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아주 먼 옛날이 아니라,
현재, 바로 지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조그마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덩치는 작아도 전 세계가 그 나라를 주목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저기에서 시시한 싸움이 일어나긴 했지만 세계는 대체로 평화로웠는데, 유독 그 나라만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몰랐거든요. 전쟁이 나면 그만이라구요?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엔 전쟁이란 단어에 함축된 의미가 좀더 다양했어요. 몇몇 사람들은 평화라는 걸 ‘누군가 깨뜨려줬으면’ 하는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작은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얼씨구나 하고 참가할 거예요. 좀더 쉽게 얘기하자면,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집에서 자식들끼리 싸우는 걸 보고 부모들이 대뜸 달려나와 서로에게 주먹질을 해대는 경우와 비슷해요. 거기에 좀더 살을 붙이자면, 싸움구경을 하러 동네 사람들이 나왔을 때 오징어를 팔거나, 싸우는 부모들에게 물수건과 이온음료를 파는 사람들도 떠올리면 되겠네요.
그 나라는 늘 전쟁준비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진짜 전쟁을 하는 순간 자기와 상대방 모두 끝장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전쟁을 벌이는 대신 가상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같은 편끼리 패를 갈라 넌 파랗네 넌 빨갛네 하면서 싸우고, 넌 귀족이네 넌 천민이네 하면서 싸워대는 모습은, 걸리버 여행기가 새로 나온다면 1순위로 들어갈 만한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물론 멀찌감치 떨어져 관찰해야 우습다는 거지, 가까이서 보면 그런 다툼은 정말 치열했습니다.
평화와 혼란이 곤죽이 된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건 힘센 놈에게 붙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속칭 줄타기라 하는 눈치작전은 광대들의 외줄타기보다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어제까지 너희 편, 오늘부터 우리 편 하는 식으로 소속을 바꾸는 사람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든 법이겠죠. 물론 정치인이라 부르는 계층들은 이런 일이 일상에 가까웠지만, 나머지 계층들은 이런 일이 상당히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대신, 자신을 거부할 수 없도록 큰 선물을 마련하는 데 열중했답니다. 지금 소개할 남박사님 같은 경우가 아주 좋은 예입니다.
속칭 공돌이라 불리는 과학자 계층인 남박사님은 항상 시간과 예산이 부족한 불행한 인재였습니다. ‘제게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이라는 변명을 웃으며 받아들이는 권력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독수리 오형제의 남박사는 후한 지원 속에서 이것저것 팍팍 만들어냈지만, 그는 자기가 원하는 연구를 마음껏 하기는커녕 초라한 연구결과에 덜덜 떨며 직장에서 잘리는 걸 걱정하는 처지였습니다. 명색이 생명공학자였지만 모르모트 이상을 지원받아 본 적이 없었던 그는 결국 스스로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먼저 자신에게 눈곱만큼 후원해 주던 초라한 권력자와 인연을 끊은 후, 밖에 나가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권력자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했습니다. 대통령은 그때 임기 말이었기 때문에 제외하고, 그 뒤에 우뚝 서 있는 1위부터, 남박사는 차근차근 면담을 시도했습니다. 서열 5위인 ○○○각하가 5분 가량의 면담을 허락하자, 남박사는 서열 1위와 만났다면 면담시간은 1분이었을까 하는 망상을 하며 그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둘은 소곤소곤, 수군수군, 쑤군쑤군 등의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5시간에 걸친 면담 끝에 권력자는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느닷없이 수천 억을 지원받은 남박사는 그 돈으로 연구소를 세웠습니다. 그동안의 자신의 노고를 떠올리며 몇십 억을 삥땅치긴 했지만, 그 정도면 크게 해먹었단 비난을 하긴 힘들 것입니다. 연구인력을 끌어모으고 기재를 사모은 끝에 연구시설을 완비한 남박사는 비로소 야심찬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그건 다음과 같았습니다.
