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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차원에서 온 편지

모디르프의 편지 #1

by 빙산HZ

이제 드디어 때가 된 것 같군.

지난 6000여년간 너희 인간들의 행태를 관찰하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온 우리들에게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듯 하다.

우리는 인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진실을 숨기고 왜곡하려 노력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게 혼란스럽게 하기도 하고, 어떤 게 중요한지 잊게 만들기도 했다.

약 2000년간의 흥미진진한 황금기,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반전이 있었던 역사 속 그 날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던 몇 세기를 거쳐 지금이 되었다.


지금은 너희들이 워낙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있기에 우리들이 너무 한가해졌다.

난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독단적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업적에 대한 성과를 너희 인간들에게 보내보기로 했다.



내가 이런 선택한 이유가 궁금한 이가 있을 지도 모르니 설명해주지.

너희 인간들은 종종 너무 많은 걸 알기도 하지만, 또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이다.

이 편지가 너희들 중 누군가에게 발견되면 너희들은 궤도를 수정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이기도 하다.

결말을 알고 영화를 보는 게 재미없듯이, 우리의 승리가 예정된 것처럼 보이는 지금 우리는 점점 안일해져 존재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나의 편지가 너희들과 우리의 대치를 조금 더 흥미진진하게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우리의 시간은 너희들의 시간과 다르다.

너희 인간들은 순서대로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혼돈을 선호한다.

너희들이 1,2,3,4,5,6,7,8,9,10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8,5,6,7,9, 3,4,2,1을 좋아한다.

순서를 바꾸고 그리고 중요한 한가지를 빠뜨리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나중에 하는 걸 좋아하지.




21세기의 많은 인간들은 자신이 선한 존재라고 믿는데 말이지.

특히 역사를 공부하지 않은 이들은 더욱 그렇지.


우린 그런 너희들의 착각이 너무 우습단 말이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그 돈.

그게 화폐라는 종이조가리인지 아니면, 금덩어리인지, 아니면 그저 숫자인지…

육체가 없는 우리들은 잘 모른다.

그런 가치 없는 것들을 위해 남을 미워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지.

아니, 남으로 국한된 건 아니지, 너희들은 가족들을 죽이기도 하니깐.

그 돈이라는 것을 위해 평생을 일하고, 무엇이 소중한지 모른채 매일 매일 새로운 목표를 삼아 노력이란 걸 하지.


솔직히 그건 좀 우리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아래 현상 중 어느 것이 더 흥미로운지 말이야.

돈을 위해서 서로를 죽이는 것.

아니면 수백년전에 하던 것처럼 고작 후추를 위해 전쟁을 했던 것.

아니면 20세기부터 인간들의 수명을 단축시켜온 그 반짝이고 끈적이는 설탕.

그것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피부색이 다른 인간을 동물취급하며 노예로 삼았던 것.

과연 어느 것이 더 진기로운 광경일까?


물론 인간의 역사가 계속 될수록 점점 더 가관이 되었다.

요즘 너희들 사이에선 온라인 게임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아기가 죽도록 내버려 두기도 하니 말이다.

이러다보니 우리들도 너희들이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던 이들이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인간이 창의적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 역시 조물주와 마찬가지로 창의적이라는 존재라는 이야기는 가끔 우리세계에서도 들리는 말이지만, 너희들의 자기파괴적인 행위에는 한계가 없는 건지 궁금해진다.



어쨌거나 전쟁은 우리가 관람하기 좋아하는 스포츠인 건 사실이다.

종종 죽음을 실감하면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과 그 이상의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게 우리 입장에선 리스크가 되는 게 맞긴 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이긴 하지.

비디오 게임과 같은 시뮬레이션으로 반복 연습한 것을 원거리에서 버튼하나로 많은 이들을 죽일 수 있는 시대니, 서로 피 흘리며 죽음의 무게, 살인의 무게를 체험하지 않는 이들이 늘어날테니.


요즘 너희들은 주식이라는 걸 하게 되면서 전쟁지역의 실제적인 피해를 보는 것보다 경제적 득실의 눈으로 바라보지.


전쟁이 나면 어떤 주식이 오르고 어떤 게 내려갈지.

금을 살지, 국채를 살지.


너희들이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걸 보는 게 우리에겐 큰 유흥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희들의 무관심을 더 흥미롭게 보게 되었다.


어떻게 너희와 같은 동족이 폭탄의 화염 속에 생명을 잃어가는데 너희는 미실현수익에 더 일희일비 하게 되는지. 거기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내기 위해 우리 중에는 ‘인간이상행동 분석석학회’라는 걸 만든 녀석들도 있다.너희들이 그걸 알면 부끄러워할까, 자랑스러워할까.

그건 내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기도 하다.




지구의 새벽 4시는 내가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 시간에 깨어있는 잠들지 못한 자들과 잠에서 깬 여러 자들 중

난 열정만 있고 빛나는 재능이 없는 이 자를 골랐지.

그의 손가락을 빌려 너희들에게 우리들의 시선이 담긴 관찰기를.


이 불길한 새벽에 깨어있는 나의 ‘고스트라이터’를 자청한 이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유한하니,

오늘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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