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구순기념 가족문집에 17명의 글이 모아졌을 때 나는 엄마 아버지에게도 원고 청탁을 했다. 잠시 망설이던 아버지는 ‘며칠 시간을 줄 거냐?’고 물었고 종이에 써 달라는 말에 ‘컴퓨터로 작업하면 된다’고 하셨다.
문제는 엄마의 글이었다. 나는 엄마의 구술을 옮겨 적어 주겠노라고 엄마와 한 차례 인터뷰를 해 놓은 상태였다. 서둘러 책 작업을 하면서 17명 글의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살피고 글과 사진의 배치 등 편집 작업에 매진하느라 기운이 빠진 나는 엄마 이야기의 구술 정리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망설이는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언니가 전해준 한 마디였다. “안나가 내 이야기를 잘 적어준다고 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는 엄마 이야기를 들으니 나는 어느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엄마, 아버지 구순 축하 한 마디씩 하고 있는데 엄마도 하실 말씀 있으시죠?”라는 질문에 엄마는 ‘내 말을 받아 적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첫마디로 “나는 35년 4월 7일 용인 군 구성면 청덕리 195번지에서 태어났고 전주 최 씨 가문의 4남 1녀 중 막내딸이야”라고 했다. 가족들의 글이 올라올 때마다 언니가 엄마에게 보여드리고 읽어 드렸다고 하는데 엄마는 그때 자기 소개하는 것을 배웠던 것이리라.
나는 가족문집의 시작, 곧 우리 가족의 씨앗이 되었던 엄마 아버지의 결혼 이야기가 궁금했다. 88년을 살면서 처음 인터뷰이가 된 엄마는 먼 기억을 하나씩 불러왔다. 나는 엄마의 구술을 옮겨 적고 글의 제목을 아버지 엄마 두 분 이름에서 모음 하나가 틀린 영선과 영순의 이름을 빌려와 정했다.
영선과 영순의 결혼 이야기
엄마 기억의 시작은 엄마의 시할아버지였다. 엄마 친정아버지의 친구였던 시할아버지가 우리 가족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언제부턴지 아버지 친구가 자주 찾아오는 거야. 나는 그냥 술 한잔 하러 오시나 했지.”
엄마는 60년도 넘은 과거의 일을 어제 일인 듯 기억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최 세안(최 씨) 계신가?’ 하면 아버지가 반색을 하며 뛰어 나가고.
맘씨 좋은 올케가 술상을 봐서 방에 들였지.
나는 그 아버지 친구를 고개 넘어 공소(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성당)에서 자주 만났어. 내가 그때쯤 세례를 받았거든. 나는 청덕리 친구랑 친했는데 그 친구가 천주교에를 다녔어. 나는 그게 부러워서 교리문답을 열심히 외워 세례를 받았지. 아버지 친구는 공소에서 나를 만나면 집으로 데리고 갔어. 아줌마가 밥을 맛있게 해 주면 아저씨는 귀한 토마토 나무에서 토마토를 몇 개씩이나 따 주곤 했지.
얼마 후 키 작은 아가씨가 나를 찾아왔는데 아저씨 손녀딸이라고 했어. 너희들 고모지. 나를 선보러 왔다고 했어. 아가씨는 우물가에서 나를 빼꼼히 쳐다보기만 하더라. 그리곤 집에 가서는 내 발뒤꿈치 얘기를 하더래.
‘신붓감이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보라색 양말을 신었는데 발뒤꿈치 까지도 이쁘더라고요’ 그리고는 당장 보라색 양말을 사 신었다고 하더라.
그리고는 아저씨가 아버지에게 줄곧 이야기를 했데.
“ 최세안, 우리 사돈 맺게나. 영순이를 손주 며느리로 주게나.”
맛있는 밥을 해주던 아줌마가 돌아가시고 나를 손주 며느리 삼고 싶어 했던 아버지 친구는 서울 아들네로 이사를 하게 됐어. 이삿짐을 가지러 큰 손주가 내려왔다는데 아버지가 먼저 봤데. 고개 너머 느티나무 아래로 지게로 짐을 져서 나르는 대학생 손주가 마음에 들었는가 보더라.
‘영순아, 너 시집가라. 신랑감을 봤는데 괜찮더라.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아버지 입에서 시집가란 소리가 자꾸 나오는 거야. 동네에서도 나에게 장가들겠다는 총각이 있었지만 막내인 나는 시집갈 마음이 없었어.
