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빵)
예전에 유명한 모연예인 故 최 모 씨가 그랬다. 어릴 적 가난으로 자주 먹어야 했다는 수제비가 지겨웠다고……
어이없지만 나도 그랬다.
7살 때 되던 해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먼저 여행을 떠나셨다. 연약한 엄마와 고만고만한 코흘리개 4남매인 우리들을 두고..
곱디고운 우리 엄마는 곧바로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 리어카로 과일 행상을 하셨지만 어린 4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학비를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입원이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자존심을 무릅쓰고 동회에 방문해 영세민 신청을 했고 우리 가족은 영세민이라는 미명 아래 동회에서 해묵은 쌀인 정부미와 밀가루 한 포대씩을 세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배급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학기 초마다 담임선생님의 “아빠 없는 사람 손들어” “영세민인 사람 손들어” 하며 반 전체 급우가 또랑또랑 한 시선으로 나를 주시하게 하는 수모는 덤이었다. 생계와 맞바꾼 자존심이라고 어린 나는 부들부들 생각했다.
길고 긴 겨울날 우리 집 반찬은 늘 무말랭이와 시어 빠진 김장김치가 전부였다. 그나마 밥이라도 양껏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해가 묵어 찰기도 없고 맛도 없는 그 정부미 쌀조차 배급량이 넉넉지 않았다. 한창 성장기인 4남매와 엄마인 다섯 가족의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늘 턱없이 양이 부족해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연명해 나간 날이 부지기수였다.
맹물에 멸치 몇 마리라도 풍덩 샤워시키고 넣으면 좀 육수의 맛이라도 나련만 비릿한 멸치 몇 마리 역시 우리 집에선 사치였다. 늘 부족한 재료로만 끓여졌던 우리 집 주식인 수제비는 같은 루틴으로 끓여졌다. 우선 조막손으로 우물물을 펌핑해온다. 냄비에 절반 정도 차게 우물물을 채운다. 석유 곤로 위 삼발이 위에 양은 냄비를 올린 후 성냥을 켜고 고개를 조아리고 동공을 확장시키며 익숙하게 등유에 적셔진 심지를 올려 불을 붙인다.
심지에 불이 잘 붙었는지를 확인한 후 재빨리 심지를 내려닫고 혹시나 머리에 성냥불이 옮겨붙을까 머리를 곧추세워 어린 볼을 빵빵하게 부푼 후 성냥불을 후~ 하고 불어 끈다. 곤로 아래쪽이 경사져 있어 손잡이를 좌우로 움직이면 심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단순한 구조이기 때문에 불이 꺼진 상태에서도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지 않고 심지 윗부분이 조금씩 보이는 게 정상이었다. 어린 7살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끓여 먹기에는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과정이었다. 그리곤 맹물에 김장김치를 뚝뚝 썰어 넣고 물이 끓는 사이 밀가루에 찬물을 붓고 조물조물 치덕치덕 반죽해 펄펄끓는 김장김치육수에 뚝뚝 뜯어 넣는 게 우리 집 수제비의 완성이었다.
남자 어른이 없던 우리 집에는 곤로 심지를 자주 갈 수 없어 심지가 짧아지면 불완전 연소가 일어나 그을음이 심해졌다. 그러면 그런 날은 수제비에 그을음 맛이 묻어났다. 석유곤로의 연료인 연료계가 0에 가까워지면 플라스틱 자바라를 들고 석유통에 담아온 등유를 자바라 위 빨간 꼭지 부분을 양쪽으로 동시에 펌핑해 등유계를 채워야 했고 그런 날 수제비는 그을음에 등유의 향까지 덧 입혀졌다. 그나마라도 더 먹고 싶어 어린 조막 손가락 사이에 붙은 밀가루 반죽 도 아까워 한입이라도 더 먹기 위해 손가락 사이마저 쭉쭉 훑어내 마지막 반죽 한입까지 냄비에 넣었다.
다섯 식구가 머리 맞대고 먹는 수제비는 그렇게 내 살이 되고 두뇌가 되고 키가 되어 나의 성장을 도왔다.
그렇게 성장한 나는 20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첫 발을 내디뎠다. 처음으로 음식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진 해방이었다. 그러나 내게 밀가루 음식은 질려서 도통 입에 대지 못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구내 식당외에 인근 식당에서 사용 가능한 식권을 주었다. 한식 양식 중식 식당에 서 골고루 사용할 수 있는 식권이었지만 직장 선배들은 대부분 중식당을 자주 가자 했고 신입인 나는 고실 고실 쌀밥이 있는 한식이 먹고 싶었지만 선배들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면 동료들과 우르르 달려나가 중국 음식을 즐겨 먹었는데 다들 짜장면, 짬뽕면을 외칠 때 난 항상 ‘짬뽕밥!!!’을 외쳤다. 지난했던 성장기 지긋지긋했던 그 밀가루 면과 다시 조우하고 싶지 않았던 게다. 남들은 통통한 면발을 후루룩 후루룩 먹을 때 난 조용히 숟가락으로 짬뽕 밥 안에 밥알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세어 가며 그 쌀알의 탱글탱글함이 소중해 오래오래 아껴 씹었다.
그렇게 30대도 40대의 나도 밀가루 음식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나이에 따른 기억력의 퇴색일까? 아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걸까...
아님 그런 그런 시간이 흘러 흘러 50대에 진입한 어느 해쯤부터 밀가루 맛에 대한 과거 기억이 소멸된 것일까….
2020년 이후 ’ 빵’이 너무나도 유행처럼 내 주변인들에게 퍼져 지인들이 밥보다는 빵에 빠져 있었다. 간식으로 먹었던 빵이 이제는 식탁에서 어느새 부식에서 주식으로 한 끼 식사로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나 역시 어느샌가 그들 옆에서 안 먹겠다는 내게 굳이 맛이라도 좀 보라는 그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빵에 조금씩 맛을 보다가 어느 순간 빵순이가 되어 버렸다. 그동안 몇십 년 안 먹은 밀가루를 이제서야 보상받듯 근 40여 년간 못 먹은 밀가루 양을 모두 먹어내야겠다는 듯 나는 빵 예찬론자가 돼있었고 소금 빵을 비롯 모든 빵에 대해 마니아가 돼있었다. 오죽하면 나의 아이디도 ‘소금빵 먹는 로샤’로 정할 정도로 밀가루를 먹는 순간은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의 내 모습이 되었다.
기억은 새로운 추억으로 희색 되나?
힘들었던 시절의 밀가루는 내게 지겨운 음식으로 각인됐었지만 어쩌면 지금의 내 성장을 도운 고마운 일부분이다. 그리고 어려웠던 시절의 내가 지나가니 이제는 그 기억의 밀가루도 내게 추억이라는 고마운 음식으로 아로 새겨진 평안한 내가 있다. 인생의 지겨웠던 무언가가 어느 시점에서도 마냥 지겨운 무언가는 아닌 듯하다. 그 지겨운 것이 또 현재의 나를 성장하고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될 수도 새로운 의미로 새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밀가루로 지난한 성장기를 보낸 내가 중장년이 되어 이제는 다시 밀가루 ‘예찬자’가 되었다. 지금 내가 지루해 하는 어떤 것도 미래의 내게는 어떤 자양분으로 토대가 되 고 추억으로 기억으로 소환될지 모르겠다. 그러기 위해 지금 나의 과제는 복잡한 거 말고 단순하게 오직 지금 내 앞에 놓인 따뜻한 카페라테 한 잔과 그 옆에 새초롬하게 놓인 소금 빵을 먼저 맛있게 즐겨야 할 순간인 것 같다. 오케이 롸잇 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