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셋 육아 4학년, 친구의 아내에게 편지를 쓰다
편지의 배경
나와 같은 해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었던 친구 부부.
오랫동안 아이를 소망해오던 그들에게 아이가 생겼다.
결혼하기 전에도 예비 아내를 소개를 받았고,
결혼한 후에도 부부가 되어서도 만남을 이어왔던 친구이다.
난 국제결혼을 했는데 이국타향살이(?)를 하는 아내를 버려두고 혼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건 왠지 꺼려진다. 그렇다고 서로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각자의 아내를 데리고 만나는 건 어려웠을텐데, 다행히 나와 친구의 아내는 서로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일년에 한 두 번 만나면서 결혼하며 마주할 수 있는 ‘다름’과 ‘어려움’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결혼 전에도 인생의 여러 주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의견을 주고 받던 친구이다. 결혼 후에도 그를 잃는 게 아니라 그의 아내도 내 아내의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그 부부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다.
이 글은 '아이셋을 먼저 낳아 기르고 있는 아빠'가 만삭이 된 친구의 아내를 위해 쓰여지고 있다.
의도적 논란을 부를 수 있는 ‘사랑하는 친구의 아내를 위해 쓰는 육아편지’ 라는 제목도 머리를 스쳐지나 갔지만 ‘클릭베이트’식의 제목은 피하기로 했다.
띄어쓰기를 두 개 쓰는 문법은 한국에 없기에 중의적이 될 수 밖에 없다.
Q. 왜 친구가 독자가 아니라, 친구의 아내인가?
내 친구는 바쁘다.
의사를 하다가 새로운 걸 배우겠다고 대학원에 갔다.
박사가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던 중에 아이가 찾아왔다. (어쩌면 ‘찾아갔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그 둘의 삶 속에 선물 같은 아이가 친구 아내의 배속에서 자라고 있다.
경험상, 바쁜 남자들은 육아에 대한 공부를 할 시간이 없다.
어떤 이들은 관심부족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르겠지만 직종에 따라 정말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적당히 바쁘고 워라밸을 유지할 수는 없다. 특수전공의 의사가 아닌 이상 의사의 시간은 대부분 빠뜻하고, 대학원생도 나만큼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없으니.
이 글은 그들의 육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쓰는 아빠 시점의 육아에세이이다.
육아백과를 쓰기에는 소아과의사라는 전문직 타이틀이 부족하다.
육아지침서라고 부르기엔 각자 가정의 지침은 부모가 지침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꺼려진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은 ‘육아십(十)과’이다.
백과의 10분의 1이라도 되어보려 한다.
감성에세이를 표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학에세이도 아니다.
그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참고서가 되길 바라며 애정을 담아 내가 육아를 하며 배운 것들을 나눠보려한다.
어쩌면 아직 미혼인 독자/작가님에게 ‘그 때가 찾아오면’ 도움이 될지 모를까 싶어 굳이 브런치에 적는다.
축하해요.
이제 막달이네요.
가슴 졸이며 아이를 기다리고 아이를 찾아가고 아이를 품고 키우는 시점이 되었네요.
두 사람의 임신소식은 주변의 어떤 부부의 소식보다 저희를 신나게 했답니다.
제 아내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는 ‘빨리 나오면 좀 편해질 것 같은데…’ 라고 했어요.
아이가 나온 후에는 ’뱃 속에 있을 때가 편했는데…‘했답니다.
전 육아의 시작이 출산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작은 결혼이죠.
사람들이 농담삼아 말하는 그 ‘연애의 무덤’이요.
한편 어떤 어른들은 ‘아이가 없는 결혼생활은 연애의 연속’이라고 했는데, 두 사람의 연애에도 이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네요.
ㅇㅇ님은 생각이 깊은 분이시니 여러 책을 읽으며 운동도 하며 준비하고 계실 거라 믿어요.
그래도 처음 겪는 일에 대한 초조함이나 조바심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불안하신가요?
괜찮을 거에요.
어떤 불안도 걱정도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왜 결혼이 육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냐구요?
전 결혼 후, 두 사람이 서로를 돌보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그 과정 역시 육아의 연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인간은 이기적인 모습이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배려하고 희생하는 건 연습이 필요한 존재이니깐요.
세 아이의 아빠인 전 농담으로 종종 우리 집에 아이가 넷 있다고 하죠.
첫째아이는 아내구요.
(가정에 따라서는 "오빠랑 결혼했는데 같이 살아보니 오빠가 ‘큰 아들’이 되었다"는 류의 그것과 비슷한 맥락일까요:)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했다고 바로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결혼생활이 익숙해지는 게 아니듯이
아이가 태어났다고 자연스럽게 ‘부모’가 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결혼 안에서 두 사람이 부딪히며 서로를 알아가고 보듬어가는 연습기간은 육아에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을 거라 생각해요.
결혼 후에 두 사람이 겪은 갈등, 양보, 희생, 이해, 사과 등 그렇게 결험한 문제 해결 모두가 앞으로 마주할 아이와의 시간에도 도움이 될 거라 믿어요.
