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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려야겠다.

거장들에 대한 신화와 진실

by 류민효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파블로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수많은 위인 혹은 거장들을 보며 사람들은 특별함을 찾아내려 애쓴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 특이한 습관, 황당한 일화.

그 중에는 정도에 따라 약간의 혹은 상당한 과장이 묻어 있는 경우가 많다. 현대에는 각종 SNS나 사진, 영상 등이 이들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 해내곤 한다.


나는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간호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입시 수시 원서 6장 중 5장을 사용했고, 모두 간호학과에 넣었다. 그렇게 간호학과를 졸업했고,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곧바로 간호장교로 입대했다.

내가 그림을 꾸준히 그리기 시작한 건 간호장교로 근무한지 1년쯤 지났을 무렵이다. 2018년 3월 16일.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지, 볼펜을 쥐고 A4 종이 이면지 뒷면에 내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아니면 심심했던 건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렇게 했다. 그리고는 꽤나 만족스러웠는지 혹은 단순히 재미가 있었던 건지, 이번엔 형의 사진을 찾아 따라 그렸다. 이번엔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부터 까만 볼펜과 A4 이면지는 내 놀이 도구가 되었다. 펜촉을 따라 종이 위로 이어지는 까만 선들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나는 3월 16일 두 번의 낙서 이후에 3월이 끝나기 전까지 열두 번의 낙서를 이어갔다. 그때는 내가 이렇게까지 그림을 그려댈 줄 몰랐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래퍼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랩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랩으로 유명해지면 그림도 그려야지'라고 생각했었고, 그 생각이 얼마간 이어지다가 또 갑자기 '근데 랩으로 유명해지지 못하면 그림을 못 그리는 건가? 그러면 지금부터 그림을 그리자'라고 생각했다고. 마치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어떤 신의 계기라든가 내면의 예술가적 기질을 억누르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야구장에서 야구 경기를 보다가 하늘을 가로 지르는 야구공을 보다가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지 않은가.


그렇게 몇 개월, 몇 년을 보냈다. 그러면서 가끔 내가 그림을 그리던 초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검정 볼펜으로 A4 용지에 낙서하듯 그림을 그리고선 나름의 서명도 적어넣던 그때에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베르나르 뷔페라는 거장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렸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그러면 이때쯤에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샤갈, 달리, 뷔페 전시를 보고 SNS에 '달리가 왕 뷔페가 에이스'라는 사춘기스런 글을 남겼던 거구나. 당시 처음 알게 된 베르나르 뷔페라는 화가는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로 꼽을 만큼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화가이다. 그러면 나는 '갑자기'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게 아니고 그때 그 전시를 봐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구나. 라고 생각한 채로 또 꽤 긴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낙서를 시작한 건 앞서 말했듯 간호장교 복무 초기였던 2018년 3월이고, 내가 실제로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거장 vs 거장, 샤갈 달리 뷔페 전]을 본 것은 2016년 9월 2일이었다. 달리와 뷔페에 대한 감상평이 적힌 SNS 게시물에 적힌 날짜가 2016년 9월 2일이었다. 기록이 있으니 이번엔 틀렸을 리 없다. 하지만 나는 내 뇌가 벌인 연쇄 기억력 조작 사건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해본 결과 역시 기록이 기억보다 정확했다. 해당 전시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2016년 6월 25일부터 9월 25일까지 진행됐던 전시였다.

그렇다면 2016년의 충격이 2년 동안 지속되다가 정말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려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그렇다면 오히려 제일 처음했던 신의 계시와 같은 그 기억이 맞는 게 아닐까?


역시나 그렇지 않았다. 기억과 기록의 간격에 충격을 받은 나는 내 기억의 첫 전시(학생 때 학교에서 갔던 전시 제외)인 앤디 워홀 전시가 언제였는지 SNS를 뒤져 찾아냈다. '2015.12.24.목 따스하면서 추움. 친구 소개로 앤디 워홀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마음에 든다.' 당시 나는 친구의 권유로 2015년 11월 25일부터 2016년 3월 20일까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앤디 워홀 라이브 전]을 보러 같이 갔었다. 정말 재미난 경험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기록도 그 기억이 맞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혹시 이 두 전시가 나를 그리게 한 걸까? 나는 계속해서 SNS 기록을 뒤졌다.


'2017.03.22.수 따스함. According to legend...' 이건 2017년 3월 14일부터 6월 6일 수영구 망미동 F1963에서 진행된 [피카소, 그리고 그의 열정] 전시에 입장했을 때 제일 처음 적혀있는 글인 'According to legend, Pablo’s first words were "piz, piz" his childish attempt at saying "lapiz," the Spanish word for pencil.'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2017년도에 봤던 피카소 전시에서 배웠던 걸 그린 그림이 있었다. '눈 형상을 눈이라고 알 수 있을 정도만 되면 아무렇게나 그리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이런 감상평을 내 일기인지 어딘가에 남겼던 것 같다. '피카소는 한 교실에 있는 개개인의 학생들이 그릴 수 있는 그림들을 모두 그릴 수 있는 사람 같다.' 피카소의 표현 방법은 무궁무진했고, 제 멋대로였고, 한계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또 다른 전시 관련 게시물을 찾았다. ‘2018.03.07.수 흐림 후 비’ 라고만 적혀있고, 사진은 그날 본 어느 문에 그려져 있던 여성 그림이다. 이 사진은 2017년 9월 26일부터 2018년 4월 8일까지 연장되었던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진행된 [사랑의 묘약-열 개의 방, 세 개의 마음] 전시를 보러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 갔을 때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후 들어갔던 골목길의 어느 집 문을 찍은 것이었다.


즉, 2018년 3월 16일 까만 볼펜을 들고 A4 종이에 낙서를 시작한 나는 어떠한 '운명적 직감'이나 '신의 계시'를 받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어느 전시에서 우연히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꼽는 화가를 운명적으로 만난 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우연히' 친구와 함께 전시를 보러 갔었고, '마침' 거기서 재미난 그림들을 보고서는 좋은 느낌을 받았고, '우연히' 알게 된 전시 소식에 빈지노 덕에 알게 된 살바도르 달리를 제외한 나머지 초면의 두 거장의 그림을 보게 되었고, '우연히' 거기서 내 그림쟁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를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에 1년에 한 번꼴로 전시를 보러 다니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2018년 3월 16일 오후 책상 앞에서 1주일 전에 갔던 전시를 마지막으로 이제는 직접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지. 평소에도 사람의 기억, 특히 나의 기억에 대해서 가능성을 열어두는 편이라 생각했지만 그 정도에 대해서는 나도 보수적이었던 것 같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에 대해 알아보면서 나라는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편협하고 주관적으로 조작된 것인지 깨닫고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딱히 큰 의미 없이 내 인생의 순간 순간을 기록해두는 것이 내 인생을 아끼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날의 기록을 남겨뒀던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꾸준히 쓰던 일기장도, 가끔 쓰는 블로그와 SNS 게시글도 하나하나 내 인생의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거장들에게 얽힌 신화와 이야기들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대해 논하는 것은 적어도 나에겐 그리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그것이 과장된 것이라면 그만큼 그 사람의 인생이 우리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이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재미난 이야기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거장이 되고 싶다. 그런 때가 오면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때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전해지겠지. 그때를 위해서 기록하기를 멈추지 말아야겠다. 글로써든 그림으로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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