얼마 후 군복 입고 군인모자 쓴 그 손주가 나를 찾아왔어. 방에 모두 우르르 들어오더니 나랑 니 아버지랑만 남겨 두고 나가데. 서로 할 말이 있어야지. 그냥 둘이 우두커니 앉아 있었지. 키도 작고 군복 입고 그저 그랬어.
‘아가씨, 5남매 맏이라는데 고생해서 안돼요’
5남매 큰며느리 올케가 적극 반대하고 나섰어.
‘나는 시집 안 갈 거야. 나를 많이 가르치지도 않고 대학생한테 가라고’
내가 막내고 시누이가 하나라고 올케가 많이 예뻐했었거든. 도통 시집갈 마음이 생기질 않는 거야.
그런데 아버지가 자꾸 잠이 안 온다고 하셨어.
‘나는 아들 넷을 장가 들이고 딸이 하나 있는데, 딸을 누구를 주나 해서 내가 잠이 안 온다.’
식구들은 모두 반대했지
‘잘 생기기를 했나, 키가 큰가, 재산이 있기를 하나,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네.’라면서
. 나도 ‘오 남매 맏며느리 할 자신이 없어요.’라고 꿈쩍도 안 했지.
1년 후 제대를 하자마자 신랑 쪽에서 결혼 날짜를 잡아왔어. 신붓감이 다른 데로 시집갈까 봐 서둘러 날짜를 잡았다고 하데. 신랑은 직장도 없다는데 결혼부터 하자고 했어. 그런데 막상 날짜를 잡아 보내오니까 결혼이 막 서둘러지더라. 그렇게 해서 제대 3개월 만에 결혼이 이루어진 거지.
결혼하고 드라이브 가는 차 안에서 니 아부지가 이 말부터 하더라. ‘내가 얘기 못한 게 있는데... 나은지 한 달 된 동생이 있어요.’라고. 니 아버지가 선 볼 때는 5남매 장손이었는데 결혼하고 보니 6남매 장손이 되어 있는 거야. 6남매 큰 며느리가 된 거지.
손주 며느리로 데려오지 못할까 봐 어른들이 이야기를 못하게 했다더라.
너네 아버지는 어른들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어. 집에서 결혼하라니까 선보러 왔고 결혼 전에 나한테 그 이야기를 못해서 마음에 걸렸던 거야.”
엄마는 남편이 된 아버지 마음이 바로 이해가 된 거 같았다.
“시집을 와서 시댁 대방동 집으로 들어가니까 색시 구경한다고 동네 사람들이 우 하니 몰려 있더라고. 그 집에서 너네들 셋 낳고 양평동으로 와서 막내 낳았지”
이쯤에서 나는 질문을 좁혀갔다.
“엄마, 살아보니까 아버지 제일 좋은 점이 뭐예요?”
“아버진.. 변함이 없지”
“아버지에게 고마운 건?”
“여직까지 건강하게 살아줬으니까 고맙고”
“혹시 아버지에게 미안한 거 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프니까 미안하지”
“엄마, 아버지랑 살면서 언제가 제일 좋았어요?”
“... 글쎄....”
이 질문에 엄마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엄마, 제일 좋았던 게 언제였는지 생각하는 거 숙제예요. 다시 물어볼 게요”라고 인터뷰를 마쳤다.
다음 날 아버지의 원고가 도착했다.
엄마와의 결혼 이야기가 부분 부분 적혀 있었다.
“나는 요샛말로 무일푼 총각, 직장이라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 했거든.
그런 나를 보고 짝을 이루어준 사랑하는 최영순은 얼마나 고마운고. 우리들 결혼은 부모님들은 고사하고, 온전히 할아버지 오춘식의 은덕이었지.
지금은 63세까지도 정년을 두는데, 나는 새파란 젊은 나이 55세에 정년을 맞았으니 이후의 인생은 오로지 아내의 몫이었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래도 여기까지 우리 가족들을 함께 이끌고 보살펴 왔으니, 아내 데레사의 내조가 큰 힘이 되었네.”
엄마의 구술과 아버지의 글은 제일 마지막에 도착해 가족문집의 에필로그가 됐다.
엄마에게 ‘언제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은 확인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글 안에서 엄마의 대답을 보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결혼한 ‘키 작고, 가진 것도 없고, 잘 생기지도 않았던 아버지’가 평생 엄마에게 고마워했던 그 마음의 시간이 엄마에게는 제일 좋았던 시간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