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 담장을 감싼 데이비드 오스틴 장미가 개화할 때면 우리 집은 전혀 다른 색깔의 집이 된다. 식재(植栽)하고 3년째 된 장미가 크림색의 꽃망울을 터트리며 오가는 사람의 시선을 붙잡아 놓는다. 장미꽃이 한창 피기 시작하면 어제와 오늘의 장미꽃이 다르다. 장미꽃을 보려고 여명이 시작되기 전에 정원을 서성인다. 우리 집 장미는 여느 장미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장미꽃이 개화하기까지 주인의 노고는 생각보다 크다.
탐스럽고 아름다운 장미꽃을 보려면 다양한 측면에서 세심한 돌봄이 필요했다. 월동을 준비하고 거름을 주고 전지를 하고 해충(害蟲)을 잡아주고 줄로 묶어주는 일련의 과정이 빈틈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장미에는 해충이 많다. 장미 특유의 향기 때문인지 ‘장미등에잎벌’, ‘장미흰깍지벌레’, ‘딱정벌레’, ‘응애류’ 등 다양한 병충이 장미의 정상적인 생육과 개화를 방해한다. 처음에는 농약을 하지 않고 손으로 일일이 벌레를 잡기도 했지만 감당하기 어려웠다. 손으로 벌레를 잡은 아내의 손은 그야말로 장미 잎처럼 새파랗게 물이 들었다(아내는 장갑을 끼고 벌레를 잡으면 꽃봉오리를 다칠까 염려하여 맨손을 사용한다). 제일 속상한 것은 깍지벌레가 꽃봉오리 바로 밑에서 기생하다 즙을 빨고 나면 꽃받침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피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꽃봉오리를 볼 때마다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른다. 이 정도면 몰아일체(沒我一體)의 경지가 아닌가 싶다.
다행스럽게도 올해 장미꽃이 만발하였다. 작년에 비해 일주일 먼저 꽃이 피었지만 꽃은 활기가 넘친다. 오스틴 장미의 매력을 알게 된 동네 사람과 지나는 사람들도 가는 길을 멈추고 장미를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우리의 헌신과 노고의 결과로 만개한 장미에 대해 질문을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그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은 더 기분 좋은 일이다.
오스틴 장미는 사계절용이다. 적절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연달아 개화한다. 전문용어로 ‘자기 유도형 식물’이라고 한다. 장미 스스로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생육을 조절한다. 작년에는 눈을 뒤집어쓰고도 꽃이 피었다. 대단한 생명력이다. 장미 가지 하나에 열 개 가까이 꽃봉오리가 달리는데 이들이 순차적으로 꽃망울을 터트린다. 장미꽃잎이 버티는 힘이 빠져 떨어질 때, 즉 장미꽃잎이 유영(遊泳)하거나 낙화(落花)할 때는 그 꽃봉오리의 꽃받침을 미리 꺾어주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다. 힘이 빠진 꽃봉오리가 꽃필 준비를 하는 다른 봉오리에게 필요한 광합성 작용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핀 꽃잎이 뒤에 필 꽃잎을 위한 희생이다. 담장을 빙 돌며 활력을 잃은 꽃봉오리를 맨손으로 꺾으면서 느끼는 그 감촉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이스크림보다 더 감미롭고 비단결보다 부드러운 촉감이다. 손에 가득 쥔 꽃잎을 이리저리 만져 보며 촉감을 오랫동안 간직하고자 한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즉 오랫동안 잊지 말자는 약속이다. 사람들이 장미를 계절의 여왕이요 꽃 중의 꽃이라고 부르는 줄 이해된다. 장미 가시에 찔려 아파하면서도 장미를 돌보는 이유를 알게 된다.