‘좀비의 불사성 연구 프로젝트’
여기서 잠깐. 좀비란 썩어가는 시체가 벌떡 일어나 천천히 걸으며 우워어어 하는 괴생명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그 좀비를 왜 이렇게 연구하는 걸까요? 그 답은 좀비의 불사성에 있습니다.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팔다리가 날아가도 아무렇지 않게 기어다니는 것도 그렇고, 먹기는 참 많이도 먹지만 굳이 먹지 않아도 오랜 시간 움직일 수 있는 점도 있고…… 이런 대단한 능력을 이제껏 연구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좀비는 소설 속의 존재일 뿐이잖아? 라는 딴지가 있겠죠. 거기다 책을 좀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좀비란 아이티에서 마약에 취한 노동자들을 보고 오해한 것뿐이라는 정론을 들고 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이죠,
좀비는 정말 있다니까요?
여기서 놀라셔도 좋고 화를 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좀비가 실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 의심이 되신다면 망우리 공동묘지로 가서 열흘 정도 잠복해 지켜보세요. 그럼 어느 날 밤에 무덤을 뚫고 시체 하나나 둘이 불쑥 튀어나오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관리인이 졸린 눈을 비비며 정부에 신고하는 것도, 5분 대기조가 투덜대며 달려와 좀비를 때려잡는 것도 볼 수 있겠죠. 아, 이건 기밀로 분류되기 때문에, 실제로 시도했다간 정부에 잡혀갈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남박사의 이야기는 현재의 이야기이지만, 좀비는 옛날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수십 년 전에 이 작은 나라에서 대규모 전쟁이 있었고, 그때 많은 사람이 죽어서 땅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렇게 좀비가 불쑥불쑥 생겨나곤 했습니다. 정부는 당연히 좀비의 정체를 숨겼죠. 최초의 발견 때 수십 명에 달하는 감염자 -좀비는 방울뱀처럼 독을 갖고 있어서, 좀비에게 깨물리면 좀비가 되어버린답니다. 단지 같은 좀비가 되면 먹기 힘드니까, 배가 고플 땐 사냥감을 그냥 뜯어먹고 배가 부를 때면 독을 내뿜는다고 합니다 - 를 사살한 뒤로, 정부의 방침은 ‘발견시 비밀리에 사살’이었습니다. 이런 게 사회에 알려져서 좋을 건 절대 없었으니까요. 원인을 알면 깔끔하게 해결하겠지만 도무지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화장을 적극 권장하는 것 말곤 딱히 대책이 없었답니다.
남박사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습니다. 남박사 말고도 좀비의 존재에 대해 얼핏 들은 과학자는 수가 제법 되었지만, 남박사만큼 이를 자신의 목적에 훌륭히 활용한 케이스는 없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좀비에게 쏟아졌던 불신과 증오의 시선을 긍정적으로 바꾼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좀비야말로 훌륭한 군인이 되어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최적의 자원이라는 것, 그리고 좀비의 불사성만 따로 이식해 불사의 인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주제를 내세워 권력자의 호감을 샀습니다. 늘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훌륭한 총알받이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겠지만, 특히 후자를 얘기할 땐 그 시험결과를 제일 먼저 당신에게 적용시켜 드리겠노라고 큰소리를 땅땅 쳐대기도 했지요. 마침 그 권력자가 전날 밤 스물셋의 어여쁜 여대생과의 잠자리에서 십 분도 버티지 못했다는 사실이 묘하게 작용해, ‘좀비 인자가 내 몸에 들어오면 나도 정력 센 천하장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결론으로까지 연상되었던 것도 연구가 승인되는 데 한몫 했지요.
남박사가 연구소를 세우자 권력자는 바로 약속한 물건을 보냈습니다. 정부가 그동안 잡아죽이기만 했던 좀비들은, 이제는 산 채로 포획당해 연구소로 넘겨졌습니다. 그러면 남박사는 좀비의 상태를 파악한 후 여기저기 썰거나 꿰매거나 하며 신나게 연구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좀비가 발견된 사례가 없다고 하지만, 남박사의 생각엔 다 구라 같았습니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자신과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번 연구가 별 성과 없거나 남에게 뒤처지거나 한다면 자신은 정말 파멸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1년 정도 지난 후, 남박사의 굴곡 많은 인생은 슬슬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좀비들이 구속복을 찢고 탈출했기 때문입니다.
