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엄마의 자살소동
엄마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킨 후, 우리는 이제 엄마의 걱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입원한 지 4개월이 지나도 병원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내 집 타령을 하는 엄마로 인해 병원 직원들이 애를 먹고 있었다.
처음에는 환자복도 입지 않겠다고 거부하고, 병실에도 들어가지 않고 휴게실에서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지만, 보통의 다른 환자들처럼 며칠 지나면 적응할 거라고 기대했다. 허리 골절로 허리에는 늘 보호장구가 채워져 있었지만 잠시라도 감시가 소홀해지면 어느새 보호장구를 벗어던져 버리기 일쑤여서, 병원 식구들의 감시는 필수였다. 그나마 동생이 근무하는 시간에는 조금 온순해지지만, 동생이 퇴근하거나 비번으로 동생이 없는 시간에는 다른 간호사 선생님들과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이 더욱더 힘들어했다.
엄마는 여기는 내 집이 아니라며 요양병원 복도를 오가며 내 방이 어디냐고 늘 서성거렸다. 집에 보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다가, 급기야는 창문에서 뛰어내린다고 의료진을 협박하기까지 했다. 밤이 되면 내 방이 없다며 휴게실로 샤워실로 이리저리 다닐 때가 많았다. 어느 주말 집에서 쉬고 있는 동생에게 병원에서 한 장의 사진이 전송되었다. 엄마가 화장실 타일 바닥에서 웅크리고 자는 사진이었다. 동생이 그 사진을 가족 대화창에 올렸다. 나는 그 사진을 마주한 순간 내게는 충격이었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슬픔과 무력감이 동시에 몰려오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적응하지 못하고 지낸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늘 불안하게 지냈는데 그 사진은 마치 엄마를 집으로 데려오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저런 스트레스로 인해 치매가 더 악화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증폭되었다. 남편의 눈치를 봐가면서 조심스럽게 엄마 사진을 보여주며 엄마를 당장 모시고 오자고 했다. 착한 남편은 두말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엄마를 모시러 갈 채비를 해주었다. 엄마를 모셔 오려면 최소한 왕복 10시간 이상은 소요되기에 서둘러야 했다. 아침도 먹기 전이라 간단한 먹거리를 챙겨 쉬지 않고 달려갔다. 엄마를 다시 모시고 오면 우리의 생활에 또다시 제약받는 일이 많아질 거라는걸 알면서도 흔쾌히 장거리 운전까지 마다하지 않는 남편이 너무나 고마웠다. “여보, 고마워!” 하며 남편의 손을 잡았다. 남편은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며 오히려 내 건강이 더 걱정된다고 위로해주었다.
도착하니 동생은 퇴원 절차를 다 끝내고 엄마와 함께 병원 현관에 나와 있었다. 엄마를 보니 너무 반가워서 먼저 꼭 안아주었다. “엄마, 이제 다 나았으니 집에 가자.” 엄마의 표정이 환해졌다. 엄마의 소지품들과 휠체어까지 엄마의 이삿짐을 차에 실었다. 동생은 또 고생할 언니가 안쓰러워 근심 어린 얼굴을 한 채 엄마를 태운 우리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다행히 엄마는 압박골절로 인한 부위는 거의 나았는지 더 이상 보조기구를 안 해도 되었다. 멀리 나갈 때는 휠체어를 사용하면 되고 집안에서는 엄마 혼자서 거동을 할 수 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불쌍한 우리 엄마, 더 잘해드려야지!’
더 이상 날 찾지 말라고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왔던 지난날이 생각났다. 내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이젠 엄마 품에서 잘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소중한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다시 또 얼마나 힘들어질까 까마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매일 집을 그리워하며 소동을 피웠던 엄마가 내 곁에 오니 늘 불안했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그 불안했던 4개월간의 병원 생활을 보상해주기 위해 엄마를 더 많이 사랑해주기로 결심했다.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이별 앞에 절대로 후회스러운 일을 만들지 않기로 말이다.
허리는 나아졌지만 누우면 혼자서 일어나기 힘들고, 그렇다고 내가 일으켜 세우기에는 엄마의 덩치가 커서 한번 일으키려면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그 때 병원에서 사용하는 침대를 복지 용구사에서 대여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밤사이에 소변 실수가 잦아져서 침대에 방수포를 깔았지만 엄마의 빨래를 해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나와 엄마 간병을 같이하자며 직장까지 바꿔가며 달려온 언니 덕분에 밤에는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쓸 수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언니는 밤사이 엄마의 돌발 행동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지만 말이다.
엄마는 다시 주간보호센터에 다닐 수 있을 만큼 거동이 좋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인지능력은 중증 치매 환자가 되어갔다. 매일 아침 옷을 챙겨주면 늘 내 옷이 아니라며 내팽개치고, 내 옷 달라고 생떼를 부리기 일쑤였다. 겉옷을 두 벌 세 벌씩 껴입질 않나, 여름인데도 겨울 코트를 꺼내와서 입는다고 고집을 부리질 않나 마치 유치원생이 떼를 쓰듯 끊임없이 말썽이었다.
그래도 아주 초기의 고약한 치매가 아니었고 언니와 두 사람이 분담하는 간호였기에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주말이면 세 자매가 모여 맛있는 거 사드리고 가까운 곳 구경도 다니며 다시 못 올 엄마와의 추억을 쌓아갔다. 다시 모시고 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이런 모녀들 간의 데이트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귀하게 여겨졌다.
시설에 모시는 것은 환자 가족뿐만 아니라 환자에게도 커다란 심적 부담을 갖게 된다. 물론 환자가 새로운 환경에 금세 적응하게 되면 훨씬 수월하게 진행되어 모두의 걱정을 덜겠지만, 우리 엄마처럼 몇 개월 동안 이런 사태가 지속된다면 병원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이 문제로 편할 날이 없다. 당신 딸이 있는데도 적응을 못 하는 우리 엄마를 보면 다른 어르신들은 얼마나 더 고단한 적응 기간을 보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병원마다 적응 프로그램도 있지만 이런 경우 자식들이 수시로 방문하여 적응을 쉽게 도와주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