혹시 지난 4년간 집에서 저희 몰래 댁에서 ’큰 아들(제 친구)‘을 키우고 계셨던 거면 그 역시 큰 예습이 되었을 수 있겠네요.
전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와 함께 있었어요.
어느 영화, 드라마, 블로그에서 보던 것처럼 바쁜 업무 때문에 병원에서 이미 병상에 누운 아내를 만나지도 않았고, 아내가 혼자 운전해서 병원의 엘레베이터에서 양수가 터지지도 않았죠.
여성의 본능.
아니, 엄마의 본능인 모성일까요?
세번의 출산에 앞서 아내의 출산예정일에 대한 예측은 점점 정확해졌어요.
첫째는 양수부족으로 유도분만으로 시작했던터라 의사선생님이 예정한 날이 출산일이 되었지만요.
가진통과 ’찐진통‘의 구분도 더 잘하게 되었구요.
이건 육아대백과 류의 책에서 나온 것과 같아요.
잦아지는 간격과 높아지는 강도.
엄마의 몸이 출산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
아마도 연습해두셨을 라마즈 호흡법이 정말 도움이 되고, 남편의 마사지가 도움이 되고, 뜬금없는 테니스공 마사지가 정말로 도움이 되기도 해요.
아픈 사람에게 할 말인가 싶지만...
아파도 소리를 못 지르는 답답한 상황을 마주하게 될 거에요.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님이 잔소리 하거든요.
아이가 놀라요
‘아니, 내가 아픈데 왜 소리를 못 지르게 해? 내가 지금 아이 신경쓸 처지야?’ 라고 생각이 들 시점에 들으면 화가 날 수도 있겠죠. 이건 감성적인 이유지만, 소리를 지르지 말아야할 ‘과학적인 이유’도 있어요.
연습한 라마즈 호흡으로 통증을 경감시키고, 복식호흡으로 필요한 근육을 써서 아이를 밀어내는데 도움이 되요. 그런데 비명은 아이를 밀어내야할 근육이 아닌 성대만 쓰게 되거든요. 드라마에서 본 장면은 표본이 되면 안되요. ‘꺄악-’은 출산의 현장에서 지양해야 하는 소리입니다....
희극적인 요소인 남편의 머리카락 잡기는 아이 아빠의 탈모에 기여를 할 수 있으니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손을 꼭 잡는 것도 남편손을 으스러지게 잡아볼 기회이긴 합니다.
하지만 힘을 주는데 방해가 된다면 더 튼튼한 침대 철제프레임이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무통주사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협적인) 의견
혹시 아플 게 두려워서 ‘무통주사’를 고려중이신가요?
제 아내는 주사를 워낙 싫어해서 애 낳는 것보다 주사가 무섭다는 ‘망언’을 했던 적도 있어요.
좋은 조언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전 저흰 주변에 ‘자연주의 출산’을 했던 친구부부가 있어서 그 관점에서 먼저 찾아보며 알게 된 것들이 무통주사의 부정적인 면도 같이 조사한 후, 어떻게 할 지 정했어요.
일단 소위 ‘무통주사’라고 불리는 그 주사는... 사실은 출산의 모든 과정 속에서 무통을 보장하지 않더라구요.
(배신감!!)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있어요.
일단 아프게 바늘을 꽂고 출산 준비를 하려했는데 아이가 너무 빨리 나오면 약효가 들기 전에 바로 아이를 낳아야 할 수 있어요. 그럼 척추에 바늘 꽂느라 아팠는데 그 효과를 느끼기 전에 아이가 나오니깐... 왜 그 고생을 해서 척추에 바늘을 꽂은 건가....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거죠.
자연스러운 진통은 간격/주기가 강도가 점진적으로 올라가서 엄마의 몸이 마지막 단계의 통증에 준비를 시킨다고 해요. 적응이 되는 과정이 있는 거죠. 그런데 무통주사는 초반부터 중후반까지 통증을 느끼지 않게 도와주지만 막바지에 힘을 주어야할 때는 감각이 없으면 안되니 사용할 수 없어요. 원래라면 강도 1,2,3,….7,8.9 하면 올라갔을 것을 1, 무통주사로 2~8단계를 스킵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갑자기 9,10 강도로 넘어가 감당하지 못하고... 제왕절개로 넘어가는 비율이 아주 높다고 알고 있어요.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의 제왕절개 출산율이 높은 이유라는 주장도 봤네요)
저희는 척추에 꽂는 바늘이란 것 자체가 부작용으로 허리통증을 유발하는 것도 신경쓰였고, 그렇게 첫째 때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가는 걸 도전했어요. (그리고 둘째, 셋째 때도요)
유도분만을 했던 첫째는 병원에서 지정해준 날에 병원으로 가서 입원을 했어요.
100% 자연분만을 했던 둘째, 셋째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진통이 시작됐나?’ 싶었던 때가 가진통이었고, 주기를 보며 ‘찐 진통’에 맞춰 병원으로 이동했었던 기억이 있네요. 개인차가 꽤 큰 편의 영역인 것 같아요. 저희는 분만실에서 보낸 시간도 아이가 나올준비가 된 후부터 나오는 시간까지가 다 딻은 편이었어요.