경보가 울렸을 때 남박사는 화장실에 있었습니다. 전날 비싼 양주를 마시고 아가씨와 3차까지 갔더니 컨디션이 상당히 나빠진 상태였습니다. 그 좀비 인자란 걸 빨리 찾아내 자기 몸도 개조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경보가 울렸으니 남박사가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이제 막 절반 정도 나온 응가를 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남박사가 후다닥 뒷처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연구원들이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남박사는 그중 하나를 붙잡아 상황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연구원은 며칠 전 잡아온 좀비 다섯 마리가 일제히 구속복을 찢고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 좀비들은 방사능이 상당히 많이 잔류한 드문 샘플들이었습니다. 옆 나라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해 방사능이 사방에 퍼졌던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의 방사능이 토양에 잔류해 좀비에게 뭔가 영향을 미친 것 같았습니다. 옛날 감마선을 맞고 초능력이 생긴 슈퍼소년 앤드류처럼, 좀비들은 방사능의 힘으로 이전의 샘플들보다 배는 강해진 모양입니다. 남박사는 구속복을 맨몸으로 찢어놓을 수 있는 좀비란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급히 CCTV를 조종할 수 있는 제어실로 향했습니다.
제어실의 CCTV는 연구실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방사능 좀비들은 이전의 좀비들과 달리 빠르게 달릴 수 있었고, 힘이 더 셌으며, 간단한 지능까지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전의 좀비들은 총을 쏘든지 말든지 슬슬 걸어오기만 했지만, 지금의 좀비는 매복이나 기습 따위를 하면서 착실하게 동료를 늘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먹는 것 대신 감염에 충실한 것은, 지금까지의 좀비와 전혀 다른 패턴이었습니다. 그동안 연구결과들이 너무 똑같아 돌연변이에 대한 건 생각도 안했던 남박사에게 이런 패턴은 매우 강렬한 자극이었습니다.
그래도 연구보다 자신들의 안전이 우선이었기에 남박사는 연구소의 격리 시스템을 급히 작동시켰습니다.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때 남박사에게 중요한 게 떠올랐습니다. 과거 자신이 떼먹었던 공사비는 절대 쓸 기회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연구소의 격벽 시스템 관련이었기에, 격벽은 설치만 되어있을 뿐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시설안전검사가 올 때마다 뇌물로 잘 넘겨 왔는데 이런 곳에서 어처구니없이 드러나 버리는 건 그에게 매우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제어실은 막다른 골목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격벽으로 차단이 되지 않는다면 좀비가 습격할 경우 빠져나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좀비들과 맞서 싸우는 건 더욱 힘들었습니다. 휴일이라 경비 인력이 거의 없어 이들에게 대항하기 힘든 데다, 바깥의 군대를 불러들여 일을 키웠다간 연구소가 폐쇄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연구소는 쓸데없는 정보 노출을 막기 위해 휴대폰 휴대 금지 정책을 내세웠기 때문에 그에겐 바깥과 연락할 수단마저 없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CCTV만 멍하니 바라보며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남박사는 문득 제어실의 유리문이 박살나는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의 이야기입니다.
연구소 근처에 있던 군부대에 뒤늦게 정부의 출동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정부에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제보한 사람은 애인을 안에 두고 탈출한 여자 연구원이었습니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가 비밀리에 사내 연애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 난리통에 무슨 로맨스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그녀를 따라 탈출했던 연구소 인사과장(미혼)은 연구소가 무사히 지켜진다면 징계를 내릴 필요가 있겠다고 속으로 결심했습니다.
