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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라시아 Feb 09. 2023

성실하게 식탁 앞에 앉는 것만으로도

키친테이블 독서, '성실함'이 답이다.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 중 가장 강력함 힘을 가진 것은 ‘성실함’이다. 대학 3학년 2학기, 내가 주변에 임용고사를 준비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 ‘이르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8학기 과정을 마치면서 시험삼아 한번 응시해보고, 졸업을 한 후 본격적으로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말도 덧붙이며말이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나중에 볼 시험이라면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임용고사 커뮤니티에서 스터디원을 모집했고, 문학 작품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공부를 함께했다. 시험이 바로 앞에 닥쳤을 때의 공부와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의 공부는 성격이 다르다. 나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기에 이 시기야말로 문학작품들을 내가 스스로 분석하고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작품들을 섭렵해나갔다. 4학년(5학기)이 되어 본격적으로 임용고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3학점에 달하는 과목을 수강하면서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일과라 쉽지만은 않았다. 아침일찍 학교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수업을 듣고 공강시간에는 공부를 하다가 벌떡 일어나 또 수업을 듣고, 때로는 과제까지 하는 빡빡한 삶이었다. 누군가는 학교 수업을 듣는 것이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학교 수업에서 내가 수강하던 과목들은 임용고사 과목에 해당하는 내용을 깊이있게 다루고 있어서 공부 내용을 보강할 수 있었고, 때로 공부하는 데 의문이 생길 때는 전문가인 교수님께 질문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1년 후, 나는 임용고사에 합격했고 졸업과 동시에 교단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성실함’의 힘이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것, 그 꾸준함의 힘을 살면서 믿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시간은 교사인 나는 내려놓고 오롯이 아이의 엄마가 되는 시간이다. 둘째는 알아서 큰다, 소위 ‘발로 키운다’는 말을 더러 들었던 터라 둘째 육아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둘째가 쌍둥이로 내 삶에 찾아오면서 수월하기는커녕 내 삶에서 가장 힘든 순간으로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출산한 지 안되어 내 몸은 힘든데 아이를 케어해야하는 이중고는 많은 엄마들이 겪어본 육체적인 어려움이다. 다른 의미의 어려움은 정신적인 것이다. 거의 모든 사회 생활이 정지되고 아이 대 나로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의 세계가 축소되는 것이다. ‘아이 잘 때 무조건 자라’는 주위의 조언을 따르다보면 내 나의 세계는 축소되다못해 소멸되기까지 한다. 휴직을 마치고는 바로 교단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이렇게 생활하다가는 ‘난독증’이 생길 것 같다는 두려움까지 들었다.

 ‘육아의 틈새’는 무조건 나를 위해 쓰자. 내가 생각한, 나를 살리는 방법이었다. 집안일은 조금 나중으로 미루어두더라도 육아의 틈이 생기면 식탁에 앉았다. 평소에는 가족의 밥상이지만, 깨끗이 치워놓고 나면 훌륭한 독서 공간이 되는 나만의 공간. 아이들이 낮잠자는 시간은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기대감에 부풀어 식탁 앞에 앉았다. 갓 잠든 아이들이 금세 잠에서 깰세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읽고 싶은 책을 꺼내드는 그 순간의 긴장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언제 깰지 모르는 아이들 때문에 일 분 일 초가 소중하기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눈이 서서히 감기는,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 꾸준히 성실하게 읽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면서 조금 더 내 시간이 많아지면서 한 시간 정도는 쉬운 원서를 번역해서 읽어 보기도 하고, 하루 두 시간 정도는 꼭 책을 읽는 시간으로 정해 놓고 읽었다. 그리고 책을 읽은 감상이 휘발되어 버리는 것이 아까워 블로그에 서평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원래 책을 읽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라, 늘 책은 가까이 하며 살아왔지만 서평을 남기는 것은 또다른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적어 온 서평이 지금은 260건 정도 된다.

 소설가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지금 나도 책을 성실하게 읽어보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책에는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지, 소설을 쓸 때의 태도와 마음 가짐은 어떠한지, 소설 속 인물은 어떻게 탄생하는지, 독자들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그가 놀라울 정도로 ‘성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설을 써야 할 것만 같아서,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쓰기 시작한 글들이 어느 날 빛을 보게 되고, '입장권'을 따낸 그는 그후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글을 써 왔다. 뿐만 아니라 30년간 꾸준히 작품을 낼 수 있기 위해서는 신체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그는 꾸준히 '달리기'를 해 왔다. 달리기로 기초 체력을 쌓고 매일 꾸준히 일정 분량의 글을 써서 결국엔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작품을 여럿 읽어 보았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에서 시작된 끌림은 <1Q84>, <기사단장 죽이기>, <일인칭 단수>로 이어졌고, 늘 매혹적이었다. 약간 몽롱하게 그의 소설 속 세계로 들어가서 어느 새 흠뻑 빠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루키 작품을 읽을 때는 늘 그의 음악에 대한 식견에 감탄하곤 한다. 소설 속 인물 혹은 내용과 어울리는 재즈, 클래식 등 다양한 음악들이 등장하는데, 때로는 소설을 펴 놓고 그 음악을 찾아서 들은 적도 있다. 그가 음악을 좋아해서 재즈바를 열었던 것, 학교 공부는 '어느 정도' 하는 수준으로 두더라도 '책', '영화', '음악'에는 푹 빠져 있던 것이 그의 작품을 보다 풍부하게 하는 기반이 된 것 같다. 또한 그런 기반에는 그가 삶을 대하는 꾸준함과 성실함이 큰 힘이 되었을 것 같다.

  낮에는 가게를 운영하고 밤에는 식탁 앞에 앉아 글을 써 내려갔을 젊은 소설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소설을 쓰기 전 책상을 깨끗이 치우고 소설만을 쓸 것을 다짐하는 그,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움 속에서 습관처럼 글을 쓰는 이 소설가가 나에게 큰 감동을 준다. 그처럼 ‘성실하게’, 하루하루 읽는다면, 나아가 글을 쓴다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무언가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일단 성실하게 식탁 앞에 앉아 보자. 그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언젠가는 나의 꾸준한 달리기가 빛을 발할 날이 올 것이다.


  일단은 만전을 기하며 살아갈 것. '만전을 기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혼을 담는 '틀'인 육체를 어느 정도 확립하고 그것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경우) 지겨울 만큼 질질 끄는 장기전입니다. 게으름피우지 않고 육체를 잘 유지해나가는 노력 없이, 의지만을 혹은 영혼만을 전향적으로 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중략)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은 말하자면 자동차의 양쪽 두 개의 바퀴입니다. 그것이 번갈아 균형을 잡으며 제 기능을 다할 떄, 가장 올바르방향성과 가장 효과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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