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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랑바쌈 Dec 20. 2021

기억을 남기는 시간

가성비 높은 시간 투자의 비법

"어서 양치해 원아!"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까지 눈이 말똥말똥한 아이를 향해 와이프가 소리쳤다.

"좀만 더 있다가.. 아빠가 왠지 먹을 거 사 올 거 같단 말야"


같은 시간 나는 서울역 안에서 서성이고 있다.

늦은 회의를 마치고 세종 가는 기차를 타러 왔다. 택시가 안 잡혀 8시 반 기차를 놓쳤다. 다음 차는 9시 반.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두리번거리다 예전에 못 보던 도넛 자판기가 눈에 들어왔다. 다 팔리고 마지막 남은 도넛 한 박스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어서 나를 가져가."(소비자 가격: 14,000원)

나의 귀가 미친 듯 팔랑거린다.


현관문 비번을 누르는 소리를 듣고 막내가 뛰쳐나왔다. 원이의 눈이 머문 곳은 나의 손.

착한 원이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도넛을 낚아채는 대신 아빠를 힘껏 끌어안는다.

"애 이 썩는데 왜 또 이런 걸 사왔어?"

이가 좀 썩어도 괜찮다. 건강을 놓고 따져보아도 도넛을 보며 끓어오르는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이 아이의 면역력을 쑥 올려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사실 매번 서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먹을거리를 사오는 데는 좀 별다른 이유가 있다. '기억의 컷'을 남기기 위해서다. 추억 같은 거냐고? 비슷하지만 좀 다르다. 추억이 동영상이라면 내가 말하는 기억의 컷은 스틸 사진이다. 앞뒤 맥락 없이 그냥 그 순간만 캡처되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추억을 만드는 데는 꽤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같은 공간에서 장시간을 함께하며 특별한 경험을 공유해야 한다. 여행이 그렇다. 컷을 따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규칙적인 루틴 속에서 일관된 메시지만 전달하면 된다. 출장 갔다 올 때마다 가벼운 선물을 사 온다든지, 생선구이가 반찬으로 올라오면 어김없이 가시를 발라준다든지, 밤마다 꼭 손을 잡아준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런 사소한 행동들의 반복은 이미지가 되어 아이의 뇌 그리고 가슴에 선명하게 박힌다. 교회 집사님들의 간증을 보면 자신이 어릴 적 '자신을 위해 매일 새벽기도 나가는 엄마'의 얘기가 단골로 등장하는데, 이런 게 바로 '기억의 컷'이다.


TV에서 코인으로 떼돈을 벌고 파이어(조기은퇴)를 선언한 한 청년의 인터뷰를 들었다.

"전 이 돈으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해요"

훌륭하고 옳은 생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기 위해 개인의 소중한 시간을 바쳤는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 시간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실제 돈이 있으면 많은 시간을 벌 수 있다. 세탁을 직접 하지 않고 세탁소에 맡기면 그만큼의 시간이 더 생긴다. 가정부를 쓰면 가사 노동하는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이 청년의 계획엔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있다. 그렇게 번 시간을 어디에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과연 그많은 돈과 시간을 어디에 쓰고 있을까?

요즘 강남 유흥가에 코인이나 주식으로 벼락부자 된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고 한다. 명품 인기가 하늘을 치솟으며 우리나라 명품시장이 세계 최고의 호황이란다. 유흥을 하고 명품을 사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기억을 남기진 않는다. 유흥의 추억? 명품의 기억? 그런 건 없다. 있다면 말초적인 쾌락이고 으쓱하는 기분이다. 인생의 의미를 새벽안개처럼 증발해버리는 짜릿한 기분에 둔다면야 뭐 납득은 된다. 정말 센 걸로 한 번만 빨고 죽어도 좋아! 이런 멘탈? 글쎄다. 마약중독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시간은 기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남기는 것이다. 기억을 남기는 시간만이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돈이 많다는 것은 기억을 생산하기 유리한 조건이 되지만 '기분'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기도 쉽다. 양질의 기억이 돈만으로 가공될 수 없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물질 만능'으로 재벌 3세의 자살을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식을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지혜 역시 마찬가지다.


도넛을 든 아빠의 모습이 액자처럼 막둥이 기억의 박물관에 걸렸을 거라 생각하면 뿌듯하다. 이런 가성비 높은 투자가 또 있을까. 남들이 오해할까 봐 툭 터놓고 얘기는 못하지만 난 이미 경제적인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기억을 만들 만큼의 물질은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그 물질의 크기란 것이 세상 기준으로 보면 보잘것없겠지만 나는 진심 별로(전혀라곤 말 못 한다) 부족함이 없다. 만 사천 원으로 이렇게 멋진 스틸컷 한 장을 남기는 법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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