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랑바쌈 Nov 26. 2021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

경건하지 못한 크리스천의 고백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주변에선 이 두 가지 사실을 엮어서 내가 크리스천이라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합리적인 추정이지만 틀렸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수가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술을 마시는 것이 정죄할 일은 아니라도 딱히 모범이 되는 크리스천의 모습은 아니라는데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종교적인 신념 때문이 아니다. 술맛이 없어서다. 술을 맛으로 먹냐고 한다면 그럼 뭣 때문에? 퇴근 후 소파 위에 늘어져 영화 보며 맥주캔을 '퍽'하고 따는 것,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짠'하고 걸치는 것 이런 게 술맛이 아님 무어란 말인가? 단맛 짠맛 아니어도 술도 맛이 있을 게다. 나는 그 맛을 못 느낀다는 것일 뿐이고.


체중감량을 위한 다이어트와 종교적 금식은  모양이 같지만 실체가 다르다. 4월의 다이어트가 고난주간 금식이 될 수 없듯, 나의 금주 역시 경건 생활의 일부는 아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해명하지만, 묻지 않고 지레짐작하는 사람에게 tmi를 날리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내가 발 담그고 있는 개도국 원조 분야 세속적인 비즈니스 세계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누고 돕는 일이라는 점에서 좀 더 가치 있는 일처럼 보인다. 외부에서 보기엔 대단한 사명을 갖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굳이 '~처럼 보인다'라고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사실 그냥 직업의 한 종류이고 업무(work)일 뿐이다. 선한 의도가 부각되어야 정당성을 얻는 이 세계의 속성상 외부세계의 그런 오해는 어느 정도 필요한 측면이 있다. 특별한 사명과 소명을 받아 들고 이 길을 선택하신 분들도 많다. 존경받아 마땅하다. 존경을 대가로 하는 일은 아니지만.


다 그런 것은 또 아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직급은 올라갈 만큼 올라가 정년까지 채우고 거기에 월급엔 손대지 않고 법인카드로만 생활할 수 있는 그런 외부 자리 임기를 몇 개 더 채우고, 그야말로 세상 부귀영화 다 누리고 이제 더 받아주는 곳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봉사하겠다고 출사표를 내는 분들도 적지 않다. 고위공직자나 성공한 기업인들이 이런 루트를 많이 선택한다. 그 봉사라는 것이 국회의원 출마라면 세속적 딱지를 떼기 어렵겠지만, 무슨 구호재단이나 NGO 같은 것이면 인식이 확 달라진다. 본질적으로는 똑같이 세속적이다. 명예, 자기만족, 자아실현 이런 걸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런 모양의 인생설계를 폄하하는 건 절대 아니다. 노년의 시간과 재산을 전적으로 자신과 가족을 위해 소비하는 인생에 비하면 참으로 모범적이고 부러운 인생이다. 것도 여유가 되니 하는 것이 아닌가. 나역시 그렇게 살고 다. 다만 그건 거룩한 희생이 아닌 자신만의 이유 있는 선택의 결과라는 얘기다. 술을 입에 안대는데 여러 이유가 있는 것처럼.


부활한 예수는 호수에서 제자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났다.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한다. 만약 베드로가 즉시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계속 고기를 잡으며 어부로 성공해서 돈을 벌었다면? 그러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서야 "예수님 제가 이제 따르렵니다" 했더라면? 이걸 순종이라고 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런 사례는 허다하다.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최고 성공모델은 장수하며 부귀영화 누리고 눈감기 직전에 신앙 고백하고 천국 가겠다는 것이란다. 


세상 부귀영화 다 누리고 먹고 살 걱정 없는 말년에 봉사의 훈장까지 욕심을.. 호사도 그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희생과는 거리가 좀 있어보인다. 가질 수 있는데 버리는 것, 할 수 있는데 내려놓것, 누릴 수 있는데 누리지 않는 것, 이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태석 신부는 의사 면허를 따자마자 한국에서 돈 버는 의사 대신 사제가 되어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로 건너왔다. 청년 이태석은 의사로서 모든 걸 던져 병자를 돌보았다. 해가 떠 있을 때 종일 치료했고, 해진 후 지쳐 잠든 중에도 멀리서 찾아온 환자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센병자들을 찾아 문드러진 발에 맞는 신발을 만들어주었다. 중학생 시절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고 악기도 잘 다루었던 그는 밴드를 만들었다. 학생들에게 악기를 가르쳤다. 그가 만든 밴드가 내전으로 상처 입은 톤즈 거리 곳곳을 누비며 평화와 화해를 연주했다. 전기가 없는 톤즈에서 약품 보관할 냉장고를 돌리기 위해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렇게 자기 몸에 암이 퍼진 줄도 모르고 환자들을 살피2008년 48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나보다 세 살 많은 나이였다. 40대에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재능과 열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청춘은 오롯이 삶의 전체였다. 노년의 자투리가 아니라.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나는 한참 울었다. 이쪽 계통 순종 미담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져서 웬만한 간증에는 꿈쩍 안 하는 내가 이 담담한 다큐멘터리에는 주저앉고 말았다.


이후로 나는 "이리 좋은 일도 하시고 대단하세요"라는 얘길 들을 때마다 몹시도 부끄럽다. 따박따박 월급 주는 철밥통 직장과 공적으로 선(善)베푸는 업무,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는.. 이런 호사를 다 누리면서 누군가에게 '경건'과 '순종'으로 비칠 때 천국에 계실 쫄리 신부님께 송구할 따름이다.(신부님은 세례명이 John)


언제쯤 나의 금주는 경건의 금주가 될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스타일의 문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