, 이 총장은 한마디로 남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가슴 따뜻한 리더라는 점이다. 따뜻한 일화가 있다. 산부인과 의사 이길여는 청진기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청진기는 차가운 금속체로 만들어졌다. 그는 환자의 신체 부위에 청진기가 닿을 때마다 환자가 움찔하거나 놀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청진기를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체온으로 덥혔다. 예민한 산모가 차가운 고무장갑에 놀라지 않도록 내진 전에 따뜻한 소독물에 담가 놓는 것은 기본이었다. 환자를 배려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보면 저절로 병이 치료될 것 같다.
2024년 정부와 의료계가 의대생 증원 규모를 놓고 진통을 겪고 있다. 의료계에서도 의대생 증원이라는 대의에 대해서는 찬성하고 있지만 규모와 방법을 놓고 정부와 첨예한 이견을 나타내고 있다. 의대 재학생까지도 휴학계를 제출하는 등 배수진을 치면서 유급 걱정을 하는 형편에 이르게 되었다. 한 치의 양보가 없는 극한의 대립이다. 이런 상황에서 4월 8일 이길여 가천대 총장이 가천의과대학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선배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진솔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장문의 편지 내용을 간추려본다.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기에 정말 숭고합니다.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사회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만 무거운 사회적 책임 또한 뒤따릅니다. 여러분은 그 숭고한 의사의 길을 선택했고,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환자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환자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의 희생도 감수하는 것 또한 의사의 숙명이라는 것입니다. (...) 지금의 상황이 너무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겠지만, 6·25 전쟁 당시 포탄이 날아드는 교실에서도, 엄중한 코로나 방역 상황에서도, 우리는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겐 모두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배움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이번 사태는 정부와 의료계 선배들이 지혜를 모아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여러분은 이럴 때일수록 학업이라는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의사 출신 이길여 총장이야말로 의대생들에게 학업 복귀를 촉구하는 편지를 쓸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다른 대학의 총장이 이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 의대생들의 학업 복귀를 설득했다면 당장 총장 퇴진 운동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구순을 넘긴 이 총장이 학생들을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가를 잘 알고 있기에 이 편지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하철 가천대역 1번 출구 앞 분수광장에는 “학생이 왕이다”라는 현수막을 걸어놨다. 이길여 총장은 “학교는 왕으로 모실 테니 너희는 왕답게 리더가 되라는 의미를 전하고 싶었다, 학생이 어려서부터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게 해주고 싶다”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1998년 경원대를 인수한 그는 낡은 책걸상부터 바꿨다. 학생들이 샘플 의자에 직접 앉아보고 선택하게 했다. 가천대 캠퍼스에서는 진귀한 풍경을 볼 수 있다. 무당벌레 모양의 소형 전기버스 ‘무당이’가 캠퍼스를 돌아다닌다. 이 총장이 “학생들이 오르막길 오르는 게 안쓰러워서” 만든 것이다. 이 총장은 학생을 제대로 가르치고 키우는 일을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한다. 학생중심의 대학경영의 철학이란 무엇이고 그 실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리더십의 진수는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다. 무엇보다 어려운 고비마다 선배 어른들이 길을 밝혀 후배들에게 손을 내밀고 이끌어주어야 한다. 교육계의 원로들은 다 어디로 갔다 말인가. 위기 상황에서 학생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대안 제시를 마다하지 않는 이길여 총장의 리더십이 돋보인 이유다. 자신의 직을 걸고 언제든지 그 자리에서 내려올 준비가 되어있는 리더라야 가능한 일이다. 이길여 총장의 호는 가천(嘉泉), 즉 '향기롭고 아름다운 샘'이라는 뜻이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리더십을 발휘하는 이 총장을 바라보면서 사회의 원로가 지향해야 할 언어와 처신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남윤서. (2024). 중앙일보. "먹튀해도 붙잡지마라" … 이길여가 'X' 표시한 환자의 정체. 3월 12일.
정순태. (2008). 월간조선. 길병원 50주년 맞은 이길여 가천의과대 총장.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