저희가정의 순산의 기운(?)…아니, 축복이 두 분의 분만실에도 임하길 기도합니다.
엄마 안의 아늑한 작은 방에서 지내던 아기를 큰 방으로 옮기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아프고 힘들고 정신이 없을 거에요. 태권정신과 신앙으로 초월하시어 엄마라는 세상 속에서 엄마 곁으로 나온 아가를 맞이할 수 있는 몸상태이시면 좋겠어요. 순산을 기원합니다!
어떤 다큐멘터리에서는 아기는 나오자마자 엄마 젖을 찾아 움직이고 젖을 빠는 것 까지 봤던 것 같은데, 저희의 실전 3회차에서는 경험하지 못했어요. (1회차에선 대형병원이 그냥 아기를 신생아실로 뺐어가서 시도도 못했지만)
그래도 엄마 품에 기대어서 그냥 엄마 심장소리 숨소리를 들으며 엄마 냄새 맡으며 누워 있게 해주면 되요.
(특별한 이상이 없다면)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계속 먹다가 나와서 배가 고프지 않아요.
배가 고파서 많이 먹으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아기가 젖을 안 문다거나, 안 먹는다고 걱정할 필요 없어요.
병원의 공기 속에 가득한 불안에 속을 필요 없어요.
거기서 바로 아이가 처음 무는 게 젖병 실리콘이 되었다가 유두혼동을 겪어 초반부터 계속 유축기와 보내게 된 지인이 있는데....유축기는 아이보다 엄마를 아프게 합니다.
특별히 의학적 소견이 없다면 엄마 위에서 한 두시간, 아빠 위에서 한 두시간 함께해도 좋아요. 캥거루케어를 허용해주는 병원이면 좋겠네요. 그렇게 저희 둘째와 셋째는 출산 후, 엄마 위에서 아빠 위에서 쌔근쌔근 잠을 잤어요.
첫째, 둘째 때는 멋모르고 분유나 유산균, 병원에서 주는 거 다 먹였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불필요했어요.
엄마의 초유는 신神이 신생아를 위해 준비한 좋은 영양분이 다 있어요.
그게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막 콸콸 나오는 것도 아니고 원래 소량이더라구요.
굳이 분유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요.
정말 이것만 먹어도 돼? 싶을 정도로 조금 먹고 또 쉬고 그래요.
처음엔 빠는 것도 힘이 드나봐요.
워낙 조그마한 생명이 처음하는 ‘운동‘이니 그렇겠죠.
젖이 돌게 하는 맛사지라는 것도 특별할 게 없었어요.
유방과 유선 주위 혈액순환이 잘 되게 따뜻하게 하는 것과 맛사지 하는 게 포인트인데 남편이 따뜻한 물수건으로 해도 되고 손으로 해줘도 되요. (굳이 모르는 남의 손 빌릴 필요없이...)
두 사람이 믿으시는 하나님이란 신께서 아기가 몸 속에서 자라게 하고 나오게 했는데 '설마 굶기겠나-'라는 속편한 마음가짐으로 첫날을 기다리셔도 되요.
엄마 뱃속에서 쭉 공급받은 영양분이 있으니깐요.
어찌보면 인터넷에서 보이는 의견은 대부분 ‘조리원이 육아 시작하기 전 제일 편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그런데 전 출산이라는 과정을 잘 생각해보면 아이와 엄마는 별개의 객체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엄마 뱃 속에서 아기는 엄마와 '한 몸'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출산이라는 과정을 거쳤다고 아이가 '별개의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걸까...?
아이에게 수유를 해야 엄마도 젖몸살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대표사례이고, 아이와 접촉하며 수유를 할 때, 엄마 몸에서도 옥시톡신이 분비된다는 과학적 사실도 이런 의문을 지지하는 것 같았구요.
그렇게 "엄마가 쉬어야 하니 아기는 엄마와 떨어져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을 하게 되었어요.
'꼭 아기가 편하면 엄마가 불편하고 엄마가 편하면 아기가 불편해야 하는 걸까? '
저희는 그런 의문들을 거치며 '대세'를 거스르기로 했어요.
그렇게 세 번 다 산후조리원을 가지 않았던 저희 부부는 이 길이 장기적으로 가장 편한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가 조리원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1차 적응하고, 퇴소 후 다시 집에서 2차 적응을 하는 것의 실질적인 메리트가 없다고 느꼈거든요. (꼭 조리원에 가야할 것 같은 제왕절개로 가는 시나리오가 아니길 기도할게요!)
조리원에서 잠깐 편하고 나중에 힘든 것보다, 처음에 조금 힘들고 서로 적응하면 아이도 서툰 엄마 아빠 손에 익숙해지고 그 손들이 능숙해지면 더 편해질테니깐요.
조리원에서 ’프로‘들이 갈아주던 것에 익숙해졌다가 집에 오니 ’루키’들이 어설프게 하면 애가 짜증낼 것 같았어요.
가능하면 정부에서 지원하는 산후관리사와 친정어머님의 지원을 누리셔요.
초기에 회복은 중요하니깐요.
