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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산 Sep 23. 2024

가난과 불화와 폭력의 상관관계에 대해

下犬之書:부자가 되고 싶은 그대에게 (2)-철학적으로 완벽해지기 위해

들어가는 말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청년이 있습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살다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경제적 빈곤을 겪고 온갖 노고 끝에 자수성가의 기초를 마련합니다. 그는 위험한 지역에서 위험한 일을 하며 자본금을 모았고 금융공학지식을 통해 부를 축적해가며 자본시장에서 조금씩 성공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경제작가로 성공하겠다는 목표와 '자기 사람들' (가족과 고객)을 지켜내는 미래를 선포하며 글을 씁니다. 


그런 그를 응원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전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실패와 가정의 불화 사이에 인과관계의 화살표를 잇습니다. 


그러고보니 만약 그가 꿈꾸는 미래 속에서도 잘못된 철학적, 논리적 분석의 문제점을 꿰뚫어보지 못한다면 그가 경제적 성공을 이뤄낸다해도 인간관계 속의 '성공'을 이루내지 못할 것 같아 노파심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경제작가로서 경제적인 성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작가의 독자들에게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속 경제만능주의의 대중이 원하는 게 그거다. 하지만 만약 그게 전략적인 마케팅이 아니라 정말 본인의 진심이고 유일한 사고법이라면 위험하사각지대를 못 보고 있는 게 된다. 


어차피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인지, 본인의 생명이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겸허한 마음, 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체득한 것을 나누고 싶어하는 것, 그가 절망적인 교만 속에 있지 않다는 단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더 큰 성공에 휩싸이기 전에, 무명작가의 ‘충언이 되었으면 좋을 조언‘을 무시하는 게 당연해지기 이전에 글을 써본다. 


부자가 되고자하는 그대의 성공을 응원하는 독자로서 가치 있는 서신이 되길 바라며.

또 그대와 같은 경제적 성공의 과대평가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철학적으로 완벽해지고 하는 그를 위해 던지는 질문:


가난은 불화를 부르는가? 불화는 폭력을 부르는가?



그가 그리는 꿈에 대해 읽을 때마다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제적 성공과 그 지식을 나눔으로서 ’가족'과 '자기 사람들‘(친구와 고객)을 지켜내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 겪은 경제적 불운을 모든 문제의 시초라고 보기 때문이죠. 

부친의 사업이 망하고나서 겪은 일들과 그걸 극복해온 과정 속에서 얻은 결론에 대한 반문으로 시작해봅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실패 전까지 경제적으로 유복하게 지냈을지 모릅니다. .

그런 상황에서 거시경제적인 흐름 속에서 찾아온 파도를 이겨낼 미시경제적 대비가 없었던 부친의 실패를 목격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살아오던 삶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졌고 그런 경제적 고난이 (그전까지 괜찮은 사람이었던) 부친이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거라는 결론을 내린 게 아닐까 싶어요. 



(1)  가난이 불화를 부르는가?


IMF시절이나 ‘빅쇼트’의 시절이나 가난을 마주한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가정이 경제적 빈곤을 인간관계 속 정서적 빈곤으로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가족간의 화목이 부유한 환경 속에서 불화보다 낫다는 이야기.

이건 역사 속 절대적 고전이자 유대인들의 지혜서인 ‘잠언’에서부터 전래동화 ‘흥부와 놀부’에서도 담겨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 NBA의 대스타가 된 르브론 제임스나 케빈 듀란트부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리오넬 메시… 마음만 먹으면 더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겠죠. (미국힙합계에서도 알만한 이름의 유명랩퍼들이 대부분 편부모가정에서 자라기도 했습니다. 이건 다른 사회문제를 이야기해야 하지만)



가난 자체가 불화를 부르지 않는다.

불화를 부르는 건 다른 곳에 있다.


불화가 물리적 폭력을 부른다는 결론은 그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경험을 토대로 내린 '주관적 결론'이죠. 그런 상황이 ‘상대적 다수’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가난 자체가 불화와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결론을 내리는 건 성급합니다.



유명인의 삶은 거리가 머니 제 삶을 풀어봅니다.

기억에 없는 대기업 과장의 아들로 삶이 아마 7세까지는 이어졌나봅니다. 

