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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May 29. 2024

걷기, 산티아고 순례길

- 라라 소소 32

살면서 언젠가 한 번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정식 명칭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주로 프랑스나 포르투갈의 한 지역을 시작으로 야고보 성인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 스페인 북서부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 성당까지, 즉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대야고보)가 있다. 열두 사도 가운데 첫 순교자로 알려져 있는데, 야고보의 무덤에서는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예루살렘이 사라센 제국에 의해 점령되면서, 순례가 어려워지자 야고보의 무덤 위에 건립된 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로마와 함께 유럽인이 즐겨 찾는 3대 순례지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전 유럽을 가로질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여러 순례길이 생겨나기도 했고, 후대에는 ‘카미노’로 불리게 된 이 순례길에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건립되며 순례자들을 위한 쉼터가 조성됐었다고 한다. (cpbc [금주의 성인] 참고)     


이 같은 내용을 알고 있고, 들은 적이 있는 가톨릭 신자들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나고 싶어 한다. 성당을 순례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깊겠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신앙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데는 긴 순례길을 걸으며 차분히 시간을 보내는 게 조금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많이 걷는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가 산티아고 순례길의 대중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을 거다. 내 주변에서 산티아고에 다녀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고, 세례를 받기 전에 다녀왔어도 나와의 인연은 세례 이후에 생긴 경우가 많아서 신앙이 없는 이가 순례길을 떠나는 이유를 물어보지는 못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땠는지에 대해서만 주로 얘기를 나누었기에 그 시작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어떠한 이유에서건 그 길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어 했다는 건 알고 있다. 걷는데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그 멀리까지 가서 오랫동안 걷기를 한다는 건 어떤 절실한 이유가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삶의 변화가 필요할 때, 많은 고민거리가 있을 때, 마음이나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어떤 결심이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등등.


많은 이들이 걷고 있고, 그 길을 걷고 온 이들은 하나같이 다시 또 걷고 싶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 쉽지 않은 길일 텐데 다시 걷고 싶어 한다. 멀고 먼 낯선 나라로 날아가서 짧게는 열흘, 길게는 삼사십 일가량을 걷는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반나절을 걷고, 태양이 너무 뜨겁게 내리쬐기 전에 다음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쉰다. 다음날을 준비한다.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어깨는 천근만근 하다. 다리에 알이 배기고 딱딱해진다. 숙소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침대는 삐걱거린다. 걷는 동안 짐은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다음 마을에서 괜찮으면서도 저렴한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최초의 이유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걷는다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 있지도 않다. 막연하게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비우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나의 소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는 그런 마음을 예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갖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준비를 하거나 시도해 보지 않은 건, 또 ‘언젠가’라는 모호한 단어를 붙인 건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극명한 증거가 될 거다.     


망설이는 이유는 많다.     


교통사고 이후에 나는 오래 걷는 걸 힘들어한다. 고관절도 슬관절도 족관절도 다리 관절은 모두 아픈데, 걷는 걸 좋아해서 하루 종일 잘 걷다가도 저녁이면 아니면 낮에라도 갑자기 너무 아프고 통증이 밀려온다. 밤에 다리를 마사지하고 찜질해 주면 조금 나아진다. 가끔은 걷는 도중 고관절부터 슬관절까지 통증이 이어서 오기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하루에 일곱 시간가량, 몇 시간이고 걸을 자신이 없는 건 아니다. 슬슬 산책하듯이 걸으면 걸을 수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동안 전투적으로 걸을 자신이 없다. 그렇게 걸었다가는 하루 이틀이면 내 다리는 무너질 거고,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하게 될 거다. 또 걷는 건 할 수 있다고 쳐도 걷는 동안, 짐을 어깨에 지고 가야 하는 게 가능할지 의문스럽다. 아무리 짐을 줄여도 기본으로 어느 정도는 무게가 나갈 거다. 짐은 어깨에 부담을 주고 어깨의 무게는 다리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산책을 할 때도 어깨가 무거우면 오래 걷기 힘드니까, 하물며 짐이 든 배낭이라면 더 쉽지 않을 듯하다.      


