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치 동반자
저자는 바둑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바둑은 취미를 넘어 삶의 의미까지도 되새김질하게 하는 둘도 없는 벗이요 소중한 가치 동반자이다. 저자는 우연히 바둑을 알게 되었다. 저자에게는 두 분의 숙부님이 계셨는데 두 분 모두 바둑을 좋아하셨다. 도시에 살던 숙부님들이 제삿날을 기념하거나 명절을 지내기 위해 고향에 오시는 날이면 바둑으로 날을 샜다. 저자도 어깨너머로 바둑 놓는 것을 보고 그 원리를 알게 되었다. 막내 숙부님이 기력이 제일 셌는데 기원(棋院)에 출입하며 실력을 기르셨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저자가 숙부님들과 바둑을 두고 싶다고 하면 숙부님들은 여러 점을 놓고 두는 접바둑이 내키지 않으셨는지 좀처럼 대적을 해주지 않으셨다. 현격한 실력 차이가 나 재미없었을 것이다(대국자들의 심리는 자기보다 상수하고 바둑을 두면서 수를 늘리길 바란다). 몇 번 간청을 드린 끝에 드디어 대국 허락을 받았을 때는 날 듯이 기뻤다. 지금도 기억이 뚜렷하다. 저자가 다섯 점을 놓고 막내 숙부님과 바둑을 두었다(숙부님은 처음에는 여섯 점을 깔았으면 했지만, 저자가 우겨 다섯 점으로 낙착됐다. 혈기 충천한 아마추어 기사가 산전수전 겪은 노련한 프로기사에게 겁 없이 도전하는 모습을 방불케 했다). 초중반 형세는 접바둑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저자 바둑의 형세가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저자는 이번 판에서 이기면 치수(置數, 바둑에서 기력(棋力)의 정도에 따라 누가 먼저 둘 것인가를 정하는 기준. 호선(互先), 선상선(先相先), 정선(定先), 선을 겸하는 접바둑, 접바둑의 다섯 가지가 있다.)를 네 점으로 내려달라고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바둑, 특히 접바둑에서 사달은 종반전에서 나타난다. 저자는 숙부님의 승부수에 말려 다 이긴 바둑을 지고 말았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친 셈이다. ‘잡은 고기를 놓치면 그 고기가 더 크게 보인다’라는 격언이 있는 것처럼 상대가 돌을 던져도 괜찮은 바둑을 놓쳤으니 억울하고 분하기까지 했다. 마치 마술을 부리듯 저자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판을 흔들었다(상대의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둑 용어로 ‘흔들기’에 해당한다. 흔들기는 주로 자신의 바둑이 불리할 때 사용하는 고차원의 전략으로 바둑 실력이 뛰어나다는 증거다. 웬만한 실력으로는 판세를 전환하는 데 필요한 흔들기를 잘할 수 없다. 흔들기를 잘못하면 ‘제 도끼에 제 발을 찍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숙부님은 고수(高手) 답게 흔들기로 종반 역전에 성공하였다). 그때 하수였던 저자는 숙부님의 흔들기를 신사적인 플레이로 보지 않았다.
저자는 바둑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바둑책을 살 형편은 아니었다. 형들과 동네 선배들의 바둑책을 빌려 봤다. 수학 공식이나 영어 문법을 알아야 기본기가 탄탄하고 응용력이 높아지듯이 바둑도 마찬가지였다. 바둑의 기본 정석을 익히기 위해 반복 학습을 했다. 바둑 정석을 어느 정도 익힌 다음 숙부님에게 다시 도전했다. 문제는 숙부님이 정석대로 두어주지 않았다. 정석을 정석대로 두지 않고 중간에 변칙을 구사했다. 정석이 태권도의 약속 대련이라면 정석에 변칙을 구사하는 것은 자유 대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석은 정석대로 익혀야 하지만 정석을 응용한 다양한 응용 정석도 익혀야 했다. 바둑이 처음으로 어렵게 느껴졌다. 바둑에 정나미가 떨어져 바둑 공부를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이제까지 바둑을 위해 투자한 시간이 아까웠다. 매몰 비용(sunk cost, 어떤 선택의 번복 여부와 무관하게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가리키는 말. 처음의 선택을 바꾸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비용은 대체로 회수할 수 있는 기회비용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까워서라도 그만둘 수 없었다.
