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필사적으로 잠에서 깨기 위한 새끼 인턴의 과몰입13
배가 고픕니다.
오늘은 월남쌈이 먹고싶습니다.
오랜만에 기력이 살아납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예전의 컨디션 70%는 되찾은 것 같습니다. 기력이 살아나니 식욕이 더욱 왕성해집니다. 고기도 생각나지만 요 며칠 너무 고기만 찾은 것 같습니다. 적당량의 단백질도 좋지만 적당량의 야채와 채소도 필요한 법이지요. 너무 부담스러운 것 말고, 맛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상큼하고 오감을 만족시키는 음식, 월남쌈입니다.
첫 월남쌈
들안길이었나, 아니면 아예 반대편이었나. 맛집과 카페가 가득한 곳이 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인생 첫 월남쌈을 영접했죠. 한창 월남쌈이 '웰빙'이라는 키워드로 유행하기 시작했을 무렵입니다. 암만 또래보다 덩치가 커도 어른들 식탁에 앉으면 팔을 올리기가 조금 버거웠습니다. 움직이기 불편한 저를 위해 엄마가 직접 월남쌈을 싸주려했죠. 하지만 자립심과 독립심이 강한 저는 스스로 하겠다며 라이스페이퍼를 집었습니다.
라이스페이퍼 여러 장이 티슈꽂이같은 곳에 꽂혀 나왔습니다. 따뜻한 물이 담긴 그릇이 라이스페이퍼를 적시고, 말랑해진 라이스페이퍼를 앞접시에 펼칩니다. 그리고 파프리카, 무순, 양파 등 야채를 넣고 고기도 넣습니다. 무슨 고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넣을 것을 다 넣었으면 예쁘게 접어 모양을 잡습니다. 그리고 소스에 찍어 입으로 쏙 직행하면, 그게 월남쌈을 먹는 겁니다.
라이스페이퍼를 만질때는 요령이 필요합니다. 물이 뜨거워서 한손으로 집거나 접시에 잘못 펼치면 모양이 일그러지거든요. 재수없으면 접힌 라이스페이퍼가 절대로 펴지지 않습니다. 딱 달라붙어버리죠. 성질 급했던 저는 몇번이고 실패했습니다. 엄마는 그냥 내가 싸주는 것을 먹어라 했지만 이미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제 귀에는 들리지 않았죠. 내가 하고야 말겠다며 대여섯번을 시도한 끝에, 월남쌈이 완성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양도 엉성하고 재료도 먹고싶은 야채만 담아 투명한 쌈 안의 모습이 이쁘지도 않았지만 뿌듯했습니다. 소스에 찍어먹는 월남쌈은 쫀득하고 아삭했죠. 야채를 이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구나. 그때의 기분 좋은 충격은 잊히지 않습니다.
베트남 현지의 월남쌈
그 뒤로 집에서 종종 월남쌈을 약식으로 해먹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다시 먹었을 때는 수능이 끝난 뒤 베트남으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향신료에 거부감이 없는 편이라 여행가서도 꼬박꼬박 삼시세끼 잘 챙겨먹었죠. 우리나라 음식이랑 비슷한 것도 있었고, 생소한 것도 있었죠. 하지만 그중 만족스러웠던 식사를 고르라하면 월남쌈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갑니다.
양이 푸짐했거든요. 야채를 좋아하는 엄마는 물론, 야채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 저조차도 좋아하는 야채들로 가득했죠. 육수는 향때문에 별로라고 우리가족은 적당히 먹었지만 저는 많이 먹었습니다. 물론 한국인들이 자주 관광와서 한국패치가 되었을 것 같지만 그 수북한 야채와 탑처럼 쌓여있는 라이스페이퍼, 오묘한 맛이 나던 육수는 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육수 다 먹고 나서 국수를 말아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 그 식당 사람들은 한국인을 꿰뚫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씨익 웃으면서 국수 접시를 줬었거든요.
'이 다음은 국수를 먹지? 우린 다 알고 있어.'
샤브샤브집에서 만난 월남쌈
대구에 '허니비'라고 샤브샤브 코스 집이 있습니다. 샐러드, 튀김요리, 스테이크 등등 다양한 코스요리 이후 마지막을 샤브샤브로 장식하는 집이죠. 맛집입니다. 계절마다 요리가 조금씩 바뀝니다. 여기서 특히 좋아하는 요리는 꽃게튀김과 스테이크입니다. 매콤함이 더해져 물리지 않죠. 코스요리로 이미 배를 어느정도 채우면 샤브샤브가 등장합니다. 역시 우리나라는 마지막을 뜨끈한 무언가로 속을 싹 내려줘야합니다.
라이스페이퍼를 적실 물 그릇에는 비트 한 조각이 들어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라이스페이퍼는 연한 분홍빛으로 예쁘게 물들죠. 보기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고 하잖습니까. 육수가 끓기를 기다렸다가 야채와 샤브샤브 고기를 넣습니다. 고기는 금방 익으니 라이스페이퍼를 준비해줍니다. 이제는 능숙해진 손길로 라이스페이퍼를 적십니다. 앞접시에 라이프페이퍼를 올려놓으면 어느새 고기는 다 익었습니다. 고기를 집어 올리고, 파프리카와 야채, 푸른 채소 등 갖은 채소를 넣어 예쁘게 쌈을 만듭니다. 그리고 소스에 찍어 베어뭅니다. 소스와 쫄깃한 라이스페이퍼의 맛이 혀에 닿았다가 라이스페이퍼가 찢어지면서 그 안의 샤브샤브고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삭한 야채를 씹으며 풍미를 즐깁니다.
그야말로 오감이 만족하는 즐거운 식사죠.
요즘 배가 줄었는지 너무 많은 양을 소화해낼 수 없습니다. 원래 많이 먹긴 해서 양이 준 건 좋은데, 문제는 머리가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머리는 '왜 저걸 남겨 아직 더 먹을 수 있어!'하고 몸은 '아냐 못 먹어 이제 그만해...'를 반복하죠. 솔직히 아무리 맛있어도 고기를 계속 먹기에는 속이 부담됩니다. 그래서 늘 마지막 한 입을 천천히 씹으며 아쉬움을 달랬죠.
하지만 월남쌈은 아무리 먹어도, 아무리 배가 불러도 속이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배가 어느 정도 찼을 때 실컷 수다를 떨다 배가 가라앉으면 다시 쌈을 싸먹는 겁니다. 물을 추가해 계속 끓여내는 라면처럼 무한대로 먹는 거죠.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며 다양한 야채를 맛있게, 기분 좋게, 많이 먹을 수 있는 월남쌈. 전에는 귀찮은 음식이었지만 야채와 채소가 아쉬운 지금은 생존에 가장 적합은 음식으로 다가옵니다. 야채를 못 먹으니 몸이 시들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요즘에는 라이스페이퍼로 떡볶이를 만든다는데, 그것도 궁금합니다. 하지만 제 머릿속에는 여전히 월남쌈이 먼저 떠오릅니다.
배가 고파요
월남쌈 먹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