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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rianne R Mar 06. 2024

Closing One Chapter of Life

엄마 둘, 남매 하나 <인생의 한 챕터를 마무리 지으며>

한글학교 안 갈 거야!


토요일 아침, 한 시간짜리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의 실랑이가 매주 점점 길어지는가 싶더니 아들이 드디어 울음을 터뜨렸다.



한국에 길게 방문했을 때 갑자기 성장한 한국어 실력을 믿고 주말 한글학교에 너무 일찍부터 들여보냈던 게 화근이었다. 유아기에는 육 개월 사이에도 발달과정상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신중했어야 했는데. 세 살까지 전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해 초조했던 기억에 힘입어 둘째를 네 살부터 한글학교에 입성시켰다. 몇 마디라도 듣고 왔으면 하는 내 바람과 보조교사 배정 등 학교의 적극적인 배려가 합쳐져 시작한 과정이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교실에 참관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니 일 년 전 고만고만하다고 생각했던 교실 안 친구들이 크게 성장해 있었다. 손의 소근육 힘이 발달해 글씨를 쓰는데 무리가 없고 자음과 모음이 만나 음가가 만들어지는 한글의 기본 원리에 꽤 익숙해져 곧잘 읽고 쓰고 있었다. 친구가 아니라 형, 누나들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크게 다가왔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라고 해도 유치원생과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책을 후루루 넘겨보니 꽤 복잡한 문장을 썼던 흔적이 쏟아졌다.


“아이고 고생했네. 이제 이 수업은 그만 가도 돼”

형, 누나들 사이에서 애썼을 시간을 생각하니 기특하고 미안했다.



피곤하니까

이 근방에서 유일한 한국어 대면수업에서 아이를 빼내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더 낮은 레벨은 온라인 수업뿐이지만 그쪽으로 아이를 옮기기로 했다. 쓰기 활동을 면밀히 관찰하고 수정하는 데 제약이 많은 온라인 수업. 만들기, 소그룹 활동, 몸을 움직이는 놀이로 좀 더 입체적인 한국어 활동을 경험하기 어려운 것도 단점 중 하나였다. 보통 미국의 주말 한글학교는 오전에 세 시간 정도 수업을 한다. 기본 문법,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문화 활동을 아우르는 활동이 있고 간식을 먹으며 쉬는 시간도 포함된 편안한 환경이다. 이런 것들을 한 시간 안에 조금씩 다 넣으려면 온라인 수업 환경에 맞춰진 교수방법의 연구와 세심한 계획이 요구된다. 생각이 많아졌지만 잔뜩 몸을 쓰고 돌아온 여행에서 달고 온 기침이 멈추지 않는 데다가 내 수업까지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걱정을 할 틈이 없었다. 그냥 한 시간 잘 앉아 있다가 오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생각해 버렸다. 친구들의 얼굴을 보고 간단한 대화상황에라도 노출된다면 득이 더 많겠지. 어차피 여섯 살에게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말하기’ 이니까. 몸이 피곤하니 다 내려놓게 된다.