저자는 바둑 외에는 취미가 맞지 않았다. 70, 80년대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취미와 놀이는 당구였다. 당구를 치려면 당구장으로 가야 하고 비용 또한 부담이었다. 바둑은 바둑판만 있으면 캠퍼스의 의자나 잔디에서도 둘 수가 있었다. 자취방이나 하숙집에서도 둘 수가 있었다. 바둑 동아리에 가입하면 바둑 친구(棋友)도 사귈 수 있었다. 실력을 검증받을 목적으로 기원을 찾아 바둑을 두기도 했지만, 기료(棋料)를 내야 하고 무엇보다 담배 연기를 참을 수 없었다(기원에는 아마추어 강자가 상주하며 주로 내기바둑을 두었다. 무협지 주인공으로 비유하면 시내 기원에는 무림의 고수들이 즐비했다).
80년대 학번인 저자가 학교 다닐 때 시국은 어수선했다. 강의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하루가 멀게 시위가 있었다. 도서관에 앉아 차분하게 책을 볼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시위와 시험이 겹치면 눈치를 보며 시험을 쳤다. 강의에 빠진 학생을 결석 처리하는 교수는 어용교수로 몰리기도 했다. 캠퍼스는 최루탄으로 매운 냄새가 진동했다. 학생으로서 마음을 잡고 본분의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은 우울한 날의 연속이었다.
마음이 심란할 때 바둑에 집중하게 되면 정신이 맑아지고 우울감도 사라졌다. 저자에게 바둑은 기예를 겨루는 차원을 넘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바둑 동아리 ‘기우회(棋友會)’에 가입하여 동아리 활동도 했다. 동아리 회원 중에는 대학 패왕전에서 우승한 선배 등 고수들이 즐비했다. 동아리방에 비치된 바둑 정석, 응용, 기보 등을 빌려 공부하며 기초를 탄탄하게 쌓았다.
바둑의 이론을 공부하면 할수록 바둑의 오묘한 매력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바둑의 맛을 느끼게 되었다. 저자는 내기바둑을 절대 하지 않았다. 한 점이라도 남겨 이기기 위해 피를 말리는 대결을 하고 싶지 않았다. 승부를 초연하여 친선 바둑을 두며 좋은 수를 찾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바둑을 저자와 동행하는 친구로 가치를 부여하면서 바둑을 놓는 것이 즐거웠다. 바둑을 두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고 좋은 수를 찾아내기 위해 반상을 응시했다(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는 어깨에 독화살을 맞은 명장 관우가 바둑 명인 마량과 바둑을 두는 사이 화타가 어깨뼈 수술을 진행했다. 관우는 화타가 뼈를 긁어 독을 제거하는 장면에서도 바둑에 열중한다. 허구를 허용하는 소설이지만 저자도 관우처럼 그런 상황이 닥치면 신체적 고통을 이겨내고 바둑에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승부에 초연하여 좋은 수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자는 바둑 철학을 가슴에 품게 되면서 급수가 몇 단계는 올라간 듯했다. 깨달은 바가 있었다. 사업이든 바둑이든 일정 수준 이상의 단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철학적 배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얼마나 애기가(愛棋家)인가를 알게 하는 일화가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여름방학의 어느 날, 친한 기우와 함께 바둑판을 들고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큰 소나무를 그늘 삼아 바위에 앉아 바둑을 두었다. 산꼭대기에서 부는 바람은 시원했고 맑은 공기가 두뇌 활동을 촉진하였다. 신선이 부럽지 않았다. 일부 등산객들은 관전에 열을 올렸다. 산에서 두는 바둑은 지상에서 두는 바둑의 맛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달랐다. 착점할 때의 손맛이 경쾌했고 수도 훨씬 잘 떠올랐다. 그림에서 신선들이 바둑 두는 모습이 부러웠는데 저자가 그림 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라는 속담이 틀리지 않았다.
그때 대학의 교수님들도 바둑을 즐겼다. 교수휴게실에서는 바둑돌 놓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강의가 없는 공강(空講)에는 바둑을 좋아하는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수담(手談, 바둑 두는 것을 말함)을 나눴다. 친구들은 저자를 국수(國手)로 불렀다. 동료들이 불러주는 애칭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지금처럼 바둑 채널이 없던 시절이었다. 주로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간이나 늦은 밤 시간대에 바둑 강의를 하거나 대국을 중계했다. 텔레비전의 프로바둑 중계는 한 편의 드라마이거나 소설이었다(그때 바둑해설가 중 김수영 9단, 윤기현 9단, 양상국 9단 등은 구수한 목소리와 족집게와 같은 예측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지금의 바둑 해설은 AI가 인간이 두는 바둑의 착점을 평가하고 이후 진행을 예측하는 시스템으로 진행되면서 해설가의 역할이 축소됐다). 프로들의 바둑은 모순(矛盾) 관계다. 한쪽은 날카로운 창으로 공격하고 다른 쪽은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하는 방패와 같다. 바둑은 인간의 감정 변화를 반영한다. 반전을 거듭하면서 상대방이 잠시 방심하거나 판세를 낙관할 때 그 빈틈을 날카로운 창이 비집고 들어간다. 반상은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감이 흐르고 반집으로 승패가 갈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프로기사가 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피를 말리는 승부의 세계에서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프로기사를 ‘승부사’ 또는 ‘검투사’라고 부르는 이유다). 바둑에서 반집은 행운이고 한집 반은 실력이라고 했다. 반집 승리를 거둔 선수는 행운의 여신이 지켜준 것이다.
