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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파니 Apr 03. 2023

MIT

규칙과 공식과 결과값 그 너머의 끝없는 애정에 대하여

https://www.youtube.com/watch?v=eYaDQ0sD6n4 오늘의 BGM!


1.

레드라인을 타고 강건너 40분정도 가면 바로 나오는 캠브릿지 타운 이웃대학 그 이름은 MIT. 칼같이 맞춘 대칭 속 모노톤의 점선면으로 이루어진 학교 빌딩.지나가는 사람은 다 주커버그처럼 생긴 와중에 체크셔츠 사랑은 공돌이라면 유니버셜.

왜 모든 학교의 이공계 캠퍼스는 다 못생기고 재미없냐며 미로 같은 캠퍼스에서 수십 번 길을 잃는 와중에 툴툴댔던 기억이 난다.

친구가 끌고 간 한 시간 반짜리 MIT 강연은 스페인어로 진행됐고 덕분에 들고간 노트나 녹음기는 무용지물. 아마 영어나 한국어로 했어도 나에겐 매한가지였을 것 같아 기분이 딱히 나쁘지도 않았다. 양자 역학이니 퀀텀비트니 하는 것들을 무슨 애인 바라보듯이 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기하기만 했다.

“직접 와보니까 느낀 건데, 나도 여기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아”

칠판에 적힌 온갖 수식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친구를 보면서 언젠가 너는 정말로 MIT에 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괴짜 너드가 주인공인 영화의 초반부를 목격한 기분이 들어 조금 묘했다.  

아시안은 수학 과학 잘한다는 지겨운 편견을 내가 깨줄 수 있어, 네가 아는 아시안 중에 내가 숫자 제일 싫어할걸. 캠퍼스를 나와 식당으로 향하는 길, 강연 내용을 열성적으로 해석해 주는 친구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누군가가 저렇게까지 재미있어한다면 이것도 꽤 매력적인 학문이겠구나 생각하며 고수해 온 ‘숫자 싫어’ 마인드를 잠시 철회했다. 어쩌면 나중에라도 이 분야를 공부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땐 전보다 덜 싫어하고 더더 반갑게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를 둘러싼 세계가 아주 조금 더 넓어졌다.


오로지 누군가의 열정을 보는 게 즐거워서 이해하기도 전에 덜컥 좋아진 것.

그게 MIT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2.

난 내 전공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늘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영문과에 들어오고 싶었던 건 아닌데, 중고등학교 6년 내내 국어 영어가 제일 좋았던 문과 학생에게 영문과는 선호와 상관없이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방송국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2년 동안은 수업을콧구멍으로 듣는둥 마는둥 하다가, 복학하고 나서부터 전공과 조금씩 친해졌다. 수업시간에 다루는 텍스트는 (수업 전에 잘 읽어가기만 한다면) 흥미롭고, 그 안에 담긴 역사와 문화는 더 흥미롭고.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작가라든지 소설이라든지 하는 것도 생기고 이렇게 미국까지 와서 글을 쓰고 있다. 구구절절 떠들기보단 역시 책에 코 박고 반나절 보내는 게 적성에 맞다.


별개로, 상대방이 자기 전공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듣는 것 역시 언제나 재밌다. 나와는 평생 연이 없을 것 같은 키워드에 눈을 반짝이고, 애정을 쏟고, 그래서 나도 덩달아 그게 좋아질 것만 같은 순간을 사랑한다. 정말이지 불가항력이다. 같은 논리로 내가 오늘 배워온 수많은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맘껏 젠체하고 싶을 때 뒷걸음치지 않고 흥미롭게 들어주는 사람에겐 언제든지 마음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고 그런 실수라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기꺼이 저지를 수 있다.


자기가 얼마나 이 전공을 사랑하는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신나서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는 걸 MIT에서 깨달았다. 그거 아니, 너 그거 얘기할 때 정말 행복해 보여. 그래서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어. 영문학을 얘기하는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비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3.

“너넨 앞으로 무슨 일 하고 싶은지 대충 정했어?”


느지막한 주말 오후, 카페에 다 같이 모여 죽은 눈동자로 각자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던진 물음에 대부분 그렇다고 답했다. 나만 망설임이 길어지는 것 같아 약간 우울해졌다. 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동시에 진짜 하고 싶은 건 없는 것 같아, 69시간 일하다 죽고 싶진 않은데 앞으로 남은 평생 일만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해.라는 하소연에 한 친구가 자기 경험을 공유했다. 작년 여름 인턴을 하면서 ‘이 일이라면 그나마 오랫동안 재미있게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면서. 인생에서 행복이 기본값이 아니듯 일도 노잼이 디폴트다. 그래도 평생 할 밥벌이라면 이왕 자신에게 제일 잘 맞는 일이면 좋을 거고 모두 그런 일이 하나쯤 있을 거라고 했다. 그 일을 찾기까지 이리저리 헤매는 건 너무 당연하고, 그런 방황은 하나도 빠짐없이 가치 있다는 명언까지 덧붙이면서.


맘에 드는 전공을 찾으니 다음 스테이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로 자아실현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버린 지 오래지만, 동사인 꿈과 명사인 직업 사이에서 한동안 고민했던(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들이 나에게도 있다. 방황 한가운데 도망치듯 온 보스턴에선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방송 말고도 하고 싶은 게 생겼고, 꿈이 무슨 종갓집 김치도 아니고 오래 묵힌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무식한 용기가 샘솟았다. 꿈이 뭐 별 건가? 작은 거부터 한 번에 하나씩 다 해보면 되지. 방향만 맞다면 목적지의 개수는 상관없다는 믿음이 생겼다.



4.

그래도 여행기라는 제목 달고 글 쓰는데 너무 사담만 가득인가 싶어 약간의 죄책감에 덧붙이는 정보. MIT 캠퍼스 도보로 5분, 아주 가까운 곳에 보스턴에서 가장 맛있는 피자를 파는 ‘Around Four’라는 핏제리아가 있다. 베스트 메뉴는 클램 피자. 귀국행 비행기에 싣고 가고 싶은 맛이니까, 캠퍼스를 견학한다면 꼭 먹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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