80년대 중후반의 사진을 보니 집에는 ’인켈 오디오‘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회사 문화상 보편적이었던지 같은 회사 친구의 ’연대보증‘을 서주었고, 그리고 채무자가 되었습니다. 건강의 악화와 또 다른 계기로 회사를 그만두고 5년 이상 수입이 없는 대학원생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 후 겪은 삶은 기억이 납니다.



그가 겪은 빈곤과 비슷했을까. 

아니면 그는 더 유복한 상황에서 누리던 걸 박탈당해서 더 충격이 더 컸을까? 

그가 겪은 것보다 10년 일찍 시작된 가난이었다.


92년도부터 94년도까지 살았던 집들에는 화장실이 실내거주 공간 안에 없고 밖에 있었습니다.

생일이 되어 반장을 하며 친해진 여자반장과 남자 부반장을 집으로 부르기 까지 큰 내적갈등이 있었고 그 이후 후회도 있었죠. 우리 집은 화장실을 가려면 달도 보고 별도 보고 모기도 만나야 하는 산동네였고, 그 친구들은 아파트에 살던 애들이었으니깐요. 하지만 그 때는 아파트에 사는 게 더 좋은 건지도 잘 모르고 그냥 '다름'으로 인지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전 초등학교 시절 경사가 가파른 산동네 집들도 살아보고, 몇년 후, 평지에 내려오게 50대 술주정뱅이를 아들로 둔 연로하신 어머니가 집의 반을 세 놓아 플라스틱 파티션으로 갈라놓고 베란다쪽에 주방을 만든 오래된 빌라 2층의 한 구석에서도 살아봤어요. 그 다음 집으로는 처음으로 ‘내 방’이 생긴 5-6학년의 일부를 보낸 반지하 ‘쓰리룸’이었어요. 책상이 들어가고 자리를 펴서 누우면 공간이 없는 그런 작은 방이 제 첫 방.


그런 삶을 살았을 때도 제 아버지는 폭력을 보이지 않으셨어요.

어머니와의 불화도 없었구요.



표면적으로 그 차이를 찾아보자면  우선 ’술‘에서 찾을 수 있겠네요.

아버지께서는 군대에서 선임에게 두드려 맞아도 술을 안 마시던 ’술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생활고가 부른 마음의 고생을 술로 해소하고 인사불성이 되어 화풀이를 가족에게 하는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거죠


꼭 가난이 불화를 가져올 필요가 없고, 불화가 꼭 폭력을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논리적 흐름도 아니며 순리도 아닙니다.

그건 그가 겪은 안타까운 비극의 흐름이었을 뿐입니다.



수십년 후 성인이 되어 가난한 대학생이던 시절. 

제 아버지는 당시 연대보증을 선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잠적해 있었다고 해요.)

아버지께선 빚을 갚으라고 하지 않고 용서한다는 말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바보 같은 선택이죠.

제 동생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구요.


전 아버지가 돈이 세상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큰 감흥이 없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이었을지, 사라진 아파트 1채라는 게 어떤 건지 무주택자로서 조금씩 감이 오는 것 같긴하지만요.


그의 개인적 경험과 제 경험은 유사한 경제적 환경의 변화에서 서로 다른 서사구조와 결론을 보여줬다.


그렇게 그대보다 10여년 먼저 태어난 제가 겪은 삶은 시대적 배경의 차이만 있었을까요? 아니면 우연히 제 아버지의 ’성품’이 더 나아 제가 그런 불화와 폭력을 겪지 않은 거였을까요? 아니면 그가 놓치고 있는 뭔가가 있을까요?


그런 그를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된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Q1.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과거 원인분석에 제대로 적용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원래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게 가장 어렵다고 하죠.) 

Q2. 혹시 경제라는 한 가지 렌즈만을 통해 패인(敗因)을 분석하고 승리를 위한 전략을 세운 건 아니실지요? 

(원래 한 가지 분야에 해박해질수록 그 관점으로 세상만사를 해석하려 하죠)


만약 경제적 실패와 불안정이 가정의 불화를 일으킨 게 아니라면, 미래의 리스크를 대비하려는 그 전략에도 구멍이 있을 수 밖에 없겠죠



가족과 ’내 사람들(my people)’의 경제적 안정을 이뤄낼 수 있는 경제적 혜안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들 이런 철학적 구멍을 놓치고 있다면, 애써 이뤄놓은 부유한 삶이 그 목적에 달성하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부유할 때만 ’화목한 가정‘이 과연 화목한 가정일까요?