저자는 프로기사 중 서봉수 9단(1953년생)의 팬이다. 그의 승부에 대한 끈기와 집념을 좋아한다(승부사의 기질이 떨어지는 저자에게 대리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기사라서 더 좋아하는 것도 같다). 60, 70년대 우리나라 바둑계는 일본 유학파가 타이틀을 석권했던 시기였다(조남철, 김인, 조훈현, 하찬석 등 우리나라 바둑 전성기를 열었던 프로기사들은 일본에서 바둑 공부를 유학파다. 그때 일본 바둑이 선진 바둑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유학을 오고 있다). 서 9단은 독학으로 공부하며 조훈현 9단의 독주에 맞섰던 당랑거철(螳螂拒轍)에 비유할 수 있었다. 당랑거철. 수레바퀴를 막아선 사마귀처럼 그때 수레바퀴처럼 도도했던 조 9단에게 맞선 서 9단을 사마귀에 비유하면 그의 기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나 싶지만 조 9단은 타이틀 전관왕을 세 번이나 차지할 정도로 그 위세는 대단했다. 서 9단은 지금도 한국기원에 매일 출근하여 손자뻘 되는 연구생이나 젊은 후배 기사들과 바둑 공부를 하며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후배들에게 묻는 것을 주저치 않는다. 불치하문(不恥下問), 즉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다’라는 옛 성현의 말을 실천하고 있다.
최근 서 9단은 한국 바둑 역사에서 신기원의 금자탑을 쌓았다. 2024년 5월 〈대주배 남녀 시니어 최강자전〉에서 역대 최고령 우승자가 되었다. 그는 우승 소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전되는 줄 알았는데 운 좋게 승리한 것 같다. 오랜만에 우승해 더 기쁘고, 앞으로 열심히 바둑을 두는 기사로 기억되고 싶다.” 겸손하고 진솔한 서 9단의 참모습은 인터뷰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사실 프로바둑기사는 40세만 되어도 시니어 그룹에 진입할 정도다(대개 20대에 최고의 성적을 낸다). 70대의 우승은 예삿일이 아니다. 그의 우승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그가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한 결과라는 점에서 더 값진 우승이고 노익장 기사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있다. 저자는 서봉수 9단이 출전하는 대국은 바둑 채널에서 빼놓지 않고 보고 있다. 그의 멈추지 않는 지적 호기심과 프로기사로서 프로정신은 평생 학습자로서도 본보기가 되고 있다. 서봉수 9단의 바둑에 대한 정의를 음미해 보자. “바둑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점을 이어가는 것이다.” 산전수전 겪으며 한국 바둑계의 산증인으로 현직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서 9단 다운 명쾌한 정의다. 반상에 놓인 한 점 한 점이 이어져 세력을 형성하고 집이 된다. 바둑돌 한 점은 우리네 사람의 나이 한 살에 해당하고 그 나이들이 이어져 각자의 인생이 되는 이치와 같다.
