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경미 Mar 25. 2024

4부 엄마, 미안해!

4-1 엄마의 보물 보따리

엄마 집 소파에는 늘 올망졸망한 보따리 3개가 엄마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있다. 그 보따리 속을 들여다보면, 어느 날에는 양파 썬 것과 당근이 랩에 돌돌 감겨서 들어 있고, 또 어느 날에는 귤 껍질, 사과 껍질이 들어 있기도 하다. 엄마가 주간보호센터에 가고 나면 보따리를 풀어서 내용물을 다시 정리해 두는 게 하루의 일과 중 하나다. 물론 보자기는 잘 안 보이는 곳에 꼭꼭 숨겨놓는다. 그러나 엄마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어떻게 찾았는지 보자기를 다시 찾아와 옷가지며 성경책이며 귤이며 이것저것을 골고루 야무지게 다시 챙겨 보따리 속에 다시 싸놓는다.     


“엄마, 왜 이렇게 보따리를 챙겨두었어?”

“집에 갈 거야!”

“여기가 엄마 집인데?”

“아니야~, 우리 집 가야재! 남의 집에서 너무 오래 살았어!”

“어떻게 갈려고?”

“니가 돈 좀 주라. 내가 집에 가면 두 배로 줄게.”

“여기서 나랑 살면 되지 어딜 간다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 산소 가서 엎드려 절도 해야재.” 하며 엄마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엄마 집이 어디인데?”

“반룡리 716번지!”     


엄마는 어렸을 적 자기 집인 친정집 주소를 어찌 지금까지 알고 있을까? 신기하고 기이할 뿐이다. 시집와서 자식 낳고 50년 이상을 살던 자기 집 주소는 까맣게 잊어도 어렸을 적 친정주소는 기억에 남아있나 보다. 엄마가 시집와서 고생하며 지냈던 외딴집에 대한 기억 등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틈만 나면 우리 집에 가야 한다는 말만 입에 달고 사신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할 것 같으니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우리집‘에 언니랑 같이 시간을 내서 한번 외갓집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엄마의 유일무이한 목적이 오로지 친정에 가는 것인가 싶었다. 우리는 엄마를 모시고 친정 가족이 모두 모여있을 추석 명절에 맞추어 외가로 향했다. 귀성행렬로 차량정체가 아주 심했다. 차 안에서 엄마는 “어디를 가냐?” “뭘라 이렇게 멀리 움직이냐?” 등등 아무리 설명해도 계속 묻고 또 묻는다. 잠이라도 주무시면 좋으련만 우리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남편이 8시간의 장거리 운전 끝에 드디어 엄마가 그렇게도 오매불망 못 잊어 하던 엄마의 친정에 도착했다.  

   

치매는 가까운 일에 대한 기억은 못 하지만 과거의 추억은 다 기억한다는 말에 현혹되어 엄마가 보일 반응에 큰 기대를 했었다. 엄마가 옛날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나면 어떻게 반응할까? 제일 예뻐하던 외삼촌을 만나면 어떻게 할까?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당신이 낳고 자란 옛날 그대로 보존된 친정집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여기가 어디다냐? 왜 나를 여길 데려왔냐?” 안절부절못하며 집에 가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엄마의 피붙이들인 남매들을 만나도 전혀 기억을 못 했다. 엄마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외가 식구들만 눈물바다에 빠뜨리고 말았다.     


무엇이 엄마를 이토록 기억의 저편으로 데려갔을까? 외가에서 보낸 1박 2일 동안 엄마는 잠도 안 주무시고 집에 갈 생각밖에 안하셨다. 가져온 보따리와 성경책을 품에 안고 문마다 열어젖히며 “나가는 곳이 어디냐? 내 신발 어디 있냐?” 소란을 피우셨다. 당신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욕까지 해가며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모두가 겁에 질려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불침번을 서야 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어 3시간쯤 주무시고 일어나서는 정신이 좀 드는지 “여기가 어디냐?”고 묻기도 하고, 외숙모를 보고 “동상댁인가?” 묻기도 해서 이제 정신이 들어왔나 싶었다. 마침내 내 누나, 내 형님으로 돌아온 것에 가족들은 감격하여 너무 좋아한 나머지 지난 밤의 악몽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엄마의 막내 남동생은 “누님! 누님!” 하며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볼을 비비며 꺼이꺼이 우셨다. 슬픈 감정인지 울고 있음을 인지하신 것인지 엄마도 소리 없이 따라 우셨다.     


언니는 엄마 손을 이끌고 어릴 적 추억이 깃들었을 만한 곳으로 모시고 갔다. 집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뒷동산 대나무숲을 가리키며 “여기 생각나요? 죽순도 생각나요?” “몰라.” “이 토굴알제?” 물어도 모른다고 고개만 젓는다. 6.25 전쟁 때 피난용으로 사용했던 토굴에 얽힌 사연을 한가지라도 떠올릴까 싶어서 계속 옛일을 상기시켜도 모른다고만 하셨다. 잠시 동안 반짝 돌아왔던 정신은 다시 멀어져 가버렸다. 다시 집에 가자고 아기처럼 졸라대기만 했다. 실망스러워 온몸의 기운이 쫙 빠졌다.     


외가 가족들과의 이별 장면은 또다시 눈물바다였다. 엄마는 노래를 좋아하시기에 노래를 하게 해서 다시 도망간 엄마의 정신을 되찾아오고 싶었다. 내가 “시, 시, 시작!”이라고 말하면 엄마는 늘 반사적으로 엄마의 18번 노래 ‘섬마을 선생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랑 살면서 자리 잡은 습관이었다. 외숙모도 노래를 잘 하시니 분위기도 살아날 것 같았다.     


“엄마! 시,·시, 시작!”     

해~당화 피고 지이는~

♪~ ♬♩~~ ♬  ♫  

서울~ 앨랑~ 가지~를 마~오

가~ 지~를~ 마~~~ 오     


작별 인사를 나온 삼촌과 외숙모들 줄잡아 10여 명이 모두 엄마와 함께 합창을 했다.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외숙모가 또다시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메들리 식으로 이어 부르기 시작했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 ♬♩~~ ♬  ♫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이 대목에선 모두가 눈물 콧물 범벅되어 목이 메어 겨우 마무리를 지었다.  

   

노래가 끝나자 갑자기 엄마가 정신이 들었는지 “모두 다 건강하게 잘 있소잉~.” 인사를 한다. 엄마의 이 한마디에 또다시 오열하는 식구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디 갔다 왔어? 누구 만난 거 기억 안 나? 엄마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엄마 집에 갔다 왔잖아.” 해도 아무 반응이 없고 모르겠다는 듯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언니와 내가 엄마의 기억에 생명을 다시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건만, 그 여정을 엄마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누가 옛날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주소를 물으면 여전히 친정집 주소는 정확히 기억해냈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언니와 나는 그래도 엄마의 소원은 들어준 셈이라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서로를 위로했다. 차 안에서도 엄마는 여전히 보물 같은 보따리를 옆에 소중히 끼고 최애 가방인 빨강 손가방을 오른손에 꼭 쥐고 계셨다. 그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친정집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되었다.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다. 어찌 되었든 엄마의 친정집에 가고 싶다는 소원은 이룬 셈이었다.     


그래도 순간순간 기억이 날까? 엄마의 머릿속이 참 궁금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3부 안쓰러운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