하지만 ‘회복’이 아기와 떨어져 있는 거라는 현대산후관리 문화에는 의문을 갖는 게 더 과학적이라고 생각해요.
출산이 자연스러운 거라면 '엄마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아이'가 엄마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아요.
가능하면 처음부터 아이와 쭉 함께하며 아이를 관찰하면 좋아요.
보다보면 배고파하는 것, 기저귀를 불편해 하는 게 보일 거에요.
너무 작고 연약해서 불안하기 쉽죠.
아직 목도 못 가눌 때는 특히.
떨어뜨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생존미션의 핵심은 그거에요.
(물론 떨어뜨렸다고 미션 실패는 아닙니다만… 주위에 떨어뜨리신 분들이 있었어요….;;)
연약해보이는 아가.
그런데 목도 못 가누는 아가의 몸 중에 가장 힘이 센 곳은 입이라고 느끼시게 될 거에요.
엄청난 흡입력으로 덤빌텐데.. 입을 크게 벌리게 하고 깊이 물리는 게 중요해요.
유륜이 안 보일 정도로.
덜 예민한 피부가 압력을 받는 게 덜 아플 수 밖에 없어요.
이건 물리학입니다.
힘과 면적.
처음엔 바른 자세가 뭔지 모르겠지만 맘똑TV 같이 좋은 채널에서 보신 자세를 참고해서 본인이 편안한 범주 안에서 남편이나 엄마한테 교정을 부탁해보는 것도 좋을 거에요.
수유하는 자세가 편해야 덜 힘들어요.
허리나 손목이 아프지 않게 좋은 자세를 잘 찾을 수 있도록 초반에 잘 시도해보세요.
초반에 아픈 것도 아이가 입 벌리는 타이밍, 물리는 깊이 등을 잘 파악하게 되면서 안 아프게 될 거에요.
수면교육에 대해서는 말이 많아요.
한쪽에서는 그냥 울면서 재우면 된다.
다른 한쪽에서는 울리면 트라우마가 된다.
한쪽에서는 ‘스스로 자는 법’을 배우는 거로 보면 된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엄마가 자기 필요를 무시하는 걸로 받아들이고 표시하는 것을 포기하는 거라고 해석하고.
저희는 ’좁은 길‘을 선택했어요.
후자의 해석에 공감이 되서 수면교육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수면교육의 영역은 어느 쪽이 좋다고 저희가 추천할 수 없어요.
울리면 울다가 지쳐서 자게 되고, 그게 반복되면 덜 울고 빨리 잔다-는 것 맞아요.
학교 후배 부부네 놀러가서 직접 보니깐 신기하더라구요.
쌍둥이 아들 둘이었는데 백색소음기를 켜놓고 나오면 아기들이 한 5분인가 10분 정도 울다가 잠들더라구요.
남의 집 육아 관찰할 경험이 쉽지 않은데, 그런 걸 목격하니 ’아, 저게 되네‘ 싶었네요.
※글을 쓰다가 문득 최근 기사를 본 게 떠올랐네요. 백색소음이 아이의 청력, 언어 발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들이 지난 5년 간 이슈가 되었어요. AAP(미국 소아과 학회)는 적어도 2미터 이상의 거리를 두고 쓰라는 지침을 주게 되었습니다. (WebMD 기사 링크 1) 50데시벨 이하여야 하는데 그 수치를 초과하는 제품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가 나올 때 울고 깨는 건 어쩔 수 없어요 ㅠㅠ 아프다니깐 어떡해요 ㅠㅠ 낮에 냉동실에서 시원하게 한 치발기로 잇몸맛사지 해주면 좀 잘 자는 것 같았지만…
수면은 저희가 성공경험담을 자랑스레 얘기할 전력이 없네요.
(돌이 지난 막내가 아직도 '눕수'...하며 자고...그러다가 깨고 해요...)
이유식은 직접 관장한 영역이 아니라 실무경험은 적습니다.
하지만 첫째 둘째를 편식하지 않는 아이로 기른 가이드라인과 그 뒤의 로직을 설명해드릴게요.
첫 음식이 ‘분유’였던 아이는 ‘단맛’에 이미 노출된 상태이지만, 모유만 먹은 아이는 달라요.
이유식의 시작인 쌀가루분말에서도 단맛을 배우게 되겠죠.
치아의 갯수가 늘어 점점 다양한 음식을 도전하게 되는 과정에서 전 다음과 같은 논리를 생각해봤어요.
전제: 단맛이 맛있는 것의 기준이 되면 달지 않은 건 맛없게 느껴진다.
노골적인 단맛, 과당은 제일 나중에 소개시켜줄 맛으로 선정하고, 당도가 높은 과일들일수록 나중으로 미뤄두는 거죠.
예를 들어, 야채류인 브로콜리 -> 감자-> 당근 (당근도 단맛이 있죠?) -> 고구마 … 이렇게요.
과일도 너무 완숙상태가 아닌 바나나를 먼저 소개해주고, 좀 더 '강한 맛'이 있는 걸 소개해주는 식으로요.
신맛과 단맛이 같이 있는 사과를 먼저 맛보게 해준 후에, 노골적으로 단 잘 익은 수박, 배, 오렌지 등을 소개해줬던 것 같아요.
