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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May 14. 2024

나의 교육철학③_덕승재(德勝才)

결국 덕(德)이 이긴다.

왕조시대의 왕이 나랏일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백성에게 불편을 끼친 상황이 되면 으레 "과인의 부덕(不德)하여 생긴 일이다"라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조직이나 기관의 장이 중요한 일을 그르쳤을 때 "제가 덕(德)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라고 말한다. '부덕의 소치'는 최고책임자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변명 아닌 변명이다. 덕(德)이 무엇인데 덕이 없거나 부족해서 일을 그르쳤다고 변명의 말을 하는 것일까? 문제의 근원을 덕 탓으로 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자 덕(德)은 ‘은덕’이나 ‘선행’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로, '덕이 있다'는 말은 '곧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선행을 베풀며 사는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다. '덕이 없다'라고 하는 말은 '선행이나 은덕을 베푸는 곧은 마음이 부족하다'는 이해할 있다. 덕은 무형의 인격적인 능력으로 덕을 행동으로 옮기는 덕행(德行)은 통치자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공자는 덕치주의(德治主義)를 이상적인 통치로 보았다.


국회에서는 주요 공직 후보자의 자질을 사전에 심사하기 위하여 인사청문회를 개최한다. 청문회에서는 후보자 개인의 신상은 물론 후보자의 과거의 행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인사청문회에서 후보자 중 십중팔구는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오죽했으면 청문회를 거치지 않은 고위공직자를 선호한다고 하겠는가. 후보자는 청문회 과정에서 문제가 된 사안에 대해 국민에게 이렇게 사과한다. '인덕(人德)이 부족하여 잘 살피지 못했다. 사죄드립니다.' 인덕(人德)'이 '있네', '없네'라고 할 때 인덕은 무엇인가? 인덕은 주위에 능력이 있거나 필요한 사람이 와서 오랫동안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덕은 자석과 같아 사람을 붙잡고 머물게 한가 보다. “덕으로써 하는 정치는 마치 북극성이 그 자리에 있으면, 여러 별들이 그 북극성을 중심으로 향해서 도는 것과 같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누군가 일을 하는데 능력 있는 사람이 모여들어 일을 달성한다면 그 사람은 인덕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덕을 가진 사람에 대한 보기를 들어보자. 드라마 <구암 허준> 116회에서는 의주로 몽진(임금의 피난)을 간 선조는 기력이 허약해져 병이 났다. 어의 허준은 약재만 넉넉하면 임금의 병세를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약재가 없거나 부족했다. 이때 허준에게 천군마마와 같은 동생뻘 지인들이 침향을 들고 찾아온다. 그들은 전쟁통에 돈을 벌어 명나라에서 가져온 침향을 구했고 허준이 약재가 없어 노심초사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귀한 침향을 가져온 것이다. 인덕이 자석과 같아 사람을 오게 만들고 붙잡아 놓는다는 말이 맞는 것이다. 


국가의 최고통치자부터 고위공직자에 이르기까지 일이 잘못되면 하나같이 덕(德)이 없거나 부족한 것을 성찰하고 국민 앞에 사죄한다. 덕이란 그만큼 쌓고 유지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덕이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다움의 결정체지만 완전한 덕이란 있을 수 없는 추상적인 의미다. 인간은 완전한 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배우고 실천하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다. (지식)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거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도 덕을 쌓는 방법이다.


