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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랑바쌈 Dec 03. 2021

오늘만 사는 인생

토끼처럼 살고 싶진 않아

겪어보지 못한 경험에 대한 궁금증을 호기심이라고 한다. 호기심은 때론 나처럼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숫기 없는 중년에게도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내가 요즘 궁금해 못 견디겠는 것은 퇴직을 얼마 앞두지 않는 선배들의 멘탈이다. 나도 직장에서의 소멸이 고작 십수 년밖에 안 남은 처지라 조바심이 트기 시작했다.

은퇴를 한 달 앞둔 직장 선배에게 사내 메신저로 쪽지를 남겼다.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다.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식사 한번 나누면서 인생 조언도 좀 구하고 싶어서요"

불쑥 점심을 청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는데,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런 후배의 청은 그의 삶 속에도 좀처럼 발생하기 어려웠을 일이라 도리어 반가웠을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만남을 청하는 후배가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의 퇴직은 엄밀히 말해서 완전한 은퇴는 아니었다. 작은 기관의 임기제 사장을 맡아서 2~3년 더 현직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게 되었으니. 그래도 30년 넘게 몸담은 직장을 떠나는 것은 그의 일생에서 대단한 사건이라고 생각했기에 그 소회가 궁금했다.


그가 해준 조언들이 새롭거나 울림이 있진 않아서 좀 실망스러웠다. 튀어 모나지 않게 리스크 관리 잘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버텼고, 다음 자리까지 선물로 받아 나가니 그걸로 해피하다는 표정이었다.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난 이미 답을 읽었다. 계획은 없다. 무엇을 할지를 왜 고민하나, 노년을 버틸 수 있는 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의 계획의 전부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계획일지도 모르겠다.


일본 경제가 잘 나갈 때 성실히 저축했던 지금의 일본 노인세대는 세계를 여행하고 골프를 치고 맛집을 유랑하며 식도락을 즐긴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만큼 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대부분 남은 시간보단 돈이 더 많아 다 쓰지 못하고 방바닥 아래 고스란히 남기고 간다. 이런 계획? 이것도 계획?

 

육십이 될 때까지 나이, 지위, 연금 이런 거 말고 당신이라는 주체가 이룬 것은 무엇이며 가치는 무엇이며 그것을 기반으로 직장 밖의 세계로 나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후세대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그들에겐 너무 공허하다. 


예끼, 그런 게 어딨어? 한평생 잘 해먹고 가는 거지. 이만큼 올라왔으믄 많이 묵었지. 최민식의 영화 대사가 생각난다. "내가 말이야 너거 서장이랑 밥도 묵고.." 이런 대사도 있었다.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꼭 그렇게 많이 묵고들 가야 하나..


법륜스님은 토끼처럼 살라고 조언한다. 과거에 얽매이지도 너무 먼 미래를 걱정하지도 말고 그저 토끼처럼 눈앞의 일만 쫒으며 살면 힘들지 않다는 말씀이다. 불안에 대한 좋은 처방이지만, 좋은 인생관인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의 최선이 공동체의 선을 가져오진 않는다. 사각지대를 돌보는 자가 있어야 하며, 미래를 고민하는 오늘이 있어야 공동체는 유지된다. 하루하루를 그저 넘기는 게 버거운 인간이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루하루의 달력을 넘기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아닐 게다. 엄마 뱃속에서 나와 젖을 떼고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돈 벌며 애 키우느라 오늘만 사는 인생으로 절반을 채웠다면, 나머지 절반은 좀 다른 의미의 인생을 계획하는 것이 맞지 않나? 이게 나의 질문이었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지혜가 자라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계획이 있는 꿈이 있는 선배를 만나고 싶다. 노후대비 재테크 플랜 말고 좀 더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한 인생 후반전을 착실히 준비해 가는 년. 그런 아름다운 중년을 만나고 싶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토끼처럼 살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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