속칭 ‘떡뻥’으로 불리는 쌀과자는 여러 이유식 시기 아기들에게 그나마 괜찮은 간식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정제식품이기도 하니 이걸 먼저 좋아하게 되면 나중에 밥보다 그걸 선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초반에는 차량에서 이동 중에 특수한 상황의 경우에만 줬어요.
(이걸 오랫동안 '맛있는 간식'으로 이해하면 과자는 늦게 소개할 수 있게 됩니다. 만 4세가 되어서도 떡뻥이 맛있다고 먹고 있는 저희 집 첫째....를 보면 감사하기도 미안하기도 하네요)
설탕을 소개시켜주기 전에 꿀을 먼저 소개시켜주면 또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저희 집 첫째의 경우, 꿀의 단맛이 과하게 느껴졌는지 '으-너무 달아' 라며 만4세가 되기전까지 단맛이 나는 요리룰 안 먹으려 했어요. 지인의 첫째 아이는 꿀이 쓰다며 안 먹는 경우도 있었어요.
아이가 새로운 음식을 접할 때 안 먹는다고 단번에 ‘얘는 ㅇㅇ를 안 좋아하는구나‘ 라고 속단하실 필요는 없어요.
음식의 크기. 온도. 조리방법. 다른 것과 섞여있는지. 여러 변수를 고려해서 열 번 이상은 시도해보시면 음식자체가 아니라 다른 요인이었을 수 있다는 걸 보시게 될 거에요.
핑거푸드의 단계가 되어 아이가 엄마/아빠에게 뭘 먹이고 싶어하면 그 땐 엄마 아빠가 맛있게 먹어주는 게 또 아이가 그걸 더 먹고 싶게 한답니다.
아이가 편식하는 아이로 자라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엄마 아빠가 아이 앞에서 그것들을 평소에 맛있게 먹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좀 더 심리학적 전략을 구사하자면, ’맛있는 건데 넌 아직 어려서 못 먹어‘ 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거죠.
그럼 때가 되면 아이(들)은 이게 ’못먹던 맛있는 거 이제 먹을 수 있다!!‘ 하며 그 음식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다가가게 됩니다.
“A 먹으면 B 줄께”라는 구도를 설정하면 단번에 A는 맛없는 거(혹은 벌/의무) B는 맛있는 거 (보상)으로 인식이 되기 쉽기도 하구요.
이 단맛의 순서는 아이들이 좀 더 커서 이유식이 아닌 밥을 먹을 때도 적용가능해요.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아무 맛도 없는) 물을 마시고 조금 활동을 하면서 엄마아빠가 아침을 만들어 주는 걸 기다리게 해요.
이 때도 한 끼니의 첫 음식을 단 걸로 시작하는 것보다 달지 않은 것으로 시작하는 게 아이가 밥을 잘 먹게 하는 전략 중 하나에요.
저희 집 아침에는 견과류, 삶은 계란, 우유, 주먹밥, 과일 등이 있는데 밥이랑 과일을 먼저 주지 않아요.
견과류나 계란을 우유랑 같이 먹고, 그렇게 먹고도 배가 고프면 주먹밥, 과일로 이어져요.
과일을 먼저 준 날은 잘 혈당수치가 먼저 올라가서인지 배가 안 고픈듯 한참 딴짓을 하고 놀다가 와서 다른 걸 먹더라구요.
유튜브에서 종종 보이는 레몬을 처음 먹어보는 아이의 표정.
부모님의 콘텐츠 혹은 즐거움…이런 걸 위해서 강렬한 맛을 초반에 맛보는 아기들이 문득 떠오르는데.
그게 아이의 편식과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생각해보게 되네요.
공장에서 만들어진 과자들은 최대한 늦게.
또 아이를 봐주시는 분들에게도 같은 기준을 전달해서 일관성 있게 운영(?)하면 좋습니다.
한 번 강한 설탕맛(혹은 설탕이 아닌데 그 이상의 맛을 단맛을 내는 대체품들의 단맛)에 노출되면 ... 정상으로 복귀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저희 아이들 입에서 2-3년 동안 듣지 못했던 '맛없어' 라는 표현이 그런 과자와 야쿠르트를 먹은 후...식탁에 등장했다는 슬픈 소식도 전합니다.
저희 첫째, 둘째 모두 특별히 발달이 빠르지 않았어요.
아내는 동생들 아이들과 발달단계를 비교하며 ‘동생집 애들은 벌써 뭐 했데’ 하며 조급함을 보이기도 했어요.
’아이가 뒤집을 때가 됐는데 안 뒤집네.‘
’기어다닐 때가 되었는데 안 기네. ‘
’앉을 때가 되었는데 아직 누워만 있네. ‘
다 부질없는 ’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보통의 아이들은 다 때가 되면 합니다.
근데 그게 ’자기 때‘에요.
엄마 아빠가 유도해줄 수 있는 부분, 훈련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요.
느긋하게 자라도 될 나이이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은 때가 되면 할 걸 해요.
그건 ‘사전 프로그래밍’된 영역이에요.
