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오락열차 시즌 2, 서울 말고 보스턴에서.
학교 방송국에서 라디오 PD를 하던 시절, '오락열차'라는 정규방송을 기획/제작한 적이 있었다. 한창 방송 아이템에 대한 고민이 많던 어느 날, 평소처럼 지하철에 가만히 앉아 멍을 때리다가 문득 머리 위 노선도가 게임판 같다는 생각을 했고 그 자리에서 노트북을 꺼내 단숨에 기획서를 작성했다. 그때의 난 부루마블 서울 버전 같은 걸 만들고 싶었다. 수도권 지하철노선도를 보드게임 판이라고 생각하고, 방송 오프닝 때마다 주사위를 던져 직접 이동하는 포맷은 직관적이고 단순했다. '일상을 여행처럼, 오디오로 떠나는 여행의 시작'이라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그렇게 제작에 들어간 8회차 짜리 오디오 예능은 꽤 성공적이었고 무엇보다 만들면서 정말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열 장이 넘어가는 스크립트를 매주 써내는 게 버거웠을 법도 한데 그때는 힘들다는 생각도 별로 안 들었다 (미화된 것 같기도 하고). 매 회차 제작하면서 역마다 특색 있는 가게, 거리, 장소들을 답사하다 보면 서울에 이런 곳들이 있었나 싶었고,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역들은 종종 내 일상을 여행으로 데려다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방송을 듣는 청취자보다 만드는 내가 더 기획의도에 충실했던 것 같다.
보스턴으로 교환학생 온 지 어언 6주 하고도 5일. 그곳 생활은 어떠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자꾸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뭐"라는 시니컬한 답변을 하게 된다. 근데 진짜 사실이라 어쩔 수 없다. "The East Coast is kind but not nice"라는 유명한 말이 있을 정도로, 뉴잉글랜드 (특히 뉴욕과 보스턴) 사람들은 엄청 쌀쌀맞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친절을 남발하지도 않는다. 한마디 하면 오 마이갓 패뷸러스 골져스 유룩펄펙트를 쏟아내는 미국식 리액션을 기대하고 왔다면 실망하기 일쑤. 개강날 첫 수업 전 던킨에 들렀다가 좀비 같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딱 느꼈다. 여긴 캘리포니아가 아니다. 웰컴 투 보스턴.
그렇지만 그래서 재밌다. 보스턴은 정말 서울과 닮았다. 커피가 늦게 나오거나 지하철이 연착되면 표정부터 구기는, 자기 일에 항상 바쁘고 그래서 걸음걸이도 엄청 빠른, 피곤에 찌들어있지만 말 걸면 입꼬리를 올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꼭 영어 쓰는 서울사람들 같다. 이정현이 샬롯으로, 박현민이 제임스로 바뀐 것뿐. 캠브릿지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보는 찰스강은 합정-당산 구간에서 보이는 한강 같고, 보스턴 커먼에서 보이는 빌딩숲은 여의도, 차이나타운은 을지로 같다. 14시간 비행해 날아간 타국에서 보이는 익숙한 풍경들이 오히려 처음에 정착하고 적응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오락열차를 떠올린 건 반복되는 일상 속 막연히 피어오른 불안감 때문이었다. 서울이랑 비슷한 건 좋은데, 서울에서 살던 거랑 너무 똑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 교환학생 이라기 보단 그냥 편입한 미국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수업 듣고, 짐 가고, 밥 먹고, 과제하다 끝나는 일상. 안온함을 넘어서 배부른 지루함. "어떻게 맨날 여행하듯 행복하게만 살아, 5개월 내내 붕떠서 지낼 수는 없잖아"라는 친구의 말도 백번 공감하지만 분명히 변주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오락열차 시즌 2, 서울 말고 보스턴에서.
차 없으면 꼼짝 못 하는 서부와 달리, 다행히 보스턴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잘 되어있는 편이다. Red Green Orange Blue 그리고 공항철도인 Silver까지 지하철 호선은 총 5개, 역은 153개로 적지 않은 수이다. 어차피 대중교통에 의지해야 하는 뚜벅이 신세라면, 아예 이걸 컨셉으로 잡아 글을 써보자!라는 생각이었고 가장 먼저 생각난 플랫폼이 브런치였다. 글을 쓰기 전, 그 역에 가보기 전 사전 조사도 열심히 해야지. 이를테면 하버드 역을 간다고 해서 '오늘의 장소: 하버드대학교' 같은 성의 없는 글쓰기는 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새로운 풍경이 가져다주는 종교성별인종문화 그 너머의 생각들은 덤으로 끼워 넣어야겠다. 미국에서도 손에 꼽히게 리버럴한 도시 보스턴에선 사실 벤치에 앉아 사람구경만 해도 얘기할 거리가 많으니깐.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역마다 어울리는 노래를 테마송처럼 첨부하는 것도 좋겠다.
그러니까 이 시리즈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이곳에선 이방인도 거주민도 학생도 소수자도 될 수 있는 내가 다각도로 그려내는 보스턴 이곳저곳의 완벽히 주관적인 리뷰에 가깝다. 반복되는 일상이 불안한 누군가에게 이 시리즈가 때로는 심심풀이 땅콩이자 때로는 무심한 위로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뭔가를 써 내려가는데 막힘이 없던 그때를 잊지 못하고 저 멀리 미국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스물셋 청년이 일상을 여행으로 바꿔보려는 노력을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