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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미 Apr 08. 2024

제5부 다시 시작된 돌봄(이번엔 잘할 수 있을까?)

5-1 아버님의 어머니 병구완

시댁의 시외할머니가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그 가족의 내력이 있기에 우리는 어머니도 그러하지 않을까 늘 예의주시하며 살아왔다. 역시나 어머니의 치매는 잦은 건망증으로 시작되었다. 건망증이 점점 도를 지나치더니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어머니의 전화가 이어졌다. 발신인이 어머니로 표시된 전화는 벨이 두세 차례 울리다가 바로 꺼지기를 반복했다. 곧바로 다시 전화하여 ”어머니, 왜 전화하셨어요?”라고 물으면 “그냥 궁금해서….”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 못 할 고민이 생겼나, 그래서 자꾸 망설이며 전화하시는 건가 생각했지만, 뒤늦게야 모든 자식에게 하루에도 수십 차례 전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은, 바로 전에 본인이 전화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 했던 것이다.   

  

그 이후 베트남 효도 여행 중에 더 경악할만한 사건이 있었다. 리조트의 야외수영장에서 어머니는 실내와 실외를 구별하지 못하고 야외에서 수영복을 갈아입으려 하는 것이 내 눈에 띄었다. “어머니, 안돼! 저기 봐봐, 사람들이 많잖아! 우리 호텔 방에 들어가서 갈아입어야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쳤다. 그뿐인가! 남편의 옷을 본인 것으로 알았는지 아들의 셔츠를 입고 있던 어머니. 어머니의 건망증이 점점 심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다니 걱정이 점점 커졌다. 결국 어머니는 걷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면서 격년으로 같이 다녔던 효도 여행도 더 이상 다니지 못하고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어머니의 치매가 심해질수록 아버님의 불만 섞인 전화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느그 어머니가 시장을 봐와도 이제 반찬도 못 한다, 느그 어머니가 이제 똑같은 반찬을 여러 개 차린다, 현관 비밀번호도 몰라 집에도 못 들어온다.” 하며 속상해하셨다. 또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화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엔 아버님을 향한 의부증 증상이었다. “느그 아버지가 지금 저 작은방에서 그년하고 같이 있다.”, “느그 아버지랑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왔는디~ 그 식당 여자랑 머라 머라 소곤거리고 시시덕거리더라”, “느그 아버지랑 못 살겠다 어쩌끄나? 이혼을 해야 쓰것냐?” 내 전화는 번갈아 걸려오는 두 분의 전화로 새벽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울려대기 일쑤였다. 나는 나대로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어머님의 이런 의심은 아버님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손주들까지 다 모인 자리에서도 욕까지 섞어가며 거리낌 없이 “그 여자랑 만나니 그렇게 좋소?, 대답을 왜 못하요? XXX” 아버님의 당황한 모습에 눈치 빠른 나는 얼른 어머니 손을 이끌고 부엌으로 잡아끌어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려야 했다. 어머니 관심은 오직 하나 아버지와 그 여자에게 꽂혀있었다. 대상은 실존하지도 않은 인물이었다. 그 여자는 어머니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아버지 말로는 어머니는 자다가도 눈만 뜨면 시간과 관계없이 악다구니를 쓴다고 했다. 어떤 날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장롱에서 아버님 옷들을 죄다 꺼내 던지셨다. 더 이상 같이 못산다며 가방 챙겨 나가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억울함과 분한 마음이 역력했고, 눈에서는 불꽃이 뿜어 나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식들이 돌아가면서 시간 나는 대로 시댁으로 달려가 싸움을 중재하고 화해시켜야 했다. 우리는 억울해서 어이없어하는 아버님을 붙들고 아버님이 진실로 사과하는 제스처를 보여 주라고 주문했다. 아버님은 어머니의 두 손을 부여잡고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하며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때뿐이었고, 돌아서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치매란 그런 것이었다. 자식들의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 되었고 원점으로 돌아갔다.     


매일 같이 어머니의 의심과 폭언에 시달리던 아버님은 죽어버리고 싶다고 했다. 본인을 그 나이에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는 사람으로 소문을 내니 창피해서도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셨다. 그러한 스트레스로 아버님은 거의 매일 술로 사셨고, 술김에 매일 나에게 전화로 하소연하곤 하셨다. “쓸데없이 니한테 미주알고주알 하고 있구나! 미안하다! 그런데 솔직히 살고 싶지 않다. 느그 어머니는 나만 보믄 나가라고 난리다. 시도 때도 없이 밤에 일어나 소동을 피우니 잠도 제대로 못 잔다.” 등이 아버님의 반복되는 하소연이었다.     


지금에야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아버님께 조금 더 공감하고 위로해주면 좋았을걸! 그 당시엔 내가 친정엄마를 돌보며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기 때문에, 내 입장과 똑같은 주 간병인의 위치에 있는 아버님을 이해해 줄 여유조차 없었다. 아버님도 나처럼 지옥에서 살고 계셨던 것을···. 너무 힘드신 시간을 참아내느라 암에 걸리신 건 아니었을까? 아버님을 이해해주지 못해 더욱 죄송스럽고 미안하기만 하다.    

  

사람이 어떤 일을 겪든 공감해주고 이해해주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일을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오롯이 이해하고 공감해줄 수 없다. 그러나 노력할 수는 있다.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만일 내가 아버님이라면, 만일 내가 그 입장이라면 이렇게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당시 내가 처한 내 사정만 중요했지 아버님의 입장은 간과하고 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버님의 입장을 헤아려보려 노력했다면 지금처럼 가슴 아픈 후회는 없지 않았을까? 지금에라도 아버님께 말하고 싶다. 아버님, 그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인제 그만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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