숨을 쉬는 걸 부모가 가르치지 않았고 젖을 빠는 걸 가르치지 않았듯이, 뒤집는 것과 기고 앉고 서는 것까지 천천히 기다려주면서 놀아주면 아이가 걷고 뛰는 것 까지 이어질 꺼에요.
(물론 뒤집는 걸 유도하는 법은 있어요. 엄마를 눈으로 쫓는 아이의 습성을 따라서 엄마가 위치를 자꾸 눈 위쪽으로 이동을 하면 아이가 그걸 쫓아서 고개를 움직이다가 넘어가기도 하더라구요.
기어다니기 시작할 때 여러가지 입체적인 장애물을 베개 등으로 만들어서 넘어다니면서 필요한 근육들을 훈련하는 것도 좋고.)
그런데 아기가 빨리 걷는다고 좋은 점만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엄마가 더 피곤해지는 부분도 있어요.
아직 판단력은 낮은데 이동능력만 뛰어나면 마주하게 될 수 있는 위험이 더 많기도 하고.
그래서 굳이 아이의 빠른 발달을 위해 너무 노력할 필요도 느려보인다고 조바심 갖을 필요도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교육철학이라는 그런 거창한 단어를 쓸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부모의 삶이 아이의 표본이 되니 부모의 철학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해진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어요.
본능을 제외한 후, 아이의 발달단계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능력은 모방능력이더라구요.
모방능력이 미치는 영향은 대단해요.
(여러 슈퍼히어로나 초능력자를 다룬 이야기 속에서 모방능력을 가장 무서운 초능력으로 묘사하는 게 이해가 됩니다. 주로 전투의 상황에서 상대방의 기술을 고스란히 배워서 똑같이 혹은 더 강하게 사용하니깐요.)
아이들도 발달단계에 따라 이 모방을 사용하는 게 달라집니다.
논리적인 인과관계 분석이 계발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모방만 있습니다.
부모가 ‘하면 안돼!’ 하면서 밥상을 치는 상황을 가정해볼게요.
아이 입장에서 언어는 모르겠고 분위기는 알겠지만 액션이 가장 눈에 들어옵니다.
그럼 아이는 밥상을 따라 칩니다.
돌을 갓지난 저희 막내가 지금 그래요.
대신 이 모방이란 능력은 부모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 굉장히 유용한 교육적 효과를 갖아요.
저희 집에서는 아빠가 엄마를 챙겨주는 모습은 아이에게 고스란히 '복사'되어 아이도 엄마를 챙겨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아빠가 엄마가 추울까봐 이불을 가져다 주고 덮어주는 행동, 엄마가 아빠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행동 등 모두 다 따라하더라구요.
동물의 아이큐를 얘기할 때 개의 지능을 만2세 아이랑 비교하기도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사람을 동물취급하나 욕하고 싶어질 수 있겠지만, 전 초기엔 강아지나 고양이를 기를 때 쓰던 전략을 차용했어요.
같은 조건에선 같은 간결한 언어를 먼저 가르칩니다.
“하면 안된다 그랬지, 그러면 안된다고! 너 이러면 엄마 힘들어. 엄마가 닦아야 하잖아”
이렇게 자연스러운(?) 긴 문장보다.
“No.!” 한마디와 단호한 표정이 더 잘 먹힐 거라고 생각해요.
부모가 종종 하게 되는 실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하면 안되는 행동’을 했을 때 마냥 귀엽거나 어이가 없어서 웃는 얼굴로 대하는 거죠.
“하지마~ (부드럽게)” 하면서 웃는 얼굴.
그럼 아이는 자기가 잘한 줄 아는 것 같습니다.
여러 번 반복할 겁니다.
물론 나이에 따라 아직 점점 자기의 행위와 자기가 받는 처우에 대해 구별을 잘하게 되니 아이의 발달에 따라 보다 자연스러운 표현을 활용해주셔도 되겠죠.
울음에 대한 해석
돌아보니 초반에 저를 가장 절망에 빠뜨렸던 거는 아이의 울음이었어요.
아이가 울어서 슬퍼서 무너진 게 아니라, 분석-해석-해결로 이어져야 하는 인과관계의 파악에 실패해서 였어요.
특히 첫째 때는 그게 심했어요.
왜 울지?
쉬했어?
기저귀?
배고파?
더워?
불편해?
안아줘?
내려놔?
심심해?
무서워?
하나 하나 체크리스트를 따라가봐도 울 때는 정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마주하고 그치지 않는 울음소리에 저도 한밤 중에 '으아악' 하고 소리지를 뻔한 적도 있어요.
(실제 그렇게 소리지르며 주저 않은 지인의 이야기도 기억나네요)
그런데 지금 셋째를 키울 때는 달랐어요.
'앞선 두 아이의 경험에서 온 걸까?' 생각해봤지만, 막상 저희의 분석력이 특별히 좋아진 건 없었거든요.
셋째는 처음부터 표현을 잘했어요. 배고플 땐 '쩝쩝', 기저귀가 축축할 땐 '낑낑', 안아달라는 눈빛.. 등
그래서 주관적인 케이스 비교로 분석하고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시작이 달라서입니다.
