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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파니 Mar 28. 2023

Chinatown

미국 땅에서 기어이 찾아낸 익숙함

1. 보스턴 다운타운에서 고작 한 블록 걸어왔을 뿐인데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역 이름부터가 타국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걸을수록 로마자 간판은 점점 사라지고 거리를 어지럽게 메운 울긋불긋 보통화 간판에 익숙해질 때 즘, 누가 봐도 '여기 차이나타운이요' 외치는 것 같은 다소 조악한 기와지붕 정문이 보인다. 쿵푸팬더에 나오는 만두집 지붕 같다고 생각하며 보스턴 속 '리틀 차이나'로 들어섰다. 

분명 처음 오는 거리인데, 낯설지만은 않다. 유사한 문화적 맥락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연고 없는 지역에서 알 수 없는 유대감과 익숙함을 느낀다. 일단 골목골목 은은하게 배어있는 향신료 냄새가 반가웠다. 보스턴에서 한 블록 건너 있는 던킨이나 맥도날드가 여기엔 없다는 사실도 묘하게 좋았다. 거리의 사람들이 대부분 나와 같은 피부색을 가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놀랍다가도 내가 한국에서 14시간 날아온 게 맞긴 하구나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렇게 오히려 외국인으로서의 존재성을 실감하는 순간, 내 앞에 관광객으로 보이는 백인들이 지나간다. 아시안 베이커리에 들어가 피자빵과 메론빵을 보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이런 빵은 처음 봐!"라며 감탄하는 사람들. 뚜레쥬르 한 번 가면 기절하겠네. 내가 익숙함을 느끼는 포인트가 누군가에겐 관광의 이유가 된다니 흥미롭다고 생각한 동시에 뉴욕의 노란 택시를 열심히 찍던 내가 떠올라서 머쓱해졌다.

장소의 명칭 안에 아예 나라 이름이 들어갔다는 것 자체로 차이나타운은 강렬한 장소성을 가진다.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일 것이며 누군가에겐 이국적인 경험의 장, 누군가에겐 그리움을 달래주는 음식이 있는 곳이며 누군가에겐 향수 그 자체일 곳. 골목에 들어선 순간부터 ‘아시안’이라는 말도 안 되게 큰 범주로 어설프게 묶이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소속감이 나쁘지 않았다. 잠시만, 여기선 누가 이방인이지? 


2.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뿌리 깊은 익숙함이라는 게 있다. 개인의 선호와 상관없이, 나에게 ‘동네빵’ 하면 아마 앞으로도 시나몬롤이나 컵케이크 보다 소보로나 고로케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난 익숙한 건 일부러라도 지양하고 새로운 경험만 많이 하고 싶었다. 내가 무슨 쑥과 마늘을 100일간 먹으면 사람이 된다고 믿는 곰도 아니고, 마치 한국어를 안 쓰고 김치를 안 먹으면 미국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듯이.

 

그런데 정체성이라는 게 그렇게 옷 벗듯이 입고 벗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종다양성 높은 보스턴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생각해 온 ‘미국인’의 이미지가 얼마나 편협하고 한정적이었는지는 와서 깨달았다. 각자 나고 자란 배경은 모두 다르지만 두드러지는 한 가지 공통점. 자신의 백그라운드가 드러나는 영어 악센트부터 취향, 종교까지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자랑스러워한다는 것. 개인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존중되는 동시에 누구도 함부로 상대방을 정의 내릴 수 없다는 단호함. 정체성이 개성이 된다는 게 참 미국 답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미국에 오기 전에는 내가 아시안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적도, 굳이 드러내 자랑스러워한 적도 없다고 생각하면 그들에게 한 수 배운 셈이다.

전 세계 인구의 96%가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고 한다. 미국에 온 지 3개월이 된 지금, 이대로 3년이고 30년이고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고 동시에 내가 나머지 4% 안에 속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완전히 새로운 환경 속에서 삶을 마저 이어나가야 할 때,  나는 스스로를 어디까지 지켜내야 하는가? 어디까지 섞이고 어디까지 오롯이 나여야 하지? 답은 차이나타운이 주었다.


익숙함 속에서, 여행하듯

수많은 선택들이 그물처럼 엮여 나를 어딘가에 데려다 놓겠지만, 결국 난 어김없이 익숙함을 찾아낼 거고, 그 외의 모든 순간엔 피자빵 사진 찍는 외국인 관광객처럼 누군가의 익숙함을 신기해하며 여행하듯 살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 감히 예측할 수도 없는 호기심으로 가득 찰 미래라니, 어디서 살진 몰라도 그런 물음표로 가득한 삶은 분명 근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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