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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여자 Sep 05. 2016

해줘야 하는 말, 할 수 없는 말

다름을 인정해야 비로소 가능한 '소통'

# 01

    '남자 친구가 서운하게 했다' 또는 '남편이 짜증 나게 군다' 내가 꺼낸 말이지만 듣고 있던 친구가 '그래 니 남편 진짜 별로다'라고 하면서 자기 남편 자랑을 늘어놓거나, 그런 남자 친구랑은 속히 헤어지라고 부추기기만 하는 싱글 친구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미쳤지.. 왜 이 말을 해서..' 싶어 진다.


# 02

    친구가 자기 남편에게 서운했던 이야기를 한다. 들리니 듣고는 있지만 딱히 해줄 말은 없다. 지난날 내 남편을 같이 욕해주는 친구에게 뭔가 서운했던 기억을 되짚으며 친구의 신랑 편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려 하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자니 듣고는 있는 거냐 묻는다.


    답답해서 속 좀 비워내고 싶어서 하는 말들이 가끔 더 숨 막힘으로 다가오거나 친구의 안색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안타까운 이내 마음을 친구의 마음에 쏙 들게 표현해 낼 수가 없다. 말은 하고 있지만, 말이 말 이상의 그 무언가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친밀과 애정의 척도를 얼마나 비밀 없이 다 까발릴 수 있나로 착각했던 시절이 있다. 그건 그냥 시시콜콜 작은 이야기까지 다 할 수 있고 그리 심각할 것 없던 비밀만 간직했던 어렸을 적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30대인 지금 우리에게 비밀이라는 것은 정말 수위가 높아지고 꽤 심각해져서 누군가에게 그것을 털어놓기란 쉽지 않다. 이 일로 이 사람이 나를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지, 저렇게 보면 어쩌지 우려가 더 앞서기 때문이다. 비밀 자체보다 이 비밀을 받아들일 세계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나'를 편견 없는 쌩(?) 눈으로만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각자의 경험으로 세상을 보는 기준을 세워나간다. 모든 사람이들은 그 자신의 필터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 필터는 강력해질 것이고. 평생 내편이 돼줄 거라 기대한 남편에게도 숨긴다기보다는 굳이 들추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있고, 친한 친구에게 내 고민을 이야기할 때도 그 친구의 반응으로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을 얼마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면 입을 떼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내가 예상한 모범답안이나 반응(답. 정. 너.)을 강요하게 되거나 그냥 말하지 않는 쪽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약속 같은 거 없이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다가 아이 하교 시간에 맞춰 또 움직이는 아이 엄마들을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화(라고도 표현하기 아까웠다. 그냥 분절된 '각자의 말'을 쏟아내는 거랄까)를 하며 아까운 오전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 당시 내 눈에는 머리카락 수를 세는 것 마냥 의미 없는 무한루프 같았다.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신들 친구도 아닌 나(당시 학원장)를 찾아와 아이 교육에 대한 상담으로 시작해 고부간의 갈등이나 다른 아이 엄마들과의 정치, 심지어 남편과의 잠자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학부모들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 최선을 다해 들어주고 반응했다. 공감의 대가로 손꼽히는 아침마당 이금희 님 못지않은 격공을 쏟아냈다. 속으로 '아니 이 엄마는 친구도 없나? 왜 자기 애가 다니는 학원을 찾아와서 그런 얘길 해?'와 '아휴, 참 딱하다 얼마나 마음을 내려놓을 데가 없으면 나한테 이런 이야길 할까?'라는 두 가지 마음을 줄타기하면서. 당시의 나는 그들이 정해놓은 답을 알 수가 없어 더 격한 다른 주변인들 (또는 책,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의) 예시를 끄집어 내며 이런 사람도 있는데요 뭘, 따위의 피상적인 싸구려 위로를 했다. 나를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내던 그 아이 엄마들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다면 학습된 격공 대신 '제가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정말 힘드시겠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며 손이나 한 번 따뜻하게 잡아드릴텐데... 



모든 사람이 내 마음 같을 수 없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명상 내지는 기도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믿는 신은 세상의 사람들과 말을 섞어 소문을 내지도 않으며 편견을 가지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위로를 턱하니 내놓진 못하지만 명상 끝에 내가 나에게 해주는(또는 발견한) 위로 또는 신이 나에게 해줬다고 믿는 어떤 말이나 계시로 안정을 되찾는 것이 아닐까.


    절친한 친구도 가까운 가족도 내 마음과 꼭 같을 수는 없다. 심지어 나도 내가 꺼내 쓰는 매일의 가면 속에 갇혀있는 게 아닐지, 진정한 나는 어떤 모습일지 헷갈리는 판국에 내가 타인까지 어떻게 똑바로 알 수 있으랴. 내가 누군가에게 내 속내를 털어놓으리라 결심하면 내가 원하는 그의 반응을 먼저 알려주고 대화를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오늘 너무 답답해서 그러니까 그냥 듣기만 해줘. 해결이나 조언은 조금만 지난 후에 해줄래?' 상대방을 내 감정의 찌꺼기를 처리하는 쓰레기 통으로 여기라는 게 아니다. 내가 그 사람의 반응으로 스트레스받는다면 또는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면 (말을 안 할수도 있겠지만, 할 것이라는 전제하에는) 이런 방법으로 절충안을 삼을 수 있겠다는 것이다. 대신 그 사람이 나에게 고충을 토로할 때도 그 사람의 원하는 내 반응 방식을 요구해야 하리라. 물론 이런 이성적인 대화 방식이 쉽겠냐만은 이런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다른 사람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다는 걸 받아들여 소통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겠다.








    사람이 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 내 임종의 순간이 아닐런지. 아니면 마지막까지 이해라는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눈 감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실망하고, 짜증나게 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에게 내 잣대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반응해달라는 기대를 해서라고 할 수 있다. 기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하는거겠지?. 정말 쉽지 않겠지만. 









+뻘글



     SNS를 하다보면 '소통해요' 라는 문장을 많이 접하게 된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제대로 된 소통이 어려워지고 (재미, 인맥, 상업 등) 필요에 의해 소통하려고 애쓰는 것은 그냥 소통이 아니라 '이용'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자 '소통해요'라는 글이 '서로 이용해요' 로 보이기 시작한다. 인스타 팔로워 늘리고 싶으니까 '이용해요', 내 댓글 수도 늘리고 싶으니까 '이용해요'. 당신이 원하는 소통은 어떤 겁니까? 댓글 달아주면 됩니까? 팔로우 해주면 됩니까? 상업적인 홍보에 동참해주면 됩니까? 라고 댓글을 달고 싶은 극도로 비관적이었던 어제의 나는 정말 불통의 시대에 불통의 나이를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소통을 들먹이니 괜히 나만 불통자인가 싶어 우울해진다.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그래, 그거 하고 싶다. 서로의 마음에 난 생채기들에 딱지가 않고, 흔적으로 남고를 반복하면 무뎌지고 굳은 살이 되어 괜찮아지나? 그건 이해하게 되는걸까 무뎌지고 닳아져 포기하게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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