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일상, 데친 이상, 튀긴 상상
영웅의 탄생
안개가 자욱한 동틀 녘 전주 예수병원 앞 큰 길에 몇백 년 된 나무 둥치만큼 두터운 몸통이 찻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푸른 빛이 도는 것이 뱀도 아닌, 그렇다고 용도 아닌 그 무엇이었다. '아니 대체 저게 뭣이당가' '구렁이여 구렁이' 신기해 입을 쩌억 벌리고 쳐다보다가 요놈 이거 대가리나 한 번 보자 싶어 단순한 호기심에 길을 따라 걷고 걸었다. 길에서 몸통이 사라지길래 아 드디어 그 대가리 한 번 보려나 기대에 차 고개를 들었더니 구름에 가리운 채 하늘 저 높이로 쳐들고 있었다.
"할머니, 나 어릴 적엔 왜 이렇게 온통 파란색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많아?"
막 다섯 살이 된 여자 3의 질문에 외할머니가 쏟아낸 여자 3의 태몽 내용이었다. 임신 초기에 꾼 꿈이라 사람들은 모두 아들이라고 '파란 것'들을 선물했다고 한다. 막상 딸이 태어나자 뭐든 해 낼 아이다, 대통령이 될 것이다, 큰 일 해 낼 것이다 등 (급조된 듯한;) 덕담들을 쏟아내셨다.
그래서일까. 나는 자연스럽게 원대한 포부를 품게 되었다. 그러던 찰나 국어시간에 영웅소설을, 역사시간에는 영웅들의 (영웅들은 특이하게도 일자 손금을 가지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기 손바닥을 칼로 그어 영웅 손금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자 3은 카터칼 등으로 손바닥을 긋기를 일주일. 가운데 손가락의 뿌리 부분부터 손바닥과 손목선이 이어지는 부분까지 세로로 일자 손금이 생겼다, 왼손에.
(역사에 따르면 주로 영웅들의 오른 손에 영웅 손금이 있다고 한다. - _-)
발돋움만 백만 스물 한 번
부산에서 나고 자란 여자 3은 열기구 풍선처럼 크게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한다. 그곳에는 독립의 기쁨이 있었지만 섬광처럼 짧고 강렬했으며, 이어지는 것은 지옥불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는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외로움은 모든 길목에 서 있었다. 학교라는 공동체를 벗어나 무한 경쟁 사회로 던져지면서, 타지 생활을 하면서, 고향에서 하는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면서... 단연 가장 외로울 때는 월급 통장에 월급이 잠깐 다녀가실 때다.
그렇게 억척과 나약을 오가며 청소년기의 그것보다 더 고약한 사춘기를 앓았다. 스스로를 어엿한 성인이라 생각했던 20대 중후반에도 (낯선 환경에서의 익숙함, 익숙한 환경에서의 낯 섬과 같은) 처음으로 마주하는 감정들이 있었고 그 감정으로 다른 버전의 여자3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덜 외롭겠지, 다음 달은 지금보다 조금 더 여유롭겠지, 다음해에는 조금 더 성공하겠지 스스로를 어르고 또 달래면서 발돋움만 수십 수백번을 반복한다. 어쩌면 이미 몇 번의 도약을 거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텐데도 드라마틱한 비상만을 도약이라 믿는 여자 3의 도움닫기는 오늘도 계속된다. (이러다 뛰기도 전에 지칠 기세지만;;)
영웅 있어요
동네 꼬마일 때는 초딩 언니 오빠들이 방과 후에 학원으로 뛰어다니는 꼴이, 초등학생 때는 중고생들의 다 똑같아 보이는 교복을 고쳐 입는 것이, 고등학생 때는 서울대를 못 가는 사람들이, 대학 때는 취업하지 못하고 졸업하는 선배들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는 현실과 타협하고, 결혼과 육아라는 이유로 일을 그만 두는 윗 사람들이 한심해 보였지만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아니 똑같이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나 자신에게 합당한 이유들을 대면서.
치열한 타지 생활에도 어느덧 익숙해지고 삶에 한결 여유가 찾아왔다, 폭풍우를 견뎌낸 바다처럼. 이제 일이 손에 익고, 스쳐가던 월급도 붙잡아 메어둘 줄도 알고, 열렬했던 연애는 무르익어 결혼이라는 새로운 관문에 다다랐다. 이제 내 푸른 구렁이도, 그림자 같은 외로움도, 식을 줄을 모르고 달궈지기만 했던 나의 열정도 이제 반만 마음에 품고, 나머지 반은 (실체는 없이 허상만 존재하던 내 상상 속에 이상적 영웅들과 함께) 고이 접어 창고방 보물상자에 넣어두어야겠다. 이제 본격 2인 3각에 돌입하는데 나만의 고지로만 달려갈 수는 없으니까.
천방지축 딸을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영웅들, 커가는 동안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을 내어준 영웅들, 앞으로 남은 평생은 나에게, 또 내 (미래의) 아들 딸에게 충성하기로 한 영웅, 언제든 거울 앞에 서면 만날 수 있는 내 눈에만 보이는 영웅. 날개가 꺾여 날지는 못해도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지켜주는 내 곁에 이런 영웅들 덕에 오늘도 나는 이상을 좇아 상상을 하며 일상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