휴일에 잘 쉬다가 느닷없이 비상이 걸려 살기가 충천한 군대가 도착한 것은 사태가 발생한 지 대략 한 시간 정도 후였습니다. 이 연구소는 비공개로 정부가 설립한 것이기 때문에 비상시에 대비한 매뉴얼이라는 게 턱없이 형편없었습니다. 게다가 남박사가 연구소에 감사가 들어올 때마다 그들에게 이것저것 편의를 봐 준 덕분에, 정부는 연구소의 보안이 철저하다고 굳게 믿고 안심하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신고가 들어오자 어느 부서가 이를 처리해야 할지 우왕좌왕하다 결국 근처에 있던 애꿎은 군부대에 출동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아마 이 군부대의 부대원 하나하나는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정부의 감시를 받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결코 누설하지 못하도록 압박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자신들의 운명을 알지도 못한 채 부대원들은 연구소를 향해 돌격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번 작전이 상대국의 간첩이 퍼뜨린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들을 ‘안식’시켜주는 것이며, 전공에 따라 조기전역까지 가능하다는 부대장의 훈시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조기전역이란 말년병장도 춤추게 하는 최강의 카드였기에 이들은 작전에 대한 불안감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목표물 전원 사살’이 아니라 ‘부상자는 최대한 신속하게 구조’였습니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들을 치료하는 방법은 아직까지 없었기에, 정부는 이번 일을 기회삼아 좀비에게 물린 자들을 죽이는 대신 샘플 삼아 연구해 보고, 성과가 있다면 사형수 등을 대상으로 인체실험도 시도할 생각이었습니다.
연구소는 철책 한 장으로 외부와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멀쩡히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나온 상태였고, 그들은 좀비가 바깥으로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철책을 닫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 너머에서 으르렁거리는 수십 마리의 좀비들의 모습을 본 순간, 병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총을 장전하고 안전핀을 풀었습니다.
그 뒤의 광경은 전투가 아니라 단순한 학살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신속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좀비들을 사살했습니다. 흔히 좀비 영화를 보면 좀비가 여러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와 혼란이 발생하지만, 만약 최초의 좀비떼가 흩어지지 않고 한 군데에 있다면 군대가 그들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뿐입니다. 좀비의 맷집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좀비 한 마리당 백수십 발의 총탄이 쏟아진다면 버틸 수가 없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어차피 철책에 붙은 좀비들은 외양부터 인간을 포기한 인상들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아무 부담 없이 3연사에 놓고 총을 갈겨댈 수 있었습니다.
사격이 끝나고 철책을 연 후, 병사들은 3인 1조로 연구소 여기저기에 흩어졌습니다. 연구소 부지가 상당히 넓기도 했고 건물도 쓸데없이 컸기 때문에 인원을 나눠서 수색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소 직원들이 선두 조에 붙어 안내를 해 주었기에 그들은 빠른 시간 내에 연구소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대부분의 좀비가 밖에서 전멸당했는지, 연구소에 남아있는 좀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연인을 놔두고 갔던 여자 연구원이 속한 조는 가장 앞장서 수색을 했습니다. 병사들은 여자 연구원의 숨막히는 뒤태를 보면서 그녀의 애인이 희생되었더라도 그렇게까지 슬플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보호 덕분에, 그녀는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무사히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병사들을 재촉하던 그녀가 휴게실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제법 넓은 공간인데다 먹을 것이 있어 생존자가 숨기에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휴게실의 얄팍한 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그녀가 흠칫하는 것을 본 병사들은 그녀를 뒤로 물러서게 한 후 문을 발로 차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랐습니다. 방 안에는 열 마리가 넘는 좀비들이 바닥에 널린 시체들을 뜯어먹는 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덤벼드는 좀비는 많이 봤어도 이들이 시체를 먹는 장면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병사들도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습니다. 한편 여자 또한 아직 말단직원이라 자기가 뭘 연구하는지도 제대로 몰랐던 터라, 좀비들을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애인의 반쯤 뜯어먹힌 머리통이 보인 순간, 그녀의 감정은 공포에서 분노로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저 새끼들을 어서 쏘라는 그녀의 괴성에 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좀비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미 자신들이 낸 소리에 반응해 서너 마리가 움직이기 시작했기에, 그들은 급히 총을 난사했습니다. 좀비들은 빠르게 다가왔지만, 총의 위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들의 발 언저리에 고꾸라져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좀비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 여자는 하이힐 뒤축으로 좀비의 머리를 사정없이 짓밟아대며 분풀이를 했습니다.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한 병사들은 천천히 총구를 들어 나머지 좀비들을 겨냥했습니다. 동료가 당했는데도 여전히 식사를 계속하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놈들에게 헤드샷은 너무 과한 친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방아쇠에 손을 가져갈 때, 갑자기 좀비 하나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살점을 여기저기 묻힌 얼굴이 너무 엽기적이라 병사들이 잠시 멈칫한 사이, 좀비는 허우적거리며 병사들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들이 허둥대며 총을 발사하려는 순간, 좀비는 외쳤습니다.