저자와 형들의 바둑 이야기도 해보자. 우리 집은 바둑 애호가 집이다. 3형제의 기력은 중형이 가장 셌고 저자는 그다음이었다. 큰형의 바둑은 정석을 충분히 연마하지 않은 탓인지 기본기는 약하지만, 임기응변에는 강했다. 저자가 큰형 바둑을 평가할 때 쓰는 말이 있다. ‘허허실실 전법.’ 큰형 바둑을 하수 취급하며 몰아붙이다간 역습을 당하기 일쑤였다. 중형 바둑은 탄탄한 기본기에 형세 판단이 빠르고 실리를 밝히는 기풍이다. 저자와 중형과의 대국은 용호상박(龍虎相搏)의 호각세를 이루었다. 미세한 바둑으로 끝나는 대국이 많아 ‘눈 터지는 계가’를 해야 한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매년 고향에서 네다섯 번을 만나 바둑을 두었다. 3형제의 대국은 아침에 시작하여 봉수(封守)를 하고 점심을 먹은 다음에 다시 진행되었다(일본기원에서 주최하는 타이틀 대국에서 1박 2일 바둑이 진행되는 경우를 보았는데, 우리 형제는 바둑의 한 수 한 수마다 정성을 들이면서 진지한 대국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대국이 끝나고 복기까지 하다 보면 해가 서산마루에 걸렸다. 형제의 바둑을 지켜보며 판세를 저울질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형제들에게 공통의 취미가 있다는 것도 형제의 우애를 지속하는 데 중요하다. 우리 형제는 바둑으로 우애를 돈독히 하고 있다. 요즘 70대의 큰형은 저자에게 2점을 놓고 둔다. 저자는 중형과는 여전히 호각세를 유지하고 있다(중형 집에서 텔레비전의 채널은 항상 바둑 TV로 고정되어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치훈 9단이 전성기 시절에 인터뷰에서 집에 바둑의 흰 돌과 검정 돌을 상징하는 하얀색과 검은색 고양이를 기르며 그들이 싸우고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호수(好手, 바둑에서 좋은 수를 생각했다고 한다. 끈기와 집중은 아마추어 고수나 프로 고수의 공통적인 덕목에 해당한다).
저자의 바둑은 농촌에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저자가 새로 이주하여 사는 마을은 바둑을 좋아하는 애기가들이 기대 이상으로 많다. 아마추어 4급에서 7급 사이의 애기가들이 열 명 정도 된다. 농촌 인구가 급감하고 고령 인구가 대다수인 농촌 마을에서 이 정도의 바둑 인구가 있다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다. 고만고만한 바둑을 두던 마을에서 저자와 같은 기력의 소유자는 마치 평범한 고기가 살던 물에 나타난 메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저자에게 많게는 6점에서 3점까지 깔고 둔다. 저자는 바둑이 끝나면 복기를 해주면서 친절하게 피드백을 해준다. 올해 설 명절에는 〈노인회장배 바둑대회〉를 개최하여 이틀에 걸쳐 리그전을 펼쳤다. 같은 마을에 살면서 서로를 더 잘 알 기회가 되었고 자신의 기력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만족했다. 저자는 공식적으로 마을 기우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선출하고 총무 역할을 자청했다(바둑 실력으로는 저자가 가장 고수이지만 총무 역할을 하면서 기우회의 반석을 다지고 싶었다. 나이를 따졌을 때도 저자가 가장 연소자여서 총무로서 제격이었다). 마을과 인연을 맺고 두 번째 맞이한 설날에 바둑을 구심점으로 단합하고 화목한 시간을 보낸 것이 보람이 컸다. 나이와 세대를 초월한 바둑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바둑으로 노년을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사회적 자산을 마련했다.
2년 전 지인의 소개를 받아 30대 초반의 젊은 바둑 고수를 알게 되었다. 그는 예의가 바르고 단정한 국문학 전공자이자 시 쓰기를 즐기는 젊은이다(산을 좋아하는 이 젊은이와 등산을 마친 후 서로 시를 지어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 기재(棋才)를 드러내 바둑학원에서 정식으로 공부했던 고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기재를 살려 바둑 공부를 계속하는 것보다 학교 공부를 하길 원하셨다고 한다. 그와 저자는 호선(互先) 바둑으로 잘 어울렸으며 그의 바둑은 기본기가 좋고 빈틈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탄탄한 바둑을 두었다. 저자는 아들 같은 이 젊은 바둑 친구와 (승부를 떠나) 좋은 바둑을 두기 위해서라도 바둑 공부를 계속하고 실전 감각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최근 공기업에 취업한 그가 타지에서 근무하는 탓에 자주 대국할 수는 없지만, 나이와 세대를 초월한 그와의 바둑은 언제나 기다려지고 신명 나는 일이다. 우리는 바둑을 두고 난 후 승패를 떠나 복기(復棋)하면서 어떤 수가 최선이었는가를 놓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한다. 이 젊은이에게 특별히 배울 점이 있다. 바둑을 두는 자세다. 대국자 중에는 국면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면 딴 곳을 보거나 딴짓하며 여유를 부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젊은이는 형세의 유불리와 상관없이 바둑판을 응시하며 대국에 임한다. 구도자의 자세로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유지한다. 이창호 9단이 전성기 시절 돌부처(石佛)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 젊은이가 진지하게 대국에 몰입하는 자세는 입신(바둑에서 프로 9단을 뜻하며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의 경지다.
