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게 좋아
나이만큼만 늙어가고픈 동안의 바람
초저녁이면 잠이 쏟아진다. 아침에 몸이 무겁다. 억지로 깨면 또 하루가 살아지는 것이 신기하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고약한 졸음이 덮친다. 마약 같은 TV 화면에 눈꺼풀을 걸치고 리모컨에 손가락에 남은 마지막 힘을 실어가며 간신히 버텨보지만 이내 소파 쿠션을 머리 아래로 끌어당긴다. 나의 하루는 그렇게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나는 그렇게 매일 임사체험을 한다.
얼마 전 차 안에서 신호대기 중 잠시 핸드폰을 쳐다봤다. 화면의 글자가 뿌옇다. 나도 모르게 팔을 뒤로 뻗었는데 뿌연 글씨가 또렷해졌다. 이 자동반사적인 액션이 마치 데자뷔처럼 느껴져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그 놀람이 환희나 기쁨의 감정일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부나 회피 같은 것도 아니다. 지하철에서 깜박 잠들었다가 "이번 정류장은.." 하는 안내방송에 놀라 벌떡 깨어나는 그런 순간이다.
'그래, 올 것이 이제야 왔구나.'
살면서 '동안'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어왔다. 나도 여성들에게 곧잘 던지는 립서비스다. 원래 같이 뛰면 속도를 잘 못 느낀다. 상대는 나의 거울이기에, 동년배를 향한 '동안이십니다'는 자신에게 하는 격려에 다름 아니다. 이정재와 김희선의 몸에 내 나이를 대입하며 받는 위안이다. 나는 이정재처럼 잘생긴 동안은 아니지만 아무리 보아도 동안은 동안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히 재수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지만, 솔직히 나는 동안 남자로서 살면서 동안이 뭐가 좋다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어려 보인다는 것은 연령 서열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는 마이너스다. 사회에서 만난 비슷한 또래의 영감님한테 '당신도 내 나이 되어보면 알 거야'하는 훈계를 듣다 보면 묘하게 불쾌하다. 어려 보인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동창회에서 단연 독보적으로 젊어 보이셨지만 동창생들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뜨셨다. 이정재처럼 동안과 잘생긴 외모가 결합되어'관종의 재미'를 누릴 것이 아니라면 남자의 동안만큼 쓸모없는 것이 또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동안은 상대의 눈을 속여도 자신의 나이를 속일 수 없다. 나에게도 어김없이 노안이 찾아왔고, 머리카락의 소실은 꽤 오래전부터 진행되었다. 이왕이면 대머리보단 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바랐다. TV에 나온 정치인들의 멋들어진 백발이 참 멋있게 보였다.
바야흐로 잘생기고 멋진 동안의 시대다.(누차 말하지만 나는 잘생기고 멋지지 않은 그냥 동안이다.)
서른을 훌쩍 넘겨도 결혼하기에 '아직 어린 나이'라고들 생각한다. 삼사십 대가 너무 젊어졌다. 외모 가꾸기와 건강관리의 열풍의 결과다. 2000년대 초반에는 성형수술이 유행했었는데, 요즘은 외모관리의 트렌드가 좀 더 건전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PT, 요가, 필라테스 이런 개인 운동이 대세다. 90년대 TV 드라마에서 흔희 등장했던 30대 후반의 배 나온 대기업 과장님의 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요즘 30대 후반은 20대와 구분이 어렵다. 체중관리 잘된 몸, 발목이 훤희 보일 정도로 바지를 잘라 입고, 한쪽 귀에 귀고리를 걸치고서 목이나 팔뚝에 과하지 않은 타투가 살짝 비치면 영락없는 이십대다. 정해진 시간에 닭가슴을 섭취하고 퇴근 후 두 시간씩 운동에 매진하는 헬스 가이와 필라테스 걸들이 내 주변에도 꽤 많다. 삼십 대 중후반임에도 이십 대처럼 활력이 넘친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미혼이라는 것. 실제 통계상 34세(88년생) 10명중 기혼자가 4명이 안된다고 한다. 뉴노멀로 착각할 만하다.
"눈을 낮추긴 어려우니 내 가치를 올리는 수밖에."
당당하게 선언하며 탄탄한 근육과 탄력 있는 피부를 유지하기 위한 펌핑을 멈추지 않는다.
건강을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 의사가 50대 중년 출연자의 피부, 근육, 바이털을 측정한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신체나이는 30대"
착각은 금물이다. 20년 젊어진 몸을 갖고 있다고 해서 수명이 20년 더 길어지는 것은 아니다. 팔팔하든 골골하든 사람은 대체적으로 자기 수명대로 산다. 환갑이 넘으면 노인이 되고 아흔이 넘으면 대체로 장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주어진 수명 내에서 건강함을 누리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다. 20대의 몸으로 40대를 산다는 데 Why not?
"지금 마흔은 예전에 서른 정도밖에 안돼"
이런 궤변에 혹해 결혼을 미루는 청년들을 참 많이 본다. 미루다가 결국 비혼의 늪에 빠진다. 그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른 채. 신체나이와 결혼은 별개다. 신체나이를 당겨도 가임기를 미룰 순 없다는 게 과학이고 팩트다. 어려 보인다고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초등학교 입학을 미루진 않는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20대의 일을 40대로 미룰 수 없다.
나는 차라리 나이에 맞게 늙어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생로병사는 인간이 불사(不死)의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신이 주신 선물이다. 꽃이 시들고 풀은 마르고 나무가 나이테를 남기듯 자연스러운 이치다. 내게 주어신 시간은 유한하며 그 시간동안 해야할 일을 부지런히 완수해 나가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삼십대의 나는 이제 막 바람을 가득 채운 축구공처럼 딱딱하고 빵빵했다. 그 넘치는 생기가 멋진 골도 터트리기도 했지만 때론 그 딱딱함이 누군가에게 부딪혀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런 공이 언젠가부터 조금씩 바람이 샌다. 조금씩 빠지는 이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다. 예전처럼 빳빳하고 빵빵하진 않지만, 쿠션이 생겨 다른 이에게 부딪혀도 아프지 않고 상대를 아프게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서서히 사그라드는 것은 축복이다. 그렇게 오래 청춘의 빵빵함을 누리다가 누군가의 한방에 뻥하고 터지는 축구공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오늘 밤도 소파에 쓰러져 내 안에서 새어나가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잠든다. 눈이 흐려지는 소리, 귀가 어두워지는 소리,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소리,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새어가는 소리. 뼈마디와 치아가 마모되는 소리.. 시간에 비례해 제대로 늙어가고 싶다. 생의 끝에서 마지막 한숨의 영혼이 떠나가며 노을처럼 잠기듯 편안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 이게 대단한 욕심임을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