저자의 교육철학이 교학상장과 줄탁동시라고 한다면, 추구하는 인재상은 덕승재(德勝才)이다. '덕이 재주를 앞서야 한다'라는 것이다. 재주와 덕을 두루 갖춘 재덕겸비(才德兼備)의 인재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교육은 지식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함양을 통해 덕을 키우는 것이다. 지식이 재능이나 재주라고 한다면 덕은 인격이다. 재능이나 재주가 어떤 사태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자체를 의미한다면, 덕성은 이러한 재능이 바른 방향으로 쓸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덕승재 위지군자(德勝才 謂之君子), 재승덕 위지소인(才勝德 謂之小人)이라 했다. 즉, '재주보다 덕으로 행하면 군자요, 덕이 아닌 재주로 행하면 소인이다'라는 뜻이다. 재승덕박(才勝德薄, 즉 '재주는 많지만 덕이 부족한 인간'을 경계할 일이다. 재주가 많거나 높은 사람을 재주꾼이라고 한다. '덕꾼'이란 말은 없다. 덕이 없는 재주꾼은 보이지 않은 위해(危害) 무기를 지니고 다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흔히 우리나라 교육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교육목표는 지육(智育), 덕육(德育), 체육(體育), 즉 지덕체가 조화를 이룬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다. 우리 교육에서 지, 덕, 체는 교육의 우선순위가 되었다. 저자는 교육목표의 우선순위는 체, 덕, 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체력은 학생은 물론 누구에게나 중요한 덕목이라는 점에서 최우선적으로 강조되어야 할 교육목표일 것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란 말은 자명한 진리다.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보자. 지육을 강조하는 학교는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열대 정글이 되었다. 학교는 마치 열대 정글에서 광합성 작용을 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키높이 경쟁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키 큰 나무는 키가 작은 나무가 죽든 살든 관심 없다. 어른들은 요즘 청소년이 이기주의라고 탓만 할 일이 아니다. 정책을 수립하고 제도를 만든 어른들의 성찰이 우선이다. 감수성이 민감한 청소년기에 따뜻한 심성과 재능을 겸비한 재덕겸비의 인재로 성장해 나가야 하는데, 차가운 머리를 집중적으로 단련하다 보니 공동체와 이웃을 생각하기보다 이기주의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지식을 강조하는 현행 학교는 일부를 제외하고 다수의 아이들을 부적응 아이로 만들고 있다. 청소년들의 학교 일탈행동이나 높은 자살률도 지식위주의 교육체계와 무관하지 않다. 지나치게 지식 경쟁을 강조하는 학교에서 경쟁에서 밀려난 청소년들은 사회에 진출하는 진입장벽이 높게 느껴지고 우울감이나 좌절감이 커지면서 일탈 행동을 하거나 자살 충동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어린 청소년들이 어른들이 구축해 놓은 제도의 덫에 걸려 그들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좌절하거나 그들의 생명을 내던지는 지경에 이른다고 생각하면 복장이 터질 일이다.


학교가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곳이 된 지 오래다. 누가 많이 알고 있나를 평가하는 학교와 교실은 냉전(冷戰)의 축소판이다. 차가운 머리를 굴리는 소리로 가득 차있다. 줄을 세워 등수를 매기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즉 마치 정글에서 광합성 작용을 잘하기 위해 키가 큰 나무만이 칭찬과 상을 받는 오늘날의 학교는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학습공동체와는 거리가 멀다. 우정, 신뢰, 배려, 관용, 양보와 같은 덕이 설 자리가 없다. 줄을 세우는 학교에서는 덕은 있지만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학교 우등생이 사회 우등생이 되란 보장이 없는데도 말이다. 학창 시절의 교과성적이 인생성적표는 아니다. 학교는 '아이들은 크면서 열두 번도 바뀐다'라는 말을 믿어야 한다. 


매년 대학입시가 끝나면 교문에는 명문대에 누가 합격했다는 소식을 알리는 현수막을 건다. 학교에서는 그런 것 걸지 말아야 한다. 명문대를 제외한 그 밖의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관심은 없다. 학교는 앞 줄에 선 소수 몇 명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다. 왜, 모두를 위한 학교(school for all)가 다수의 아이들을 패배자나 낙오자로 낙인찍어야 한단 말인가. 학교에서 공부 좀 했다는 우등생이 사회에 나가 승승장구하다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가. 그 범죄자가 현수막에 이름 적힌 우등생일 수도 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감옥은 가깝다'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다. 학교는 아이 하나하나를 고유한 인격체로 대하고 그들의 삶을 그들의 인생항로를 멀리 보아야 한다. 


학교에서 사회에 진출하는 예비 사회인에게 지적으로 높은 수준의 능력을 갖춰 내보내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인간다움 내지 인간성을 고양하는 노력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 아이들의 내면에 덕생지, 즉 '덕이 지보다 우선이다'라는 신념이 자리 잡게 해야 한다. 국어, 영어, 수학 등 진학에 필요한 핵심과목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인문교양교육에도 필요한 시간을 배정해야 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인문교양과목에 관심이 떨어지는 만큼 그것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학교가 스스로 아이들의 인간다움보다는 '어떻게 줄을 세울 것인가', '누가 앞 줄에 서있는가'에 매몰되어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전통을 비판하고, 타인의 고통과 성취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온전한 민주시민이 아니라, 곧 유용한 기계일 뿐인 세대를 생산하고 만다"(누스바움, 2011: 23-58).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말이 있다. 줄인 말로 '덕필유린(德必有隣)'이라고도 한다. '덕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는 이들이 생겨 외롭지 않다'라는 뜻이다. 덕행을 하면 좋은 친구와 이웃이 함께 하게 된다. 우리 사회도 정이 메마르고 각박해졌다고 하지만 알게 모르고 덕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 살만한 사회가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덕필유린'의 원리는 통한다. 덕을 베풀고 생활하는 아이들은 좋은 친구들이 주변에 모여들고 돈독한 교우관계를 맺을 수 있다. 결국 덕이 이긴다. 덕은 외롭지 않다. 덕의 위대성이다. 덕승재가 백년대계의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누스바움. 마사. (2011).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우석영 옮김. 파주: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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