화목할 때만 폭력적이지 않은 가정이 과연 진정한 가정일까요?


그보다 10여년 먼저 태어난 저와 그의 경험차이는 경제적 상태에서 오지 않았을 거에요.

그 근원은 다른 곳에 있을 겁니다.



(2) 사람은 무엇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신의 존재가치, 정체성, ’행복‘, 즐거움, 생명의 이유… 각자 다른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가장 보편적인 단어를 쓰자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서 나온 차이일 겁니다.


저의 아버지는 ’돈‘이 가장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낭만적이셨고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구석이 있었죠.

빚이 생겼고 가난해졌지만 그래도 무너지지 않게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글로 상세히 설명하려 합니다.)

아버지께선 돈 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달리 좀 더 경제적인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지만 돈 없이 돈 욕심 없이 살 수 있는 가치관의 기반을 제공해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돈 욕심없이 조급하지 않을 수 있는 심리가 여론에 흔들리는 대신 독자적인 판단을 하는 투자전략을 유지할 수 있게 도움이 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주유소에서 불쑥 나타나 와이퍼를 갈아주겠다는 청년의 열의를 응원하고자 와이퍼를 교체한다거나…하는 제 기준으로 ‘어리석은’ 일을 하시기도 합니다.
아이를 태우고 병원을 가는데 비가 내려서 와이퍼를 작동시켜보니 시야가 흐려지는 위험한 와이퍼였습니다. 교체되어 ‘사라진’ 원래 차량의 와이퍼 가격은 8만원 대입니다.


‘일반적인’ 많은 사람들에게는 ’경제적 안정‘이 ‘보편적인’ 목표이자 성취감/만족감/행복의 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경제력‘은 여러가지 편리함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력으로 살 수 없는 것, 지킬 수 없는 것도 있어요.

그걸 모른다면 그는 철학적으로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이 감히 완전해질 수 있다면 말이죠)



(3) 부의 양면성


부는 양날의 검입니다.

부를 만드는 법과 유지하는 법만 알고 있다고 가족이 화목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부에 불화를 겪는 가족도 수두룩 합니다.

(유산이 많은 집일 수록 유족들은 고인을 잃은 슬픔보다 공증받은 유언장의 내용에 촉이 곤두서지요.)


그는 부가 가족의 화목을 잃게 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면 아버지와 근본적인 가치관을 공유하는 게 아닐까 우려됩니다.


돈이 있기 때문에 화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돈이 없어졌을 때는 돈이 다시 생겨야 화목해질 수 있는걸까요?


‘아버지의 실수를 재현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자수성가해서 새로운 가문의 영광을 이뤄낸 그의 미래.

만약 그런 그가 근본적으로는 아버지와 같은 가치관에 다른 경제상태 혹은 금융지식만 얹혀져 있는 거라면,

그건 그가 원하던 미래가 아닐 거라 생각됩니다. 예상이자 예견이자 예언입니다. 


금융지식이 없던 아빠와 금융지식이 있는 아들.

지식의 차이와 경제력의 차이만 존재한다면 달라진 건 경제적 상황 뿐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불가항적인 거시경제의 악화 속 쌓아놓은 부를 잃게 된다면?

그 가족은 다시 불화와 폭력으로 빠져야 하는 걸까?



(4) 경제적 성공을 마주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또 다른 날개


워렌 버핏도 찰리 멍거도 자신의 성공에 ’운‘이라는 요소를 빼놓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인간미 넘치는 애널리스트 이광수 님도 마찬가지이다.

 이광수: GS건설, 미래애셋대우 리서치센터을 다녔고, KBS 〈최경영의 경제쇼〉에서 ‘이광수의 부동산 이야기’라는 코너를 진행 중이다. 수차례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선정되었으며 2019년에는 블랙 스톤과 로이터통신이 소유한 글로벌 리서치 기관 Refinitiv에서 수여하는 ‘Analyst Awards 아시아 최고 애널리스트(Overall Top Stock Picker)’를 수상했다. (교보문고 인물소개 인용)
이광수 작가님 책 

거시 경제의 흐름을 읽고 탈 줄 아는 것도 실력이지만 그 흐름을 만들어내는 건 투자자가 아니죠.