장미에 날카로운 가시가 없다면 장미꽃의 가치는 반감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장미는 생태적으로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장미꽃을 꺾을 수 없게 했다. 장미꽃을 감상하지만 꺾지는 말라는 것이다. 무언의 경고를 무시하고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본 사람은 그 교훈을 알게 된다. 장미가시는 인간의 존재와 삶의 의미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장미가시는 곧 우리의 삶을 아프게 하는 많은 이유에 해당한다. 김승희 시인은〈장미와 가시〉에서 장미가시에 인간의 존재와 삶을 대입시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오.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장미가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고난이고 아픔이고 상처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헤매는 지경에 이를 정도의 만신창이가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뭐지? 왜 이렇게 힘들지?” “도대체 삶이란 뭐지?”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는 것이지?” 등등의 질문을 던지며 아픔과 상처를 쓰다듬고 토닥이며 회복되길 기다린다. 내 삶에서 장미꽃은 언제 필 것인가를 고대한다. ‘장미꽃’은 곧 희망이고 밝은 미래다. 우리는 ‘낙관적이거나 희망적인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를 장밋빛 미래(a rosy future)라고 한다(장미의 꽃말은 ‘사랑’, ‘순결’을 의미한다. 그 많은 꽃 중에 왜 장미꽃이 희망이나 미래와 연결하는지 모르겠지만, 장미꽃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에게 희망과 미래가 없는 삶은 살아 있지만 죽은 껍데기나 마찬가지다. 시인은 그 희망의 징표를 가시투성이에서 핀 장미를 보고 싶단다(마치 노아의 홍수 때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온 비둘기처럼 말이다).
장미를 심고 가꾸고 장미꽃을 보고 느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저자는 장미처럼 한 가지 꽃을 놓고 절대적인 관심과 사랑을 쏟아본 적이 없다. 장미를 통해 자연의 이치나 섭리를 조금 더 알고 느끼게 되었다. 저자에게 이제까지 자연은 알기 위한 공부이거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대상이었지 않았나 쉽다. 현대 환경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1907∽1964)의 말은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소한다. 철학으로 삼을 만하다.
어린이에게나, 어린이를 인도해야 할 어른에게나,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자연과 관련한 사실들은, 말하자면 씨앗이다. 그 씨앗은 나중에 커서 지식과 지혜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서 느끼는 이런저런 감정과 인상은 그 씨앗이 터를 잡아 자라날 기름진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유년 시절은 그런 기름진 땅을 준비할 시간이다. 아름에 대한 감수성, 새로운 것, 미지의 것에 대한 흥분과 기대, 공감, 동정, 존경, 사랑……. 이런 감정들이 기름진 땅을 이루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사물에 대한 지식을 올바르게 추구할 수 있다. 한번 형성된 그러한 기름진 땅은 어린아이의 곁을 평생 떠나지 않은 착한 요정이 될 것이다(카슨, 1956: 53 재인용).
기름진 땅에 씨앗을 심었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의 감성이 기름진 토양을 이루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 새로운 것에 대한 흥분과 기대, 공감, 동정, 존경, 사랑 등을 일으킨 사물에 대한 지식을 올바르게 추구할 수 있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씨앗을 뿌리고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장미를 생육 과정을 관찰하면서 과연 나의 감성은 얼마나 기름진 토양인가를 생각한다. 장미여! 그대를 통해 자연의 경이로움이 나의 감성이란 토양을 더 기름지게 해 줘 고맙다. 나란 존재는 나의 삶이나 누군가의 삶에 ‘장미꽃’인가, 아니면 ‘장미가시’인가……. 만발한 장미꽃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넋을 놓다 정신을 가다듬고 삶의 의미를 반추한다. 바라기는 저자도 누군가의 삶에 ‘장밋빛’ 희망이 되면 좋겠다. 장미가 자연의 경이로움은 물론 이 정도의 가치와 철학을 깨닫게 해 주었다면 이제까지 수고한 대가로서 보람과 성취감은 충분하지 않겠는가.
카슨, 레이첼. (1956).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표정훈 옮김. 서울: 에코리브르.
카슨, 레이첼. (1962). 《침묵의 봄》. 김은령 옮김. 서울: 에코리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