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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여자 Sep 23. 2015

생각없이 떠났다가 생각 마주하기

비오는 바다를 보며 오만가지 잡생각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알랭드보통「여행의 기술」-


나는 비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내리기 전부터 coming soon 예고라도 하듯 습한 더위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도 싫고,(나는 이럴 때 짜증을 부리며 나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의 신발 중 가장 젖어도 될 법한 신발을 골라 신어야 하는 것도 싫다. 비를 싫어할 이유를 최소 10가지는 더 들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나의 시간 대부분을 실내에 묶어두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휴일을 맞이한 지난 토요일에도 비가 내렸다. 혼자만의 기차여행을 계획했던 나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질척거리는 거리를 걸어다닐 자신이 없었던 나는 집에서 캔맥주나 마시며 밀린 미드 시리즈나 챙겨볼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만다. 우리집 김여사님의 폭풍 잔소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깐... 무작정 책 한 권을 챙겨들고 나와서는 차 시동을 켰다. 집 앞 커피숍이라도 갈 요량이었는데, 막상 나오고 보니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이럴땐 역시 바다가 좋겠지?

차에 기름도 빵빵하게 넣고는 부산울산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부산에도 유명한 바다가 여러곳 있지만, 왠지 북적이는 사람들을 감당할 자신도 없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주차비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던 나는 울산 일산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가는길에 수업 간 엄마(나에게는 언니)때문에 하루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할 조카들도 차에 태웠다. 혼자만의 여행을 시간을 원했지만 여행길에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벗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깐...


드넓은 바다의 내음을 만끽하기도 전에 우리는 밥부터 먹기로 했다. 분명 운전하는 내내 입맛도 별로 없고 커피 한 잔 딱 마시면 좋겠다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입안에 군침이 돈다. 평소엔 내 입에 넣기 바쁜 손놀림이지만 조카들의 불꽃 눈빛에 당할 재간이 없어 담겨 있던 스파게티를 모두 나눠 주었다. 아이들을 먹이고 나니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이 든다. 이는 아이들이 잘 먹어 흐뭇함도 있었겠지만 그저 진이 빠져서 입맛이 사라진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았다. 제 입보단 제 새끼 입에 넣기 바쁘고 자신의 몫이 아닌 남은 음식을 처리해야하는 세상 모든 엄마들의 대단함을 느끼며 역시 나는 아직까지 싱글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한다.


배불리 먹고 나니 이제야 바다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한껏 지푸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내 버릴것만 같았고 내리는 비에 성난 바다는 꽤 높은 파도를 만들어냈다. 역시 나오길 잘 한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성난 파도는 몇 주째 오락가락 하던 나의 마음을 잠잠하게 만들었다.

사실 요즘들어 지금의 일을 계속해야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들로 가득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긴 하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억척스러운 근무환경과 소위 말하는 능력없는 낙하산 부서장 밑에서 일을 하는 것은 여간 쉬운일이 아니었다. 월급날만 되면 품고 있던 사직서를 멋있게 던져 버리고 나의 인생을 살련다를 외치고 싶은 충동이 물밀듯 올라오지만 현실은 이마저도 안하면 당장에 돌아올 카드값과 적금이 걱정인 오포세대의 현실. 전문직종도 아닌 서른살의 여자가 4년의 경력을 가지고 새로운 직장을 갖기란 쉽지 않다. 이제껏의 나의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후회로 마음이 심란하고 복잡했다. 그런데 가만히 바다를 쳐다보고 있자니 내가 언제 고민이 있었던가? 그냥 지금 내가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그림같은 풍경속에 서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조금 더 바다를 가까이 보고 싶었던 우리는 모래사장에 한 발 들여놓았다. 물에 젖어 무거워질대로 무거워진 모래를 마주하니 더러워질 차안이며 옷이며 처리해야할 많은 일들을 걱정했다. 한 발 내딪고는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 조카들은 "모래는 털어버리면 그만이잖아!"라고 말한다.

가끔 어리게만 봤던 조카들에게서 대단한 것을 배우기도 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없는 일에는 일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안될 이유 수십가지를 만들어 아예 시작조차할 수 없는 일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모래 털어내는 일이 뭐가 대수라고 모래사장 걷는 일도 망설여야 했던걸까.

우리는 흠뻑 젖어있는 모래사장에서 걷기도 하고 파도를 피해 뛰어다니기도 했다. 내친김에 소박한 모래성도 쌓아 올렸고 나는 실제 내집이라도 얻은듯한 기쁨과 여유를 얻었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모래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놀고나서야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비오는 날 촉촉히 젖은 바다를 기대하며 떠났던 여행이었는데, 나는 왜 굳이 제일 구석에서 바다 끄트머리만 겨우 보이는 커피숍에 자리 잡았는지 모르겠다. 앞 건물에 가려져 보이는 반쪽자리 바다. 그래도 창가를 간간이 두드리는 빗소리며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재즈음악은 나를 충분히 감성적으로 만들어준다.

새로운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한 번씩 꺼내어 읽는 알랭드보통의 '여행의 기술'. 대만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나에게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이 또 어떤 동기를 불어넣어줄 지 기대하며 한 자 한 자 읽어내려갔다. 너무 읽어서 이제는 익숙한 글귀들도 매번 새로이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새로운 의미와 동기를 불어넣어준다. 그것이 여행의 묘미이자 독서의 재미겠지.

네 시간 남짓한 여유를 보내고 현실로 돌아가야할 시간. 똑같은 일상의 반복과 똑같은 크기의 스트레스가 돌아올테지만 나는 비와 바다와 책, 시원한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의 위로를 받고 새로운 결심도 생겼으니 작심삼일은 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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