(물론 흐름을 만들어내는 거물이 되면 그 때부터는 예측이 시장을 움직이니깐 더 부를 쌓기 쉬워질 거라는 것엔 동의합니다. )

그 '운'이란 것에 대한 자각은 자신을 좀 더 겸손하게 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여유를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여유는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지 않았을 때 누릴 수 있는 투자에 대한 안전감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기부'를 연습하는 이유'돈'에 지배 받는 대신 '돈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과 연결시킬 수 있다.

전 한 유대인 작가에게 자신의 성공에 '운' (혹은 '신')이 차지하는 비중을 일부 인정할 때 부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배웠습니다. 실제로 그걸 실천하는 사람들이 경제적 성공을 누리는 걸 직간접적으로 봐오기도 했구요. (그저 세금공제의 관점에서만 보면 얕아질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살아오며 겪은 수많은 역경, 그리고 지금까지 유지된 생명에 대한 ‘감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걸 통해 얻은 지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기여하고자하는 귀한 마음.

이 둘 만으로도 저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일 겁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그라 응원합니다.


앞서 말했듯 제가 그대와 공유하는 부분은 은근히 보입니다.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도, 자기관리에 대한 엄격함,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해 눈치보지않는 “깡따구” 등… 찾자면 더 찾을 수 있겠죠. 심지어 어떤 오만한 과학자들처럼 신의 부재를 확신하는 오만함 대신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게 했다는 결론을 내린 그 모습도 제가 그대를 더 ’성장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제게도 과거를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스며든 표면적 스토아 철학도 공감을 더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의 구멍과 세네카의 자살이란 역사적 사실은 스토아 주의의 한계를 깨닫게 해줬습니다.) 술을 멀리하는 모습도 잠재고객들에게는 어필이 될 '신뢰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술에 취해 시장 동향을 놓치는 걸 원치 않을테니. 오히려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제가 더 '독하고 별난 놈'인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요.


전 그의 글과 성실한 노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하길 원합니다.


그렇기에 그가 경시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작가로서 성공하려면 필요한 부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이 경제적 성공을 쫓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경제적 성공이 행복을 줄 거라는 '오해'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오해에 기대어 정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님 그 사람들의 마음 속의 '구멍'을 꿰뚫어보고 그걸 메워줄 수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게 위대한 작가가 될 방법일까요? 


그가 겪은 '재기를 위해 걸어온 삶'이 '그저 사실'이 아니라

더 강한 그를 만들어낸 연단의 길이었던 것처럼... 

그가 청소년기에 겪은 슬픈 과거는 '경제력'이상의 핵심가치를 갖지 못한 가장의 절망 속에서 시작된 '불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 밖에 없었어서' 였을 수 있다는 거죠.)



팬들은 라이킷을 누르고 갑니다.

(제 실험결과 실제 읽은 비율은 엄청 낮습니다. 구독자가 많을 수록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하지만 전 없는 시간을 쪼개어 마음에 걸리는 그를 위해 이 글을 남깁니다.

주변인이 없을수록 듣기 거슬리는 ‘충언’을 들을 기회가 적을 수 있으니.


마음이 가난한 부자는 소중한 이들의 경제적 안녕을 유지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과의 화목을 유지할 수 없을 겁니다.


부가 목적 자체가 되면 부를 이룬 후에도 즐겁지 않을 겁니다.

(즐겁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고 멋지게 말해도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즐거움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충실한’ 혹은 ‘의미 있는’ 삶과 같은 결에서 하는 말이에요.


그건 마치 건강과 자기 관리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담배라는 중독을 놓지 못하는 모순과 유사합니다.

철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관점에서보면 그건 연약한 중독자의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의 성공을 보고 싶은 사람으로선 끊어내야할 중독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는 RAT RACE에서 벗어나라고 말하지만,

결국 또 다른 CAT RACE를 소개하고 있다. 

인생은 RACE가 아닐 거다. 


시작점과 종착점이 다 다른 삶 속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국민이라고 삶이 꼭 경주여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잘 달리는 법은 알아두는 게 좋겠지만.





2024년 가을밤,


두서없이 결말 없이 정성과 진심을 담아

아이들이 잠든 소중한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OVERCAT” 빙산 올림

OVERCAT

*요청 받지 않은 답장(1)에 이어...

https://brunch.co.kr/@thewholeiceberg/119



후기: 


그리고 그는 제게 '구독할 수 없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쓰는 편지는 여기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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