어떻게 이걸 잊어버려

새로 옮긴 반에 로그인해 들어가니 화면에 여섯 살 또래 아이들의 얼굴이 비쳤다. 언젠가 아들과 함께 놀았던 훈이의 얼굴도 보인다. 대학생인 선생님은 수업 자료를 정돈하느라 바쁜 눈치였다. 아이들은 서로를 알아보고는 혀를 내밀고 얼굴을 구기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동안 배웠던 내용을 리뷰하는 시간이 시작 됐다. 교과서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으려니 다양한 단어와 문법이 나왔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어른 입장에서는 문법이랄 것도 없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문법'이라는 이름이 붙고 '공부'라는 이름이 붙어 진지한 일이 된다. '방, 교실, 학교, 부엌' 같이 주변환경을 설명하는 기초단어가 나오고 곧이어 가족관계로 넘어갔다. 나름 세심한 선생님이 준비한 비디오는 다문화가정, 한부모가정, 조손가정, 입양가정을 아우르는 ‘한 가족이에요’라는 영상이었다. (깨비키즈 https://www.youtube.com/watch?v=pu2ULIgXFtI ) 한국인 유학생으로 아직 학부생인 선생님이 고른 영상이라니 예상 밖이었다. 동시에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의 현재 상황을 체감할 수 있었다. 외국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5%가 넘으면 다문화 사회로 정의되고, 발표에 따른 진입 예상시점은 2024년이었다. 2024년 3월, 선생님이 고른 영상 속에서 한 해 한 해가 새로운 한국의 2024년을 만나는 듯했다. 잠시 후, 화면에서 헤테로 가정을 표현한 그림이 보이고 엄마, 아빠, 누나, 동생 등의 표현이 나오기 시작하자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엄마가 두 명이라는 것을 미리 선생님께 말했어야 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엄마, 아빠'라는 표현 이외에 집에서 '마마'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니 가끔 수업에서 언급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매 학기 수업 전에 항상 개인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최우선이 됐었는데. 어떻게 이걸 잊어버릴 수가 있는지. 두 엄마 가정인 우리의 상황이 당연시되는 환경 속에 지내다 보니 오직 학습 상황에만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화면 속 선생님께 급하게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다른 게 아니라 저희가 동성커플 가족이라서 엄마, 마마가 있어요. 수업 전에 알고 계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화면 속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네 알겠습니당”


늘 비슷하지만 선생님들의 대답은 언제나 간단한 편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랬당….)

쉬워진 수업에서 한결 밝아진 표정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울지 말고 잘 지내

아내 차의 백미러 부분에서 조금씩 물이 새기 시작한 지 일 년이 넘은 것 같다. 출퇴근 거리가 십오 분 정도이고 차를 쓸 일이 별로 없는 데다가 수리하자니 가격이 만만치 않아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며 망설이고 있었다. 선루프가 끝까지 닫히지 않는 문제까지 나타나자 새 차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첫째가 어릴 때부터 타던 지금의 차는 든든한 보호구역 같은 역할을 해왔다. 너무 춥거나 더울 때, 간식을 먹을만한 곳이 마땅치 않을 때 차에 앉으면 안심이 됐다. 비위가 약한 첫째가 갑자기 토하거나 음식을 흘리는 일이 많아 깨끗하게 관리할 수 없었다. 잘 지워지지 않는 작은 우유 방울 자국을 닦으며 구시렁거리기도 했다. 캐나다 같은 장거리 여행에도 함께 하고,  낮잠을 재울 힘이 없을 때 적당한 흔들림으로 아이를 재워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번호판을 떼어낸 차를 앞에 두고 아내와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손잡이 외에 차의 표면을 잘 만져본 적이 없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차에 손을 짚어보게 됐다.


“고마웠어. 울지 말고 잘 지내.”


물이 새는 문제가 있는 차를 처분하면서 농담 같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건강하던 차와 어릴적 딸. 벌써 사 년전 사진이 됐다.






둘째를 키우면서 첫째보다 신경을 덜 쓰게 되는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학기 전에 선생님께 미리 우리 가족의 정체성을 언질 하는 문제도 포함될 줄은 몰랐다. 분명히 첫째 때는 엄마가 두 명인 부분을 언급하는 것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세심하게 챙겼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우리 모모가정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중심생각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잘 지워지지 않는 우유방울이 남아있는 자동차에 작별 인사를 하면서, 아이의 매 학기 첫 수업 전에 선생님께 커밍아웃하는 일을 자꾸 잊어버리는 나 자신에 당황하고, 다문화 사회로 진입한 한국의 2024년을 목격하면서, 한쪽 문이 닫히고 다른 한쪽 문을 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것이 인생의 한 챕터가 마무리되는 느낌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한동안 그립고 서운하고 홀가분한 이 기분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

영유아기를 보낸 옛날 집에서 부터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차. 울지 말고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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