나에게 바둑이란 무엇인가? 심익오훈(三益五訓), 즉 세 가지의 유익함과 다섯 가지의 교훈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세 가지의 유익함이란 첫째, 나에게 바둑이란 무엇보다 좋은 친구요 벗이다. 친한 벗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한 생각이 드는 것처럼, 마음이 심란하고 평정심을 찾지 못할 때 바둑을 두고 나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평정심을 되찾게 해주는 최고의 치유제가 된다. 둘째, 나에게 바둑이란 나이와 세대를 초월하여 인간관계를 맺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적 자산이다. 바둑으로 맺어진 인연은 순수하고 세속적인 욕구와는 거리가 멀다. 반상(盤上)에서 맺어진 인간관계는 나이와 세대를 초월한 기우(棋友)로 이어진다. 저자가 숙부님과 바둑을 둘 수 있었고, 대학 은사님과 바둑으로 인간관계를 이어갔고, 새로 이주한 마을 공동체에서 소속감과 유대감을 돈독히 할 수 있는 것은 바둑이 가진 개방성, 포용성의 힘 때문일 것이다. 셋째, 나에게 바둑이란 인생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하는 둘도 없는 기록이면서 흔적이다. 흔히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인생에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는 것처럼 바둑에도 반상에 놓인 바둑돌 하나하나에 생명이 있다. 바둑 한 수를 착점(着點)하는 것은 인생의 발걸음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이다. 그 생명의 돌들이 고통을 극복하며 살아나기도 하고 고통 속에 죽기도 한다. 수천 번의 바둑을 두고 승부를 가렸지만 쉽게 이긴 바둑은 거의 없다. 한판의 승부에는 수많은 장애물을 건너뛰어야 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심리적 경쟁에서도 이겨내야 한다.
다섯 가지의 교훈이란 무엇인가? 첫째, 바둑에서 ‘두 집을 내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불변의 규칙이 있다. 바둑돌이 살려면 ‘두 집’을 만들어야 하듯 사람 역시 사람답게 살려면 ‘두 집’을 만들어야 한다. 한 집은 ‘건강한 정신’이고 다른 한 집은 ‘건강한 신체’다.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신체다. 둘째, 바둑의 승패는 평정심의 유지에 달려있다. 대국하다 보면 상대방의 집이 유별나게 커 보일 때가 있다. ‘상대방의 집이 커 보이면 진다’라는 바둑 격언이 있을 정도다. 바둑도 인간의 심리적, 정서적 변수가 많이 작용한다. 대국자 중 평정심이 먼저 흔들리는 쪽이 무리수 혹은 악수를 둘 가능성이 크다. 살면서 평정심이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셋째, 사석(死石, 바둑에서 상대편에게 죽은 돌)작전이 필요할 때도 있다. 바둑판에 놓인 모든 돌을 살릴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돌을 버리는 것은 자신의 살점을 자르는 듯한 고통을 동반하지만, 대의를 위해서는 버려야 할 때가 있다. 인생 역시 바둑의 사석처럼 필요하면 버리고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넷째, 자충수(自充手, 바둑에서 자기가 놓은 돌로 자기의 수를 줄이는 일. 이는 쓸데없는 짓을 하여 손해를 보는 것을 의미)를 경계해야 한다. 바둑을 둘 때 대세를 그르치는 몇 가지 중 하나가 자충수를 두는 것이다. 특히 대마의 생사를 놓고 치열한 수 싸움을 할 때 자기 수를 줄이는 자충을 두는 것은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자충의 유혹에 빠질 때가 있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좇은 의사결정이 자충수가 되어 낭패를 보게 된 때가 있다. 세상에는 자충수를 노리는 사람의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바둑은 ‘던지는 것부터 배워라’라는 말이 있다. 바둑의 판세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불리하면 종국(終局)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간에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이 예의다. 프로기사들은 1.5집, 즉 한 집 반 차이가 났을 때 불계(不計)를 선언하는 때도 있다. 반집은 행운이고 한 집 반은 실력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지 않았다. 아마추어 바둑에서 수십 집 차이가 나더라도 끝까지 바둑을 두는 대국자가 있다.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높이 평가하지만, 간혹 불필요하거나 전혀 수가 나지 곳에서 상대방을 시험하려는 듯한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다. 우리네 인생은 경쟁을 동반한다. 선의의 경쟁을 하지만 대세가 기울면 깨끗하게 승복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생각하는 바둑의 세 가지 유익함과 다섯 가지 교훈은 반세기 이상 바둑을 두면서 얻은 인문학적 결론이다. 저자가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말이 있다. “내가 죽으면 관 속에 바둑판과 바둑돌을 넣어달라.” 천국에서 기우들과 바둑을 두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 얼마나 멋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