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년 전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며 오태경옹(95)은 목소리를 높였다.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 그 평화롭고 조용하던 마을에 군경의 지원을 받는 서북 청년단이 내려와서 살인과 강간을 일삼을 때, 가장 고통스러운 건 신고할 데가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가시리 마을 사람들의 피난 동선을 따라 만들어진 가시리 4.3길을 무거운 마음으로 걸었다. 마을의 맨 왼쪽 동산에서 보초를 서던 사람들이 맞은 편 동산을 향해 “검은 개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치면 경찰이 떴다는 이야기였고, “노란 개가 나타났다” 소리치는 건 군인이 떴다는 이야기였다. 주민 몰살의 명을 받고-이유? 그 이유를 마을 주민들도 알고 싶어했다- 군인들이 샅샅이 마을을 뒤질 때, 간난 아이들을 품에 안은 아이 엄마들이 가시천 다리 아래 숨어있었단다. 아기 울음소리는 들리는데 풀숲에 숨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군인들은 다리 아래에 수류탄을 던졌고 이내 조용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그 다리 위를 걸으면서, 현기증을 느꼈다.
제주 도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모든 군인이 받든 건 아니었다. 고 문상길 중위는 한 명이라도 더 학살하라는 박진경 연대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가 자고 있는 관사를 찾아갔다. 죄 없는 도민을 죽일 바에야, 차라리 당신을 죽이겠다며 박진경에게 총구를 겨눠 사살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지 첫 번째 사형수로 형장에 선 그는,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이 내 영혼을 받아줄 것이다. 부디 누군가의 군대가 아닌 대한민국의 군대가 되길 바란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에 사라졌다. 그의 나이 겨우 22살이었다.
왕벚꽃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는 전농로 거리에서, 문상길 중위가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스물 두 해 짧디 짧은 나이를 빛나게 살다가 갑자기 사라진 문 중위의 생애가 저 흐드러진 왕벚꽃과 닮았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그 거리를 걸었다.
제주 4.3 평화센터에는 정말로 많은 위패들이 있었다. 1948년부터 1955년까지 7년간 제주 도민 3만 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원이 확인 된 1만 5천구의 위패가 있었다. 그 위패를 둘러싼 붉은 동백, 붉은 동백, 붉은 동백.
우리는 4. 3 평화 센터 옆에서 고사리를 채취했다. 그날도 고사리를 채취하다가 이유 없는 죽음을 당했을 사람들과 그 어이없는 순간을 생각하며.
섯알 오름 학살터는 생각보다 작았다. 그 작고 둥근 공간 위에 사람들을 둥글게 세워놓고, 총을 쏘고, 사람들이 구덩이로 떨어지면, 또 다른 사람들을 세워놓고 총을 쏘고, 그렇게 250명을 하룻밤에 학살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현장 가까이에 다가가서 그 끔찍한 구멍을 내려다봤다. 수북히 쌓여있었던 유골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하지만 일행 중 한 명은 차마 그 땅을 밟을 수 없었다고 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40여구의 유골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 땅을 감히 밟기가 두려웠노라고. 대신 그녀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무엇을 찾냐고 물으니, 여기에도 꽃이 피어나고 있는 게 신기해서 바라보고 있노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우리를 만났을 때 수줍게 음식 바구니를 내밀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꽃이 예뻐서, 화전을 부쳐봤어요”
돌아가실 날이 머지않았지만, 그 때까지 한 명에게라도 더 4.3을 알리겠다는 오태경옹(95)은 4.3에게 아직 이름이 없다는 걸 안타까워 하셨다. 5.18은 민주화 운동, 4.19는 혁명이라는 정명(바른 이름)이 있는데 4.3은 70여년이 지나도록 그냥 4.3인 것이다. 굳이 붙여서 한다는 말이 4.3사태 4.3사건.
한강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경하는 용기 내어 성냥불을 긋는다. 하나의 성냥불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한 희망을 상징한다. 그것은 우리가 오태경 옹의 목소리를 듣고, 기억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할 때 피어나는 꽃 한송이다. 그 꽃으로 누군가는 또 화전을 부쳐 굶주린 이들을 먹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