“쏘지 마! 나 여기 책임자 남박사야!○○○각하에게 연락하면 알 거야!”
실내에 정적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호일 뿐이었습니다.
시체에 엎드려서 이빨을 들이대던 좀비들이 모두 우르르 일어났습니다.
나도! 나도 사람이야! 총구 내려!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아니, 너희가 모두 살아있었다니?
일어난 자들이 제각기 생존신고를 한 직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최초에 병사들에게 쓰러진 좀비를 제외한 나머지들, 즉 몇 초 전까지 시체를 우적우적 먹어대던 좀비들은 사실 모두 생존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좀비의 신체능력이 월등해 피할 수가 없자 제각각 좀비인 척하며 그들을 따라다녔던 생존자들이라니, 좀비영화에도 이런 황당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서로가 생존자인 줄 모르고, 좀비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좀비인 척하며 시체를 우걱우걱 먹어댔습니다. 차라리 좀비 흉내를 어정쩡하게 냈다면 들켜서 잡아먹혔을 테지만, 이들은 좀비 연구에 있어서 세계 제일의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좀비도 속아넘어갈 멋진 연기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저마다 이렇게 살아있다는 수치를 토해내고 나니, 아무튼 살아났다는 안도감이 들어 그들은 허탈하게 웃어댔습니다. 뒤늦게 자신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게다가 시체를 뜯어먹고 피투성이가 된 몰골을 제3자에게 보이기까지 하고 나니,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어정쩡하게 웃으며 옷걸이처럼 맥없이 서 있던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문득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생존자는 그가 머쓱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일으켜 세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날카로운 이빨이었습니다. 그는 생존자가 아니라 생존한 좀비였습니다!
생존자와 최후의 좀비는 비명과 괴성을 지르며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마치 좀비와 좀비가 서로를 얼싸안은 것처럼 위화감이 없었습니다. 병사들이 어쩐지 그를 구해줄 의욕이 나지 않아 망설이자, 남박사는 그를 어서 구하라고 병사들에게 호통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 밖으로 토해진 것은 걸쭉한 트림이었습니다.
끄으으으억.
그것이 무엇을 먹고 하는 트림인지를 깨달은 남박사는 얼굴이 빨개진 채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곧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남박사보다 빨리 그 트림의 의미를 깨달은 여자는, 놀라운 힘으로 병사의 총을 빼앗아들고 눈앞에 있는 모든 좀비들에게 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긴 아쉬우니, 여자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볼까요?
이 나라는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가 남다른 만큼, 그녀에 한해서 약간의 지면이 허락되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가스 누출이라는 불행한 사고로 인해 상당수의 사망자가 나왔던 연구소의 생명공학연구가 재개된 지 삼 년 후, 가스중독 때문에 환각이라도 봤는지 좀비가 있다는 헛소리를 하며 횡설수설하다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던 미모의 여자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본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았어요.
-한밤중에 □□동의 대저택에서 피묻은 짐이 옮겨진 것으로 밝혀져…… 그 시간에 ○○○각하에게 무슨 일이라도?