코로나19시절에 태어난 첫째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신생아실로 '격리'되었고, 3일동안 분유를 먹으며 간호사 선생님들의 손을 탄 후, 저희에게 왔죠.
막내는 처음부터 아이의 행동에 저희가 반응할 수 있었어요. 계속 함께 있었으니깐요.
그런데 신생아실에서 있었을 첫째가 마주한 세상은 달랐을꺼에요.
불편한 게 있어도, 원하는 게 있어도, 간호사들이 케어해야하는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있으니 '울어야' 주목받고 우는 걸로 표현하는 것 밖에 다른 수단이 없었던 거죠.
"필요한 게 있을 땐, 울어야 한다" 라는 걸 그 때 배운 게 아닐까.....
물론 비과학적일 수 있는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좀 더 크면 점점 평준화 되기는 하는 것 같은데, 첫째와 둘째를 비교해봐도 아직도 첫째가 더 쉽게 울고 울음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어요.
아이의 울음을 무서워 하지 않아야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아이가 울면 바로 엄마/아빠가 굽히면 아이는 그런 조건화가 되는 것 같았어요.
'아, 내가 울면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구나.'
아이들을 편하게 키우기 위해 제일 먼저 주입(?)시켜야 하는 건 "안되는 건 안돼"가 아닌 가 싶어요.
조금 버티다가 아이가 울어서 양보를 하게 되면 그 아이가 배우게 되는 건 '내가 오래 울면 내가 이긴다'가 되니깐요.
어린 나이 때는 다른 걸로 주의를 끄는 게 아주 유용하게 작용하고 억지부리며 원하는 대상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또 아이들은 의외로 거절에 상처받지 않고 규율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어요. 안된다고 하면 세상 무너진 것처럼 울다가도 금방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잘 먹고 놀아요ㅎㅎ
울음에 너무 놀라지 않으셔야 주도권을 잃지 않을 수 있어요.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관찰력도 좋아요.
엄마 아빠가 주위 사람들이 뭐하는 지 끊임없이 지켜봅니다.
기어다니기 시작하면 탐색을 하고 싶어하기도 하고 멀어지는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지기도 해요.
저희 집에서 종종 보이는 풍경을 설명해볼께요.
아이와 같이 앉아있던 엄마가 뭔가 할 일이 떠올라서 성큼성큼 아무 말 없이 어디론가 가버려요.
아이는 갑자기 엄마가 없어지니깐 막 울면서 쫓아와요.
아빠인 저는 이런 현상을 여러 번 관찰하고 보고 말을 해주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걸 추천해줘요.
“기다려”
“아빠/엄마 잠깐 저거 가지고 올께~”
손 제스쳐도 같이요. 차분한 말투로.
전 늘 이런 걸 의식해서 실험을 해보는데 확실히 말을 해주고 기다리라고 하거나 따라오도록 천천히 기다려주면서 뒤를 돌아봐주면 안 울더라구요.
어느 발달단계까지는 눈 앞에서 사라지면 이 사람이 없어지는 줄 알죠.
영속성의 개념을 모르니깐요.
'까꿍놀이'를 하며 그걸 깨닫고
점점 엄마가 잠시 안 보여도 안 우는 아이로 자라날거에요.
아빠가 누워 있는 엄마에게 베개 를 가져다 주고 추워 보일 때 옷을 건내주는 걸 유심히 지켜봤던 건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예쁜 짓을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아이가 만 2세가 넘어 만3세가 되면 정말 인과관계와 논리를 응용하는 게 보이더군요.
만2세 때부터 어떤 것에 대한 금지나 제한을 가르칠 때 늘 이유를 함께 설명해줬었는데, “ㅇㅇ 하니깐 ㅇㅇ하면 안돼” 라는 걸 응용하는 게 보였어요.
그리고 규칙을 배우고 규칙을 지키는 걸 싫어한다기 보다는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무심코 바닥이나 소파에 둔 핸드폰을 가지고 노는 아이에게 “핸드폰 보면 눈 나빠져~” 라고 했다가 엄마가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 “엄마 핸드폰 보지마, 눈 나빠져~” 하는 거죠.
아이가 짜증을 내며 큰소리 친 적이 있었다면 나중에 아이에게 큰소리 치며 혼낼 때 ‘엄마/아빠 시끄러워서 무서워“ 소리를 듣게 되는 거죠….;;
그렇게 아이를 대할 때 교육의 일관성에 대해 깨닫게 되고 점점 조심스러워 지더라구요.
CAT vs. DOG
개와 고양이를 모두 길러본 제 입장에서 대부분의 아이는 강아지보다는 고양이 쪽에 가깝다고 느꼈어요.
저의 가정 또 저희 아이들이 함께 하는 다른 가정들 많아봤자 40-50명의 아이들이 전부라 ..표본이 적긴하네요.
특히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만날 때는 더욱 강아지가 아니라 고양이의 모습이란 인상을 많이 받았어요.