사실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아니 두 개의 이유가 더 있다. 이건 말하기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나는 잠자리를 많이 가린다. 보통 여행을 가면 비용면에서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주 묵곤 하지만 잠을 편안하게 자는 건 아니다. 물론 비싼 호텔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아침에야 겨우 잠이 들어 낮까지 잠들어 있기도 여러 번이다. 나에게 여행은 대부분이 낯선 곳에서 방황하거나 고요히 머무르기 위함이다. 쉬기 위해서 또는 새로운 걸 느끼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에게 있어 여행의 의미와 비슷하면서도 같을 수만은 없어 고민이다. 순례길에서는 사실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그렇게 하면 내가 스스로 마음이 불편할 거를 이미 알고 있다. 아침 시간을 버리고 천천히 내 길을 걷는다면, 그렇게 해서는 하루치를 걷기 힘들 거고, 절반 분량을 다음 날로 미루다 보면 계속 지체가 되겠지. 늦게 걸으면 쨍한 햇볕에 몸에 무리가 가기도 하고 걷는 시간이 느려져 다음 마을에 도착 시간이 늦어지거나 길을 잃기라도 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들었다. 또 하나 더는, 샤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계속 걸으면 몸에 땀이 많이 날 거고 땀이 난 옷을 세탁해서 말릴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으니, 옷이 자꾸 쌓이게 될지 모른다. 짐을 줄이기 위해서는 입고 있는 옷과 가방에 넣을 옷으로 적게 챙겨야 한다고 들었는데 옷이 마르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고 샤워하고 땀에 절은 옷을 다시 입을 수는 없지 않은가. 주위의 이야기만 듣고, 자료만으로 보았으니 정확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걸 생각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에게 멀고 먼 여정이고 아주 희박한 일정이 아닐 수 없다. 견뎌내기 쉽지 않을 거다. 아니 어려울 거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가고 싶다는 말만 하고 기회를 애써 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랜 걸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동네에서고 시내에서고 어디에서건 간에 오래 걷는 걸 마다하지는 않는다. 동네에서는 주변에 낮은 산도 있고 공원도 많아서 산책하기에 좋다. 가까이에 중랑천이 있어 천변을 걸을 수도 있고 (사실 이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 일 방향 코스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전철역에서 전철역까지 걸을 수도 있다. 친구들과는 명동에서 종로로 걷고, 종로에서 청계천 주변을 걷기도 하고, 광화문까지 가기도 한다. 익숙한 골목을 걸어도 걸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어 좋다. 을지로에서 종로로, 종로에서 동대문으로, 혜화에서 성신여대로, 다양하게 뻗어나가며 걸어봤다. 일부러 걷기 위해 나가지는 않고 볼일을 보러 나간 김에 조금 더 멀리까지 걷기도 하고, 약속으로 만난 지인들과 대화하며 걷게 되는 경우도 있다. 혼자서 이유 없이 그냥, 걷고 싶어서 걷기도 하고 차비를 아끼고 운동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걷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나도 걷기를 즐기는 모양이다. 다만 시간을 따로 내서 운동으로 혹은 자연이 궁금해서 그 속에 머무르기 위해서 걷지는 않는다는 점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서울이나 제주도, 요즘 어디든 많이 생기고 있는 둘레길을 걸은 적은 없는 듯하다. 둘레길만 찾아서 걷는 사람들도 있던데, 그들은 걷는 행위를 좋아하는 걸까, 자연 속에서 걷는 걸 좋아하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다.     



언젠가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머물렀던 지역이 트래킹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숙소를 찾아가는데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들이 향하는 곳곳에 있는 표지판을 보며 트래킹 스폿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검색해 보니 풍광이 아름답고 트래킹에 적합하여 멀리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트래킹 코스라고 했다. 나무도 많고 산으로 이어지는 입구도 많고 근처에는 커다란 호수도 있었다. 호수를 지나면 또 넓은 들판과 언덕이 펼쳐져 있었다.      


며칠 후에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맸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고, 언덕을 지나고 숲을 통과하니 하염없는 들판이 나왔다. 트래킹 코스가 아닌지 걷고 있는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집들도 거의 없었고 가축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처음에는 당황하여 길을 찾으려고 허둥지둥 댔다. 나는 여행의 묘미는 방황이라고 생각해서 지도 앱을 거의 활용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그다음에는 열심히 걸었다. 걷다 보니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졌다. 복잡했던 생각에 몰두하다가 정리되는 게 하나도 없자 조금씩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파랑과 하양으로 구름이 많았고, 맑았다. 사방에는 뭐든지 초록이었다. 아름답더라. 그제야 자연을 즐기며 천천히 걷게 되었다. 마음이 편안해졌고, 머릿속의 잡다한 생각들이 조금씩 사라지다가 결국에는 없어졌다. 머리가 텅 비어버린 상태. 아니, 세상사에 몰두하지 않아도 되는 아주 평화로운 상태.     


거의 저녁때가 다 되어 아름다운 노을을 보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날의 헤맴은 나에게 순례길을 걷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유명한 그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에서건 걸으면서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고 조금씩 비워가는 게 나에게, 나 자신에게 가장 중요할 거라는 생각.      


그렇다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포기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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