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랑바쌈 Dec 13. 2021

자식의 세계

부모의 개입이 불러온 파국적 결말

"엄마가 지호랑 놀지 말라고 했어요."


원이가 절친인 지호의 엄마한테 전화로 말했다.

통화내용을 듣고 나는 깜짝 놀라 폰을 낚아채고 싶었지만 그러진 못했다.

할 말이 정리되지도 않았고, 괜히 아빠까지 나섰다가 일이 더 커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원이가 지호를 실수로 밀어 넘어뜨렸다. 원이는 곧바로 사과했고(본인 말로는 싹싹 빌었다고 한다), 지호는 용서했다. 그런데 지호의 용서에 단서가 하나 붙었다.

"용서는 하는데 내가 기분이 나쁘니 내일은 너랑 같이 학교에 가지 않을거야."(같은 동에 사는 둘은 매일 아침 1층에서 만나 나란히 학교에 간다.)

"엄마, 지호랑 내일은 같이 학교 못가"

그날 저녁 식탁에서 원이가 털어놓았다.

순둥이 원이는 벌칙을 순순이 받아들였고, 굴욕감을 느끼긴커녕 내일 어떻게 혼자가나 하는 걱정뿐이었다.

와이프는 분노했다.

나 역시 좀 꺼림칙했다.

차라리 화가 나서 "너랑 안 놀아" 이랬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벌칙이라니. 초등 2학년 애들끼리.

안 그래도 지호한테 너무 끌려다니는 모습이 탐탁지 않았던 와이프는 단호하게 얘기했다.

"이제 걔랑 놀지마."

원이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졌다.

원이는 지호랑 계속 놀고 싶고, 학교도 같이 가고 싶었다.

"야 그럼 내일 쉬고 모레 다시 지호한테 전화해서 같이 가자고 할거야? 그럼 너 완전 바보 되는 거야"


다음날 지호는 자신이 내린 벌칙을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벌칙이 풀린 그다음 날 아침 지호한테 학교 가자고 전화가 왔다. 와이프는 일찍 출근하고 집엔 원이와 나만 남아 있었다.

"너랑 같이 못가."

"왜?"

"몰라,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

지호는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건 지호의 엄마였다. 지호의 전화를 낚아챈 지호 엄마는 원이한테 부드럽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원아, 지호랑 화해한 거 아녔어? 근데 왜 안 놀아?"

"엄마가 놀지 말라고 했어요"

원이는 순진하게 모두 불었다. 지호가 벌칙을 주었다는 '중요한 사실'은 쏙  빼놓고.

만약 내가 그날 조금만 일찍 출근해서 그 통화내용을 듣지 못했더라면 상황은 더욱 엉킨 실타래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두 엄마는 통화를 했고 '어느 정도' 오해를 풀었다.

그 후로 지호와 원이는 여전히 잘 지낸다. 실은 같이 가지 않은 그날도 교실에서 그리고 방과 후 둘이서 재밌게 놀았다고 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모든 것이 그 이전으로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다른 엄마가 내 아이에게 분노를 품었다는 사실은 지호 엄마 입장에선 불쾌함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와이프는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버린 걸 인정하면서도 후회하진 않는다고 한다.

큰 딸 키울 때 눈치 보며 참기만 했는데, 한방 날리니 속은 시원하단다.

나도 그런 엄마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원이는 부러운 녀석이다.


영화 '우리들'의 마지막 장면이다.

- 누나: (동생의 멍든 눈을 보고) 너 연오랑 또 싸웠어?

- 동생(6살): 어 이번엔 나도 때렸어.

- 누나: 그래서 그다음엔?

- 동생: 연오가 또 때렸어.

- 누나: 그래서?

- 동생: 그래서 같이 놀았어.

- 누나: 야 너 바보야? 그러고 같이 놀면 어떡해!!

- 동생: (천연덕스럽게) 그럼 어떡해?

- 누나: (흥분해서) 다시 때렸어야지. 걔가 다시 때렸다며? 그럼 또 때렸어야지.

- 동생: 또? 그럼 언제 놀아?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오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난 걍 놀고 싶은데..


엄마는 지호랑 놀지 말라고 한다.

아빠는 애들 일에 어른이 끼어들면 안 된다고 한다.

원이는? 걍 놀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은 몰랐던 맛의 비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