그게 할머니이든 할아버지든 익숙해지기 전까지 자기가 관심을 갖고 다가가는 걸 기다려줄 수 있어야 친해지더라구요. 어른들은 아이가 귀엽다고 ‘자기 맘대로’ ‘자기가 원하는 속도’로 아이를 안고 만지려 하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사실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어른들에게는 고양이를 대하듯 (혹은 수줍은 성향의 강아지를 대하듯?) 충분히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먼저 다가가길 기다려 달라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더 빨리 친해지는 방법인 것 같아서요.
어떤 어른들은 '선물을 줬으니 안아보자' 이런 식으로 접근하기도 하는데... 그건 아이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게 될 지...? 정서적으로 민감한 부모들은 '교역trade' 같아서 싫은 느낌이 들 수 있겠죠.
아이가 조금 더 크고 숫자를 배운 후에는 엄마아빠들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게 있어요.
"빨리와 /ㅇㅇ해. .....셋까지 센다? 하나. 둘. 셋...! ㅇ.ㅇ.ㅇ!"
'자기객관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힘든 거지만 남이 할 땐 잘 보이죠?
아내가 처음 그걸 할 때 전 관찰자로서 객관적인 분석을 할 수 있었어요.
하나. 둘. 셋을 센다는 행위는 3초간의 여유를 준다는 거 잖아요?
"빨리ㅇㅇ해" 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3초동안 그거 더하고 와도 돼"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먼 원하는 것처럼 '즉각' 반응하길 원한다면 카운트다운은 비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물론 명령어를 바꾼다고 아이가 바로 뭘 하진 않습니다만.... 의미론적으로 그렇다구요...ㅎㅎ)
그런데 이런 카운트다운이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건 바로 아이가 오래 하기 힘들어하는 걸 할 때에요.
예를 들어 머리 감는 걸 무서워 하는 아이에게는 이 '카운트다운'이 두려움 극복, 인내심을 기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아이 입장에서는 하기 싫은 '무엇'이 언제 끝나는 지 모른다는 게 심리적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10초 만 더 하면 돼. 라고 말해주고
10.
9.
8.
7.
6.
5.
4.
3.
2.
1.
0 ~! 영!
할 때 해방감을 기다리며 버틸 수 있게 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가끔 까먹을 때도 스스로 "아빠 ! 십.구.팔.칠!!" 하면서 스스로 세기도 하고... 그걸 해내면 뿌뜻해 하기도 하구요.
이건 양치나 소금물 가글(?)에도 도움이 됩니다.
가끔 "십.구.팔.칠.... 영"까지 다 세었는데도 아직 마무리가 안 되었을 때 다시 '일.이.삼'으로 넘어가도 ....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 4세까지는 먹히고 있습니다.)
엄마의 사랑에 본능이 얼마나 작용하는 지 잘 모르겠지만… 아빠의 사랑이란 건 엄마의 사랑처럼 출생직후 마구마구 생겨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했어요.
처음엔 낯설기만 한 그 연약해보이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 처음엔 있는지 없는지 긴가민가하다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커졌어요. 아이가 눈을 맞출 때, 처음으로 손을 잡을 때, 목도 못 가누니 엄마 아빠를 팔로 안는 걸 못하던 녀석이 갑자기 두 팔을 뻗어 아빠를 안을 때, 토닥토닥해주던 걸 따라하는 건지 자기를 안고 있는 엄마 아빠의 등을 토닥토닥하는 것도.
시력이 좋아져서 점점 더 멀리 있는 엄마 아빠를 보고 웃는 것도, 성큼성큼 엄마아빠를 향해 다가오는 것도.
앞으로 마주하실 보석같은 순간들이겠네요.
그러다가 ‘어엄-마!’ , ‘아압-빠!!’ 하는 언어의 소통이 시작되면 그게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이 될거구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늘 의식하지만 피곤할 때는 결국 ’짜증내는 아빠‘가 될 떄도 있었어요.
체력과 인격의 인과관계를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죠.
잠을 잘 잔 날은 잘 시간에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도 더 느긋하게 대할 수 있는데, 내가 너무 피곤한 날은 씻으러 화장실로 오지 않는 것도, 잘려고 누운 침대에서 신나게 노는 것도, 심지어 책을 읽어줄 때 조잘조잘 떠드는 것도 짜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체력관리도 어떤 면에선 ‘인격 관리’가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이런 체력과 성격의 관계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잘 자고 일어났을 때는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훨씬 더 인내심 있는 모습을 보여줘요.
배고플 때 짜증나는 건 아이도 어른도 마찬가지구요.
한동안 ‘창의력’이란 단어가 교육계에 큰 유행어가 되었죠.
하지만 아이들은 ‘자유함’을 느끼기 이전에 ‘규칙’을 배우는 걸 즐겨해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에게 ‘너 마음대로 해봐’ 라고 하는 건 창의력을 길러주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모든 창의의 영역은 규칙과 기초를 숙지하고 마스터 한 후 창조적 도전을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론 저희 첫째가 이제 만4세가 되었으니… 아직 모르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자, 여기까지에요. 세 아이 아빠로서 육아선배가 단숨에 써낼 수 있는 육아편지는.
앞으로 시작될 엄마 아빠의 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순산을 기원하며,
빙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